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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콜럼 토빈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영화 브루클린 때문이었다.
애매하게 비어 있는 시간. 날은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 같은데 비는 오지 않고,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었다. 나는 며칠째 지쳐 있어서 돌아다니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기분만큼은 한없이 부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춥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럴 때는 영화관이 딱이다. 진한 커피 한 잔 들고 들어가 두 시간 동안 캄캄한 곳에서 환한 스크린만 마주하는 느낌. 그 느낌이 그리웠다.
급하게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했다. 보고 싶은 영화, 지친 내가 갈 수 있을 거리의 영화관, 그리고 이동 거리까지 고려했을 때,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관을 다행히 찾아내었다. 그리고 늦지 않게 도착했다.
아일랜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습하고 추운 기후, 반항, 저항, 잡초, 쓸쓸함, 변방 등.
실제로 가보지 못했지만, 그러기에 마음껏 내 머리속으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었다.
영화 보는 내내 행복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내 머리는 이미지가 꽉 점령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브루클린을 쳐보니, 원작, 소설 등등이 관련 검색어로 뜬다. 바로 구매했다. 이 이미지를 그대로 내 머릿속에 좀 더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책을 읽으면서 매번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게.
여주인공 시얼샤 로넌은 실제로 아일랜드 출신이다. 시얼샤란 이름도 아일랜드 어로 자유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일랜드 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천재적인 배우가 수많은 상을 휩쓴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아일랜드 이주민 연기를 하는 모습은 반짝반짝 빛난다.
똑똑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1950년대의 아일랜드는 지금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향수병에 시달리는 모습에 공감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늘 반복되는 일상에 치이고, 처음에는 재미있게 느껴졌던 일들도 어느새 일상이 되어가면서 버겁고 벗어던지고 싶어지다가, 반짝하고 날아든 우연과도 같은 인연에 활기가 돌고, 다시 그 인연조차 고민의 대상이 되어가는 과정. 어쩌면 이렇게도 지금의 나의 상황과 비슷할까. 실제 완성도도 높은 영화이고 평단과 관객 양쪽에서 인정 받고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나는 그 이상으로 이 영화를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여주인공에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내 상황 떄문이겠지. 수십 년 전, 다른 민족,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공감이 갈 줄이야.
"에일리스는 이탈리아계 배관공 청년 토니(에머리 코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가까스로 생활이 안정될 무렵 가족에게 닥친 사건으로-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가 그랬듯-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제2의 구애자 짐(돔놀 글리슨)을 만난다. 동향 청년 짐은 흠잡을 데 없지만, 토니는 특별하다. 이탈리아 남자에 대한 선입견을 핸디캡으로 짊어진 이 남성은 에일리스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매너로 점점 나를 안심시켰고, 안도는 감동으로 비약했다. 급기야 에일리스가 짐과 토니 사이에서 흔들리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실로 오랜만에 한쪽을 편들며 영화 속 삼각관계를 주시했다. 외양부터 환경까지 에일리스와 소위 ‘그림’이 되는 쪽은 짐이다. 토니는 라틴계의 판이한 외모에, 에일리스보다 키가 작으며, 현재 가진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토니에겐 연인으로서 반려자로서 황금 같은 미덕이 있다. 이 남자는 결코 사랑을 빙자해 에일리스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야간대학이 끝나길 기다려 에일리스를 만난 토니가 “집에 가서 공부하고 자야 하는 거 잘 알아요. 그냥 집까지 같이 가기만 해요”라고 청하는 장면에서 많은 여성 관객이 감격했으리라. 토니는 에일리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노력하고 그녀의 공부와 일에 관한 수다를 진심으로 재미있게 듣는다. 토니는 에일리스한테 뭐가 유익한지 더 잘 안다는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 또한 한점의 열등감도 없이 육체노동의 보람을 즐기고 인생을 배우자와 공조해 완성하려고 한다. 원작 소설은 이 남자에게 거슬리는 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에일리스가 느끼는 두려움(‘사실일 리가 없어!’)을 묘사하는데 나도 백배 공감하고 말았다. 토니는 에일리스를 변화시켰고 짐은 토니가 변화시킨 에일리스에게 반한 셈이다. 짐에게 잠시 흔들린 에일리스에게 나는 거의 화가 났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시얼샤 로넌의 연기 덕이다. 악의적인 고발로 말미암아, 마침내 가야할 곳을 깨달은 에일리스의 눈은 분노로 파랗게 빛난다. 그리고 그 분노는 무엇보다 본인의 오판을 향한다."
시네 21 김혜리 기자가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대해서 쓴 글 중 일부이다. 영화 속 에일리스에도, 그 에일리스에 공감한 김혜리 기자의 글에도 미친듯이 공감이 간다. 토니를 보면서, 토니와 비슷한 내 옆의 인연을 떠올렸고, 결말에 안도했고, 다시 한 번 감사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이 모든 느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리고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의 결말처럼, 나 또한 지금을 떠올리며 훗날 웃을 때가 오리라. 에일리스에게 2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니, 나도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소설과 영화의 마지막처럼 환하게 웃을 날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