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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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을 볼리비아 해군에 비유한 말이었다.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으로만 이루어진 그 나라의 해군들은, 호수에서 훈련을 한다고 한다.

 

언젠가는 바다로 나갈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것이다.

 

 

작가가 흠모하는 도스토예프스키, 그 시대의 문학의 위상과 지금의 문학의 위상은 비교할 필요도 없으리라. 늘 바다를 흠모했지만, 이제 더 이상 문학의 바다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무렵, 그래도 작가는 언젠가 바다로 나갈 날을 꿈꾸며 뱃멀미를 하며 훈련을 계속할 것이라고.

 

작가의 말이 가슴에 박힌 이유는, 책을 읽어보면 알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이 작가가 품고 있는 꿈이 어느 정도인지,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 작은 것을 꼼꼼하게 쓰는 작품이 넘치는 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잊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를 저으려고 애쓰는.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황당해할지도 모른다. 이거 무슨 얘기야?

혹은 그저 창의력만 번뜩이는, 그런 판타지같은 그런 소설 아니야? 하고.

 

내가 한국 소설을 절대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무식한 사람, 아니 이 정도는 좀 가혹하니까, 아주 티끌만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티끌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면, 김성중은 내가 여태껏 읽어본 한국 소설과는 확실히 좀 다른 느낌이었다는 것, 그리고 김성중과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들과 비교해본다면 더더욱 반짝이는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기발하면서도 가슴을 후벼파는 구석이 있다. 물론, 원숙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다음 번에 이 작가가 쓰는 글들은 더 좋을 것이라는 기대가 든다. 정말, 마음에 드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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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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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몰랐던 작가의 아름다운 소설을 알게 되어 기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엉뚱한 생각. 이 책에 나오는 중국의 이 당시 현실은 지금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통일 이후, 이런 문학이 우리 나라에서도 쏟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살짝 들었다. 소설 분야에서 베스트 순위 내에 우리나라 소설이 한 권도 없는, 요즘의 현실이 답답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이 시지에의 자전적인 소설 같은데, 등장인물들의 뒷얘기가 궁금하다. 두 소년도, 소녀도,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훌륭한 소설의 여러 가지 기준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수십 년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만을 조심스레 잘라내어 보여주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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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양장)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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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소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때문이었다. 일단 소설 제목이 눈에 확 띄었고,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대성당>은 레이먼드 카버의 마지막 책이면서, 그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기도 하다. 생전에 대부분이 고통스러웠고, 죽기 마지막 몇 년만 반짝했던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의 소설들이 이렇게나 따뜻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밑바닥까지 절망해보았던 사람이기에 이렇게 타인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가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고통은, 마치 진주조개가 고통 끝에 진주를 품어내는 것처럼 작품만 놓고 보았을 때는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적으로 평탄한 삶을 살아온 작가가 과연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까? 문학에 대한 내 상식은 매우 좁고 얕아서 이런 생각이 편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평탄하게 살아온 소설가들에게는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감정의 최대치를 +10~-10이라고 본다면, 양극단을 경험해 본 작가에게는 -7에 대해서도, +8에 대해서도 물흐르듯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겪은 감정의 최대치가 +7~-6 정도라면, 그 사람은 -7에 대해서도, +8에 대해서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야기한다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거나, 필요 이상으로 냉정해지리라고 생각된다.

 

카버는 아마도 양극단을 전부 경험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물론, 어린 시절에 가난했거나, 일찍 부모를 잃었거나 하는 작가는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고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통을 카버는 겪었다. 알콜 중독으로 일생의 많은 순간동안 고통스러웠고, 결국 입원까지 하게 된다. 스스로 술을 끊지 못해 강제로 다른 사람의 손에 결정권을 맡긴 것인데, 이만큼 인간의 존엄성이, 스스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자기 스스로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지 않았을까. 그 시간을 견뎌내었기에, 카버의 글은 세상 모든 슬픈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저기요, 나도 그랬어요, 괜찮아요, 나도 지금 여기 이렇게 있어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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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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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인도계 미국인 작가의 9개 단편이 실려 있다. 모든 단편이 다 빼어나다고 생각되지만, 책 전체를 반복해서 다시 읽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작품,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은, 문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이 무작정 좋아할 수 밖에 없던 작품이다. 아니, 굳이 설명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인간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 순간, 연민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우아하면서도 침착한 문장들. 그러나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을 머리로 분석할 틈도 주지 않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이렇게까지 온전하게 좋아할 수 있는 소설도 흔치 않다. 무엇보다도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결말을 마무리짓는 부분은 울컥하게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작가의 부모의 이야기라고 추측된다. 줌파 라히리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가에게는 인도계라는 정체성이 소설 전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모든 등장 인물이 인도계 미국인이며, 타인과의 소통, 낯선 것과의 교류가 핵심 소재로 사용된다. 이런 것 때문에 소설을 처음 읽어나가면서는 신선했지만, 계속 읽으면서 또 지루해지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작가 개인의 역량도 물론 뛰어났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민을 온 가정에서 자랐다는, 독특한 성장 배경의 덕을 톡톡히 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마지막 소설을 보면서 왜 이 작가가 첫번째 책, 그것도 이례적으로 단편집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할 수 있었는지 알았다. 번역도 정말 훌륭하지만, 원서를 구입해서 읽을 계획이다. 작가가 쓴 원문의 그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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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는 완벽한 숙녀야!"

이번에는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웃었으므로 크로프트 부인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말라는 내 웃음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나는 크로프트 부인의 응접실에서 경험한 그 순간이 말라와 내 사이가 좁혀지기 시작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는 아직 온전히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후 몇 달 동안이 허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함께 시내를 돌아다녔으며 다른 벵골인들을 만났다. 그때 만난 벵골인 가운데 몇몇은 지금까지도 친구로 지내고 있다. 우리는 빌이라는 남자가 프로스펙트가에서 싱싱한 생선을 팔고,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카둘로라는 가게에서는 월꼐수 잎과 정향을 판다는 것을 알아냈다. 저녁에는 찰스 강까지 걸어가서 강물 위를 떠다니는 돛단배를 구경하거나 하버드 야드에서 아이스크림콘을 먹었다. 우리는 인스터매틱 카메라를 사서 우리의 생활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나는 말라가 그녀의 부모에게 사진을 보낼 수  있도록 그녀에게 프루덴셜 빌딩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하여 사진을 찍었다. 밤이면 우리는 키스를 했다. 처음에는 수줍어했으나 이내 대담해졌고, 서로의 품 안에서 쾌락과 위안을 발견했다. 나는 그녀에게 SS로마호에서의 항해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핀스베리 파크와 YMCA에 대해서도, 크로프트 부인과 벤치에 함께 앉아 있었던 저녁 시간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다. 나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저녁에 <보스턴 글로브>를 읽다가 우연히 크로프트 부인의 사망 기사를 발견했을 때 나를 위로해 준 사람은 말라였다. 나는 그전 몇 달 동안 부인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그 여름의 여섯 주는 나의 과거에 끼어든 오래전의 막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신문을 무릎에 내려놓은 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벽을 쳐다보았다. 말라가 뜨개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크로프트 부인의 죽음은 내가 미국에서 애도한 첫번째 죽음이었는데, 그녀의 삶은 내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존경했던 삶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다. 오래오래 혼자 살다가 영원히 떠난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보스턴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 말라와 나는 보스턴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에서 살고 있다. 크로프트 부인이 살던 곳과 비슷하게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동네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 마당이 있어서 여름이면 토마토 값을 아낄 수 있으며 손님방도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미국 시민이어서 때가 되면 사회보장 연금도 탈 수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캘커타를 방문하며 돌아오는 길에 끈으로 졸라매는 파자마와 다르질링 차를 챙겨오지만, 여기서 늙어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조그만 대학의 도서관에서 일한다. 우리에겐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한 명 있다. 이제 말라는 사리의 끝단을 머리에 두르지 않으며 밤에 부모님을 생각하며 우는 일도 없다. 대신 아들 생각에 눈물을 짓곤 한다. 우리는 아들을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가거나 집에 데려와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집에 오면 아들은 우리와 함께 손으로 밥을 먹고 벵골어로 말을 한다. 우리가 죽으면 아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며 때떄로 걱정을 한다.

차를 몰고 그곳에 갈 때면 나는 교통 상황이 어떻든 반드시 매사추세츠가를 지나서 간다. 이제는 그곳의 건물을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그러나 갈 때마다 나는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그해 여름의 여섯 주로 되돌아간다. 차의 속도를 줄이고는 크로프트 부인이 살던 거리를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한다. 내가 미국에서 처음 살았던 집이 있던 곳이라고. 그 집에서 백세 살 먹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기억나요?" 말라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 우리가 낯설고 서먹서먹한 사이였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에 서로 놀라곤 한다. 아들은 크로프트 부인의 나이가 아니라 내가 방세로 낸 돈이 그토록 적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놀라움을 표한다. 아들에게는 그게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인 것이다. 달에 깃발을 꽂았다는 게 1866년에 태어난 여자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들의 눈에서 나를 처음으로 드넓은 세상 속으로 내던졌던 야망을 본다. 몇 년 지나면 아들은 졸업을 하고 누구의 보호도 받지 않고 혼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갈 것이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아직 아버지가 살아 있고 행복하게 생활하는 강한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상기시키곤 한다. 아들이 좌절할 떄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제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으로 여겨질 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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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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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은 다 읽고 나면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싶은 법이다. 함께 책을 읽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든지, 아니면 나 혼자 곰곰히 생각을 정리해 글로 요약하든지, 인터넷을 검색하여 이 책을 다룬 다른 서평을 찾아보든지.

 

그러나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괜시리 먹먹해져서 말로 하는 순간 왠지 나의 이 감정들이 발화되어 날아갈 것만 같아서, 묵직한 그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 그저 조용히 이 상태로 잠들어 버리고 싶은 그런 소설도 있다.

 

명백히 이 소설은 후자다.

 

이 책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유명한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처음 들었을 때 애거서 크리스티를 잘못 발음한 것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 3부작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애거서의 추리소설보다 아고타의 소설이 훨신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유명한 철학자가 이 책을 높게 평가한다고 해서 나까지 덩달아 이 책이 좋을 이유는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으로서, 대중적인 추리 소설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그녀가 이 책의 작가에 비해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지젝 또한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훌륭하다. 비슷한 이름의 유명 작가, 이 책을 언급하는 유명 철학자의 예를 들어가며 이 책의 뛰어남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묵직한 제목, 총 560쪽에 달하는 두께를 보고 내가 과연 이 책을 지치지 않고 다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결과는 기우였다. 이런 책이 좋다. 묵직한 주제를 가장 쉽고 간결하게 풀어내는 소설. 절대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루지만, 언제나 그 출발과 끝은 개인에서 시작되고 개인으로 귀결되는 소설.

 

알고 보니 이 책은 각각 1986년, 1988년, 1991년에 나온 세 소설을 합본한 것이라고 한다. 애초에 작가는 '커다란 노트', '증거', '세 번째 거짓말'이라는 소설을 2~3년 씩 시차를 두고 발표하였다. 즉, 이 책의 1부인 '비밀 노트', 2부인 '타인의 증거', 3부인 '50년간의 고독'은 사실 따로 따로 발표된 독립된 소설로, 전부 연결되는 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따로 따로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소설이다. 물론 각각 읽는 것보다 한꺼번에 읽는 것이 훨씬 좋기 떄문에 합본해서 출판한 출판사의 결정은 현명해 보이며, 만약 애초에 작가가 처음부터 전체적인 이야기를 3부로 구성하여 이런식으로 썼더라면 그야말로 '천재적인 작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첫번째 소설을 썼을 때 자신은 후속작을 쓸 계획이 없었다고 했으니까.

 

일단 재미로만 따지면 1부>2부>3부 순서이다. 1부는 굉장히 독창적이며, 다소 충격적이다. 한 장은 최대 2~3쪽 정도로, 재미있는 것은 필요없는 묘사는 극히 제한했는데도 책 속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2부와 3부도 충분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을 다룬 다른 소설들에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어쩌면 작가 자신에게는 다행이었을 것이다. 1부 덕분에 2부, 3부가 나올 수 있었으니까. 비록 재미는 떨어질지라도 이 소설은 2부, 3부까지 나와야 완전해지는 것 같다. 1부의 독창성과 재미도 2, 3 부가 있어서 돋보인다고 생각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파이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과 허구의 모호함, 그리고 생존하려면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현실을 위해 허구를 만들어냈다는 것, 과연 실재의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1부에서는 일란성 쌍둥이 형제가 나온다. 늘 '우리'로 등장하는 그들은 1부 전체에서 단 한번도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 때문에 도시의 부모를 떠나 시골의 할머니에게 맡겨진 그들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아이다운 잔인함과 위악함으로 위장한 생존 본능으로 살아간다. 늘 함꼐였기에, 그래서 늘 '우리'로 등장했던 그들은 1부의 마지막에서 한 명은 국경을 넘고, 한 명은 죽은 할머니의 집에 남으면서 처음으로 분리되어 존재하게 된다.

 

2부에서는 할머니의 집에 남아 있는 아이의 이야기이다. 이제 아이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쌍둥이의 한 쪽인 '루카스'를 비롯해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부 이름을 부여받는다. 1부에서 모든 인물이 이름 없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소 우화적인, 마치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잠자기 전 아이들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전래 동화 같았던 느낌이 들었던 반면에, 2부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이름을 부여받으며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아버지의 아이를 낳고 방황하는 야스민, 남편의 억울한 죽음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사서 클라라, 책을 쓰겠다는 꿈을 가진 채 알콜 중독에 시달리는 서점 주인 빅토르, 출생의 비밀을 모르는 영리하지만 불구인 소년 마티아스, 미남이고 지적이지만 동성연애자인 공산당 간부 페테르. 이 중 한 명을 주인공으로 삼아도 얼마든지 책 한 권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의 상황은 구체적이며, 또한 평범하지 않다. '루카스' 또한 마찬가지. 마치 실존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던 '우리' 중 하나인 그는, 1부에서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던 그 아이는 2부에서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실재적인 어른으로 변모한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나치 협력국으로서 패전 상태를 맞았고, 종전 후 소련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가 만들어졌으며, 이후 수많은 시위와 운동을 거쳐 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서기까지 혼란한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마지막에 국경을 넘어서 다른 체제에서 살고 있던 쌍둥이의 한 쪽인 클라우스가 등장한다. 

 

3부에서는 50년이 흐른 후, 헝가리에 입국한 클라우스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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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부랑배! 조무래기! 똥고집! 불결한 놈! 돼지새끼! 깡패! 썩어문드러질 놈! 고얀 놈! 악독한 놈! 살인귀의 종자!"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귀가 윙윙거리고, 눈이 따갑고, 무릎이 후들거린다.

우리는 더 이상 얼굴을 붉히거나, 떨고 싶지 않았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런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고 싶엇다.

우리는 부엌 식탁 앞에 마주 앉아서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 말들을 되는 대로 지껄여댔다. 점점 심한 말을.

하나가 말했다.

"더러운 놈! 똥구멍 같은 놈!"

다른 하나가 말한다.

"얼간이! 추잡한 놈!"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게 될 때까지 계속했다.

우리는 매일 30분씩 이런 식으로 연습을 하고 나서, 거리로 바람을 쐬러 나간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하도록 행동하고는, 우리가 정말 끄떡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옛날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난 너희를 사랑해...... 난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난 너희만 사랑할 거야...... 영원히...... 너희는 내 인생의 전부야......."

반복하다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 말들이 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외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나는 서점에 나가 카운터 앞에 앉았지. 손님은 한 사람도 없고, 아직 여름이었거든, 학교는 방학 중이고. 그러니 책이고 뭐고 필요한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엇지. 거기 앉아서, 책꽂이의 책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누나가 말했던 내 책이 떠올랐어. 내가 젊은 시절에 구상했던 내 책 말이야. 나는 작가가 되어서 책을 쓰고 싶었거든. 그건 내 젊은 시절의 꿈이었어. 누나와 나는 종종 그 꿈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누나는 나를 믿었고, 나도 나 자신을 믿었는데, 결국 나는 책을 쓰겠다던 꿈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어.
나는 이제 쉰 살밖에 안 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책 한 권쯤은 쓸 수 있을 거야. 몇 권 더 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이곳에 남아 있으면, 나는 영영 책을 못 쓸 걸세. 나의 유일한 희망은 집과 서점을 팔고 누나 집으로 돌아가는 거라네. 누나는 내가 담배나 술을 못 하게 말릴 것이고, 우리는 건전한 생활을 할 것이고, 누나는 일을 열심히 하겠지. 나는 일단 알코올 중독과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면 내 책을 쓰는 일밖에 할 일도 없을 테고. 자네도 책을 한 권 쓰게. 누구에 대해서인지,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글을 쓰게. 어린 시절부터 자네는 종이와 연필과 노트들을 열심히 사갔지."

 

"자네는 내가 우리 집 우리 방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낀 행복을 이해 못 할 걸세. 그리고 주디트를 도와주는 일도 물론 행복이지. 그녀도 고생을 많이 한 여자야. 남편은 전쟁 통에 실종되고, 그녀 자신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지옥의 문턱에까지 갔었제. 이건 비유법을 쓴 게 아니야. 실제로 수용소 건물 문 뒤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네. 인간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인간이 피워놓은 불이었다네."

루카스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저도 알아요. 저도 그와 비슷한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요, 바로 이 도시에서."

"자네는 아직 어렸을 텐데."

"저는 물론 아이였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인생의 기적이었어. 그녀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게 가볍고, 쉽고, 아름다웠지. 처음에는 내가 그녀 때문에 이곳에 오곤 했는데, 이제는 주디트, 살아 있는 여인 때문에 이곳에 오네. 자네가 보기엔 우습겠지, 루카스, 하지만 난 주디트를 사랑해. 자기 자식도 아니면서 아이들에게 쏟는 그녀의 사랑, 은혜, 힘을 사랑하네."

루카스가 말했다.

"하나도 우습지 않아요."

"내 나이를 생각해도 말인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본질만이 중요해요.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많은 여자들이 실종되거나 죽은 남편을 기다리며 울고 있어요. 하지만 노인께서 방금 말했듯이,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있지요.'"

불면증 환자는 눈을 뜨고 루카스를 바라본다.

"희미해지고, 줄어들고,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네."

 

"나는 여기에 아이를 혼자 놔두고 갈 수 없어요. 더구나 밤에. 걔는 밤을 무서워해요. 아직 너무 어리거든요."

"아니야, 지금은, 이제 무섭지 않을 거야. 가세, 루카스."

루카스는 일어나면서도 무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애를 자기 엄마와 함께 떠나도록 내버려뒀어야 했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은 욕심에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어요."

페테르가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그런 큰 실수를 할 수 있어. 우리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긴 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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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작가는 1936년에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 헝가리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전쟁에 동원되었고, 작가의 오빠와 남동생은 자유롭게 쏘다녔는데 그 시절의 상당 수 일화가 그대로 쓰이기도 하고, 작가가 유난히 좋아했던 오빠는 쌍둥이 형제의 모티브가 되었다. 전쟁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어른들은 힘들었겠지만,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고 어렸기에 그 시절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성장하고 난 이후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열네 살 때 기숙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좋아했던 오빠와 떨어져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열여덟 살에 자신의 역사 선생과 결혼했고, 스무 살에 아이를 낳았다. 1956년 소련이 헝가리로 들어오자, 반체제 운동을 하던 남편과 함께 갓난아기를 데리고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했다. 친구도 친척도 없는 곳에서 난민으로서 철저한 외로움과 궁핍한 생활을 겪어야 했으며,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헝가리어로 시를 썼다고 한다. 이혼 후 대학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웠고, 재혼도 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2011년에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작가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이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적인 요소가 많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았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잔혹하고 쓸쓸한 쌍둥이의 생애, 그리고 그만큼 혹독한 시절을 겪었을 작가의 생애. 개인적인 불행은 작가에게는 엄청난 자산이지만, 과연 나에게 그런 삶이 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자신이 없다는 쪽에 좀 더 가까웠다.

 

전쟁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인간의 본성이 처절하게 드러난다.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는 것 자체가 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살기 위해 상상 이상으로 잔인해지기도 하며, 의외의 상황에서 전혀 상관없는 남을 돕기도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선악의 문제는 단순하게 구분되거나 판단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며, 전쟁이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또 삶이란 어디까지 가혹해질 수 있는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한편으로 고요히 가라앉는 것 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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