둥근 발작 창비시선 267
조말선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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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줄에 동여매세요
자기 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일교차가 당도를 결정한다면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92-93쪽

사과 열매를 둥근 발작으로 보는 시인. 학교에 가서 '쓸모 있는' 사과가 되어가는, '인간'으로 퇴화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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