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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1 (완전판) - 죽음과의 약속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연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2부에서야 살인사건이 일어나며, 1부에서는 보인턴 가족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초반에 사건이 벌어지고, 푸아로의 활약을 주로 서술하는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은 가족과 그 구성원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여기서 푸아로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주체라기보다는 구성원들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과,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비중이 가고 있다. 즉, 어쩌면 살인 사건 자체에 대한 해결이나 범인이 누구인지를 파헤치는 것 보다는, 어쩌면 살인 사건 자체는 그저 이야기에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고, 실제로 크리스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치 다른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방식은 사실 최근의 작가들이 많이 쓰고 있는 방식인데, 약간의 미스터리적 요소, 혹은 반전이 있는 결말 등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크리스티의 소설만으로 놓고 보자면, 나는 여러가지 면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가 떠올랐다.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가진 가장, 그가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가족 구성원들, 변화가 없어 보이는 견고함에 외부의 요소로 생기는 균열, 그리고 젊은이들의 로맨스. <마지막으로 죽음이 오다>는 총 3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여기에서도 살인 사건은 소설이 꽤 진행되고 나서야 발생하고, 그 전까지 가족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물론, 재혼한 고고학자와의 여행 때문에 이야기가 서술되는 무대가 지금의 중동지역이라는 것도.
여러 사람의 심리에 집중한다는 점도 당연히 공통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티의 거의 대부분의 소설의 특징이므로 패스.
소설끼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크리스티답게, 이 소설에서도 연결고리들이 등장한다. 푸아로가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계기는 레이스 대령이 카버리 대령에게 써 준 소개장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랜 친구이자 정보부 동료로 설정되어 있으며, 레이스 대령은 <갈색 양복의 사나이>에 나왔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일 강의 죽음>에도 나왔다고. 그 외에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ABC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된다. 시간 순으로 그 이후에 이 작품이 쓰여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이 작품들이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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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알잖아? 그 여자는 죽어야 해."
예루살렘에 도착한 첫 날 밤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우연히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을 엿듣게 된 것이다.
"내가 가는 곳마다 어김없이 범죄의 냄새가 풍기는군."
푸아로는 입속말을 중얼거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소설가 앤터니 트롤럽의 일화를 떠올렸다. 트롤럽은 대서양을 건너던 도중 승객 두 사람이 그의 시리즈 소설 중 최근작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 하지만 그 진절머리 나는 노파는 좀 죽여 주면 좋겠어."
한 남자가 선언하듯 말했다.
소설가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신사분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당장 가서 그 노파를 죽여 버리겠습니다."
새라는 겨우 얼마 전에야 힘든 감정적 위기를 헤체고 나올 수 있었다. 한 달 전 4년 선배인 젊은 의사와 파혼했던 것이다. 서로 많이 좋아했지만 기질적으로 너무 많이 비슷했다. 당연히 의견충돌과 말다툼이 잦았다. 흔들림 없고 독단적인 그의 주장을 잠자코 받아주기에는 새라 자신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 새라 자시의 성격도 한때는 힘을 숭상했다. 다스림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다스릴 수 있는 남자가 나타나자 그 사실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파혼은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새라는 현명하게도 단순히 서로 이끌린다는 사실이 평생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앗다. 그래서 단지 진지하게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기억들을 털어 버리려고 일부러 신나는 휴가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때 노부인의 시선이 느닷없이 그를 향했다. 순간 제라르는 숨을 들이켰다. 이글거리는 작고 검은 눈이 그를 쏘아 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서 뭔가 힘 같은 것이, 그것도 아주 강하고 고약한 적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제라르는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버릇없는 응석받이 폭군들이 부리는 터무니없고 시시한 변덕이 아니었다. 노부인의 힘은 강력햇다. 적의로 번득이는 그 눈빛은 코브라가 뿜어내는 눈빛과 몹시 닮아 있었다. 늙고 쇠약하고 질병의 먹이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보인턴 노부인은 결코 무력하지 않았다. 노부인의 힘의 의미를 아는 여자, 평생 힘을 휘두르며 살았고 한 번도 자신의 힘을 의심해 본 적 없는 여자였다. 제라르는 언젠가 호랑이들을 부리며 굉장히 위험하고 화려한 쇼를 펼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위대한 야수들은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기어가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묘기를 부렸다. 호랑이들의 눈빛과 낮은 울부짖음은 분명 광포하고 비통한 증오를 표출하고 있었지만 고분고분 여자의 말에 복종하고 있엇다. 그 여자는 젊고 오만했으며 어두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엇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노부인과 똑같았다.
'동퇴즈(조련사).'
"그래서 마음 편히 전 재산을 그 부인에게 물려 주고 자식을 맡겨 버린 거군요. 우리 프랑스에서는 그런 일이 법적으로 불가능하지요."
"미국인들은 절대적인 자유를 믿습니다."
코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라르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프의 말이 특별히 인상적이랄 건 없었다.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서도 그와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유가 어떤 특정 국민의 특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현명한 제라르는 어떤 종족도, 어떤 국가도, 어떤 개인도 자유롭다고 일컬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정도는 다르지만 어디나 구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사실이 횡포의 원인이었다는 건가요? 예전 직업에서 비롯한 습관이라는 거군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각도로 보는 건 잘못이에요. 마음 깊이 자리 잡은 강박증의 관점에서 봐야 해요. 간수였기 때문에 횡포 부리는 걸 좋아하게 된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횡포 부리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간수가 되었다고 하는 게 옳겠군요. 내 말은 노부인이 그 직업을 택하게 된 건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은밀한 욕망 때문이라는 거예요."
제라르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인간의 잠재의식에는 그처럼 기묘한 것들이 숨어 있어요. 권력에 대한 욕망, 잔인함에 대한 욕망, 찢고 부스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유산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전부 그대로예요. 잔인성도 야만성도 욕망도...... 거부하고 의식적으로 피하려 한들 그런 것들의 위력은 때로 너무나 강하지요."
새라가 몸을 떨었다.
"저도 알아요."
제라르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요. 정치 강령에도, 국가의 운영에도 보입니다. 이건 인도주의, 연민, 동포애적 선의의 반작용이에요. 정치 강령은 이따금 지혜로운 체제, 유익한 정권 등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 역시 잔인성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권력에 의해 강제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폭력의 사도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이유로 케케묵은 야만성과 잔인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아, 정말 어려운 문제이지요. 인간이란 조금만 건드려도 균형감을 잃어 버리는 동물이니까요. 인간은 원초적인 욕구를 갖고 있어요. 바로 생존의 욕구지요. 너무 앞서 가는 것은 뒤처지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일입니다. 생존해야 하니까요! 어쩌면 그 때문에 케케묵은 야만성을 유지하려는 거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숭배하는 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
"그렇지요. 코프 씨는 선량하고 정직하고 다정다감하고 평범한, 미국인다운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이에요. 악이 아니라 선을 믿지요. 보인턴 가족의 분위기가 뭔가 아주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노부인의 행동을 악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삐뚤어진 헌신이라고 생각하더군요."
"그걸 보면서 노부인은 즐거워하는 거고요."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새라가 이내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텐데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들은 그럴 수가 없어요. 혹시 수탉을 가지고 실험 하는 걸 본 적 있나요? 오래된 실험인데 바닥에 분필로 선을 그은 뒤 수탉의 부리를 거기에 대어 주고 못 움직이게 하면 수탉은 자기가 거기에 묶였다고 믿어 버려요. 그래서 머리를 쳐들지도 못하지요. 이 가엾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노부인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지배가 정신적인 것이었다는 점도요. 노부인은 그들에게 최면을 걸어 자기를 거역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무시하겠지만 새라라 씨와 나는 잘 알고 있잖아요. 노부인은 자기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게 만들었어요. 그들은 감옥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기 때문에 문이 열려 있어도 그걸 보지 못하게 된 겁니다. 적어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더 이상 자유를 바라지도 않는 것 같더군요. 게다가 그들은 전부 자유를 두려워하게 되었고요."
"나는 적어도 크리스천 신앙의 핵심 교의 중 하나는 믿고 있어요. '작은 일에도 만족할 줄 알아리.'라는 것이지요. 나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야망이, 그리고 성공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해악을 알고 있어요. 그런 욕망의 실현은 오만과 폭력, 그리고 결국 채워지지 않는 탐욕으로 이어질 뿐이에요. 그 욕망이 거부당하게 되면...... 아! 그렇게 되면 정신병원은 증가할 것이고 광인들은 자기 이야기만 늘어 놓겠지요! 정신병원에는 평범하고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을 참아 낼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그곳에서 현실 도피의 수단을 찾아 내어 현실과는 평생 담을 쌓아 버릴 거예요."
새라가 불쑥 말했다.
"보인턴 노부인이 정신병원에 있지 않은 것이 유감이네요."
제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노부인의 자리는 실패자들 틈이 아니에요.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지요. 성공했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룬 겁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시도해야 한다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에요. 개입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막대한 해를 끼칠 수도 있어요.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한 판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해요. 어떤 사람들은 개입에 있어서 천재성을 보입니다. 아주 훌륭히 수행해 내지요! 그러나 서투르게 개입해서 내버려 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는 사람도 있어요! 또 나이라는 문제도 고려해야 해요.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과 확신에 대해 용기가 있어요. 실제보다 이론에 더 가치를 둡니다. 하지만 사실 이론과 실체는 모순적일 수도 있잖아요? 그들은 그걸 아직 경험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일이 정당하다는 신념만 있다면 그러한 모순이 있음에도 굉장히 가치 있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지요. 부수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해로움을 끼치는 경우도 많지만! 반면 중년에 이르면 경험이 쌓이기 때문에 해로움도 이로움만큼 크다는 사실을,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현명하게도 개입하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공평해요. 진지한 젊은이는 해로움과 이로움을 모두 끼칠 수 있는 반면, 신중한 중년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니까요."
"코프 씨, 나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상심리들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에요. 인생의 아름다운 면만 보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일상의 체면치레와 관례 이면에는 이상심리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예를 들어 잔인함 그 자체를 즐기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더 깊이 잠재된 무언가가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다는 깊고도 측은한 욕망이지요. 그것이 방해를 받으면, 즉 자신의 불쾌한 인간성으로도 필요로 하는 반응을 얻지 못하면 다른 방법으로 돌아서게 되는데, 그 자신이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의미 있게 여겨져야 하기 때문에 갖가지 이상하고도 도착적인 방법들에 귀착하게 되는 거죠. 다른 습성과 마찬가지로 잔인성도 길러질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푸아로 씨, 제가 듣기론 오리엔트 특급열차 사건에서 공식 평결을 받아들이셨다고 들었는데요?"
푸아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까?"
"그게 사실인가요?"
푸아로가 천천히 말했다.
"그 경우는 달라요."
"아니요. 전혀 다르지 않아요! 그때 살해를 당한 사람은 악마였어요."
"그렇다면 코프 씨는 감상주의자로군요."
푸아로가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사람이 가진 이상은 사실 천성적으로 깊이 뿌리박힌 게으름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인간성을 최고로 보고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결과적으로 제퍼슨 코프 씨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에 대해 최소한의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거예요."
"떄로는 그런 태도가 위험할 수도 있겠네요."
푸아로가 말했다.
제라르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보인턴 일가의 상황'이라고 일컫는 그 상황을 그는 잘못된 헌신의 경우라고 계속해서 말하더군요. 잠재된 증오, 반역, 굴종과 비참함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아주 미미했어요."
"어리석군요."
푸아로가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가족을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도록 만들어 놓고 왜 이런 해외여행을 감행했느냐 하는 겁니다. 외부와 접촉할 위험과 자신의 권위가 약해질 위험이 분명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제라르가 이렇게 말하자 제라르가 흥분한 표정으로 몸을 숙였다.
"하지만 몽 비외(오랜 친구), 그건 이런 겁니다! 노부인들은 지구상 어디나 똑같아요. 싫증이 나는 겁니다! 그들의 특기가 인내라 해도 인내에 너무 익숙해지면 싫증이 나는 법입니다. 그러면 분명 새로운 인내가 필요하죠. 인간을 지배하고 고문하는 것이 취미인 노부인도 좀 어처구니없게 들릴 수 있지만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노부인을 동퇴즈(조련사)로 생각해 본다면 호랑이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거예요. 자식들이 사춘기를 지날 때까지는 상당한 희열과 흥분을 느꼈을 겁니다. 레녹스와 네이딘의 결혼은 흥미진진한 모험이었겠지요. 하지만 갑자기 그 모든 게 시들해진 겁니다. 레녹스는 지나치게 울적함에 빠져 버린 나머지 상처를 주는 것도, 고통을 가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졌어요. 레이먼드와 캐럴은 반항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지네브라는 아! 포브르(불싸한) 지네브라, 그 아가씨는 노부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없는 사냥감이에요. 그 아가씨는 스스로 탈출구를 찾았으니까요! 현실에서 공상의 세계로 탈출한 거예요. 어머니가 못되게 굴면 굴수록 핍박받는 여주인공이 되는 은밀한 전율에 빠져든 겁니다! 보인턴 노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부 지긋지긋한 거예요.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처럼 새롭게 정복할 신세계가 필요했던 거요 해외 여행을 계획한 겁니다. 길들여 놓은 야수들이 반항할 위험은 있지만 새로운 고통을 줄 기회도 생기거든요.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새로운 긴장과 전율이 필요한 거였습니다."
"연기라고요?"
"예,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있어요. 지네브라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또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 근본적으로 지네브라는 어머니와 성격이 많이 닮았거든요."
"아니에요!"
새라가 발끈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일부 본성은 똑같아요. 두 사람 다 중심이 되고 싶어하는 강한 욕망을 타고 났어요. 두 사람 다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 가엾은 아가씨는 번번이 위협과 억눌림을 당했지요. 강렬한 야망과 인생에 대한 사랑, 발랄하고 로맨틱한 기질을 표출할 출구가 어디에도 없었던 거예요."
"끔찍했어요.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아래로 내려와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누군가를 불렀어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잡지책만 뒤적이며 기다리다가......."
그가 말을 멈추었다.
"믿지 못하겠지요? 그럴 거예요.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았냐고요? 네이딘에게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나도 모르겠어요."
제라르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건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보인턴 씨. 당신은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한 상태였어요. 순식간에 몰아친 두 번의 큰 충격 때문에 그런 심리 상태가 된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바이젠홀테르 반응이라고 하는데, 창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새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군요. 창문에 머리를 부딪친 새는 회복이 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다른 행동을 삼가게 됩니다. 신경중추에 적응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지요. 영어로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이런 겁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결단을 내려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심리적 마비 상태였으니까요."
"보인턴 노부인의 성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노부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더군요. 늙은 포악한 조련사다. 심리적 사디스트다. 사악함의 화신이다. 미쳤다........ 이것 중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내 생각에는 새라 킹이 예루살렘에서 순간적으로 떠올렸다는 '완전한 구제불능'이라는 말이 제일 근접할 것 같군요. 구제불능일 뿐 아니라 무익한 존재였지요!
자, 그렇다면 노부인의 심리 상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봅시다. 노부인은 거대한 야망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힘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승화시키지도, 그것을 다스릴 방법도 찾지 못했어요. 물론 그 여자는 그 욕망을 즐기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잘 들으세요, 결국에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유력한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광범위한 영역에서는 두려움과 미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어요! 고작해야 고립된 한 가족의 보잘 것 없는 폭군에 불과했지요! 제라르 박사의 말로는 보인턴 노부인도 다른 노부인들처럼 그런 자신의 취미에 싫증을 느껴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지배력을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희열을 느끼려했다는군요! 해외에 나가자 노부인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처음올 깨닫게 된 겁니다!"
"5분 뒤 웨스트홀름 부인이 미스 피어스를 다시 찾아가 방금 본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뒤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각인시킵니다. 그런 다음 산책을 나가면서 암벽선반 밑에 잠시 멈추고 서서는 노부인을 올려다보며 소시를 지릅니다. 노부인한테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을 거예요.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웨스트홀름 부인은 미스 피어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콧방귀를 끼다니 아주 무례하군요." 미스 피어스는 노부인이 실제로 그랬다고 여깁니다. 노부인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것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지요. 필요하다면 실제로 들엇다고 진지하게 맹세라도 할 거예요. 웨스트홀름 부인은 회의를 할 때 미스 피어스와 같은 유형의 여자들으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지배근성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