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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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려 있는 단편들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레 내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삽질'이었다.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데, 알고 보니 파야 할 땅은 그 땅이 아니었다거나, 애초에 땅을 팔 필요조차도 없었다거나, 혹은 아무리 파려고 노력해도 삽만 허공에서 버둥댈 뿐 아무 성과도 없거나.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악독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평범하다기보다는 조금 더 착하고 순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면서 의도치 않게 실수하고, 몰랐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며,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라 한 때 분명히 그랬던 적이 있었고, 요즘엔 아주 조심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또 아니라, 읽다 보면 특정할 수 없는 모두에게, 혹은 내 옆의 누군가에게 연민을 품게 되는, 그런 소설들.

 

 

행정동
 -만지긴 누가 뭘 만졌다고 그래!

-아까 분명......

오재우는 말끝을 흐렸다.

-밀친 거야, 밀친 거라구! 아까 다 봤다며!

-그러니까 그때 분명......

오재우는 그때 잠깐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웠다.

-너, 내가 그렇게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계속 이러는 거야? 응?

-아니, 난 아까 정말 다 봐서......

-남자 새끼가 치사하게 같은 조 사람 흠이나 잡으려고 들고......

여자는 그렇게 말한 후,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오재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무언가 갑자기 그의 몸에서 쑤욱, 빠져나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재우는 다시 뛰다시피 여자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여자의 어깨를 잡앗다.

-이 개새끼야!

여자가 메고 있던 가방으로 오재우를 내리쳤다.

-싫다잖아! 내가 싫다고! 내가 아니라잖아, 이 개새끼야!

여자는 제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뺵, 소리를 질렀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어쨌든 그 사건 조사하면서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구속할 수 있었지. 모양새가 좋잖아. 불순좌경세력들이 폭력까지 휘둘렀으니까, 우리가 예상한 그림보다 훨씬 좋은 그림이 나온 거야. 문제는...... 네 삼촌이었는데, 분명 모임엔 이름이 올라가 있으니까 기소를 하는 게 마땅한데, 그러기엔 내가 좀 미안한 거야. 그래서 내가 우리 반장한테 사실 저 친군 빨대가 맞다고, 내가 활동비로 따로 포섭한 친구라고 말해 거지. 그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던 게, 그 프라이드를 살 떄 내가 네 고모 명의로 넣어둔 돈 중에서 30만원이 빠져나갔거든. 물론 네 고모는 그떄 잠깐 빌려 쓴다고 생각했겠지만 말이야......

-삼촌도, 삼촌도 그걸 알게 되었나요?

나는 술잔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그럼, 잘 알지. 네 삼촌 조사 끝나고 나갈 떄 내가 다 말해줬으니까. 그떄 30만원이면 꽤 큰 돈이었거든.

나는 그제야 프라이드가 후진되지 않는 이유를, 그 수수께끼를 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것은 그 30만원과 관계된 일일지도 몰랐다.

-거기에 삼촌이 좋아했던 여자도 한 명 있었다던데...... 혹시, 모르세요?

-모르긴, 잘 알지. 주동급이어서 내가 직접 조서 꾸몄는 걸...... 걘, 그때 형기 받고 그다음 해에 바로 청주로 갔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김 박사님, 김 박사님...... 김 박사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잘 들었어요. 하지만 김 박사님...... 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네 이야기 말이야! 나에겐 지금 그게 필요하단 말이야, 김 박사, 이 개새끼야.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당혹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하지만 그는 또 한편, 이 아이가 기증자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가 얼핏 생각한 기증자의 아이는,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채 열 살도 되지 않는 꼬마아이였다. 삼십대 후반이라는 기증자의 나이 떄문에 자동적으로 그런 그림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능성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앞에 앉아 있는 이 아이는, 어쩌면 누군가의 문병을 온 학생일 수도 있고, 장염이나 빈혈 떄문에 입원한 환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환자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르고, 혹 상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가능성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 아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탄원의 문장
나는 조금 당황했다. 당황했지만 또 한편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그녀앞 소파로 다가갔다.

-아니, 나는 어쨌든 P에 대해선 최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교수님도 P에 대해선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그 개자식 말만 들으셨으니까.

여학생이 갑자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해 나는 어, 한 상태에서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 개자식이 종종 언니한테 손찌검한다는 것도 말하던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입증 불가능한 것들은, 어쩌면 입증 가능한 사실들로부터 나오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것은 '발견'의 영역이지, '발명'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사실들과 사실들 틈 사이에서 불가능한 것들은 시작되고 피어난다는 것, 그래서 숙명적으로 사실들의 세계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최의 탄원서는 시작되었다.

 

 

이정(而丁)-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
"언젠가 수환 학생이 이정 선생의 이름을 처음 말하면서 그게 '고무래가 되겠다'라는 뜻 아니냐고 물어왔던 적이 있고. 나는 그때 그런 뜻도 있지만 그건 그냥 글자 모양 그대로 보는 게 맞을 거라고 말해주었소. 그러니까 쇠스랑(而)과 망치(丁)가 맞을 거라고...... 우린 해석하기보단, 보이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화라지송침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지금 참아내고 있는 그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게 못한 사람들, 죄의식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거절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망상을 참아내는 사람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기도 한다. 누가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참아내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한계를 말해주는, 숨겨진, 또 하나의 눈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나 아내나, 우린 둘 다 기종 씨를 참아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나의 그것과 아내의 그것이 다를 수 있고, 나의 짐작과 아내의 진실이 같을 순 없을지라도 기종 시를 외면했다는 점에서 아내나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 나느 가끔 내가 그를 참아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그랬다면, 아내는 나 또한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결코 아내를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나 역시도 아내의 입장이었다면, 그건 또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내나 나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는 선에서,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그게 조금 쓸쓸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게 또 우리였으니까.

 

내가 양돈축사를 떠나기 직전, 꽁지머리 남자에게서 들은 일화는 이런 것이었다. 기종 씨의 아버지가 양돈축사에어 가까운 폐비닐하우스에서 목을 맸다는 것, 의자를 밟고 올라가 목을 맸다는 것, 그 아래에서 기종 씨가 꼬박 사흘을 지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남자는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장님이 그 청년 아버지가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그다음부터 계속 머슴처럼 부렸다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나는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속옷은 속에 입는 옷이 맞잖아? 그치, 형? 그래야 속옷이 되는 거잖아, 응?

나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이며, 계속 형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화도 통 없던 형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나는 오래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이산 가족처럼 오래오래, 두서없이 말을 했다.

한데, 깊이 잠들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형이 갑자기, 툭, 한 마디 던졌다.

-미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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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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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의 감독 데뷔작,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배우 콜린 퍼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역시 영국 출신의 니콜라스 홀트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의 평은 콜린 퍼스가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였다는 것. 평론가가 아닌 그저 관객에 불과한 내 눈에도 콜린 퍼스의 연기는 훌륭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매튜 구드의 연기도 훌륭했다는 점. 그리고 어바웃 어 보이에서 그저 똘망똘망하고 귀여웠던 소년 니콜라스 홀트의 성인 모습이 반가웠고, 엑스맨 시리즈에서는 알지 못했던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는 것. 그리고 톰 포드는 의외로 이 작품을 잘 연출해냈다는 점.

 

그래서 원작 소설이 더더욱 기대가 되었다. 사실 원작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늘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뗄레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 더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동성연애자이며, 작가 또한 동성연애자로 주인공을 작가 자신과 같은 해에 출생한 것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출신의 감독 또한 동성연애자이고, 그 때문에 이 작품에 강하게 끌렸다고 한다.

 

이 작품은 영화를 먼저 보고, 다음에 책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잘 이 작품을 즐기게 된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기 떄문에 소설만 읽어서는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조롭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영화는 시각적으로 훨씬 풍성하기 떄문에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텀을 길게 두지 말고 보면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면서 소설 속 이야기들을 더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한 차별은 오죽했을까, 또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도 마음껏 내색하지 못하는 슬픔은 어느 정도였을까. 단 하루 동안 이 남자의 삶을 통해서 이 사람의 인생 전체를, 아니 그 일부만이라도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책을 읽기 전에 들었던 이 의문은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프랙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프랙탈.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와 닮은 도형을 뜻하는 말로, 우리 주변에서는 눈송이나 나무 껍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 하루 동안 이 남자의 의식을 찬찬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이 남자의 상실을, 절망을,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에게 연민을, 공감을, 위로를 보내고 싶어졌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하루만으로 부족하다면 평생이 주어져도 모자란 것 아닌가.

 

 그리고 이제 조지 주위에는 온통 남녀들이다. 매일 고속도로라는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이 공장에 공급되는 재료인 남녀들. 가공되어서 포장되고 시장에 놓일 남녀들이 조지를 향애 다가오고 온갖 방향에서 조지의 앞길을 지나간다. 흑인, 멕시코인, 유대인, 일본인, 중국인, 라틴아메리카인, 슬라브인, 노르딕인, 금발에 비해서 검은 머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학생들은 강의 시간표에 맞춰 종종걸음을 치거나, 이성을 꼬드기며 느릿느릿 걷거나, 열띤 토론을 하면서 한가롭게 걷거나, 혼자서 입을 다물고 걷는다. 걸음은 달라도 모두가 지친 표정으로 책을 들고 있다.

 학생들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을까? 공식적인 대답은 물론 있다.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래서 직업과 안정을 얻고, 아이들을 키워서 그 아이들이 앞날을 준비하게 하고, 그래서 아이들이 직업과 안정을 얻게 한다. 그러나 직업 선택에 대한 갖가지 조언들, 가령, 대학교 팸플릿에서 확실한 기술을 배우는 약학과 같은 학과들이나 취업 기회가 많은 여러 전자 계통 학과들을 수입이 좋은 학과로 꼬집어 말하는 것 같은 조언들에도 불구하고, 정말 놀랍게도 아직 시나 소설이나 희곡을 쓰겠다는 학생이 꽤 많다! 이들은 수면 부족으로 멍한 채, 수업과 파트타임 일과 결혼 생활 사이사이 짧은 빈 시간에 글을 휘갈긴다. 수술실에서 걸레질을 하거나,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거나, 아기의 입에 젖병을 물리거나, 햄버거를 굽는 동안, 이들의 머릿속은 단어들로 어지럽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예속된 상태 한가운데 어디에서, 광기는 속삭인다. 경험을 쌓으라고. 무엇을? '경이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밤으로의 긴 여로에 오르고, 지혜의 일곱 기둥을 지나고, 공허의 선명한 빛을 찾고....... 이런 학생들 중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 물론이다. 최소한 한 명. 많아야 두세 명. 이 수천 명 중에서.

 이제 그 학생들 속에서 조지는 현기증 같은 것을 느낀다. 아, 세상에. 이 학생들이 모두 어떻게 될까? 무슨 기회가 있을까? 지금 당장 가망이 없다고 소리쳐서 쫓아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조지는 그럴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어이없고 부적절하게,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조지 자신이 학생들에게 희망의 상징이기 떄문이다. 희망은 잘못이 아니다. 정말이다. 조지는 다만 거리에서 진짜 다이아몬드를 5달러에 파는 사람과 같을 뿐이다. 바삐 지나가는 대다수는 감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을 테니,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대체 이게 몇 년 전 이야기이지? 어떻게 수십 년 전, 저 멀리 떨어진 나라의 이야기가 현재 한국의 상황과 이렇게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나라가 일본보다는 10년이 늦고 미국보다는 20년이 늦는다는 이야기를 내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이야기가 돌았던 시절은 우리 나라가 경제 규모로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저 숫자는 기술이나 경제 지표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현재 기준으로는 상황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적 분위기나 의식 수준은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저 숫자가 실제로는 더 클 수도 있고. 이것 뿐 아니다. 대학 교수라는 주인공의 직업 특성상, 당시의 대학 모습과 학생들에 대한 묘사가 상당수 등장하는데 놀랄 정도로 지금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똑같은 대학생이라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이가 도드라지는데, 이 부분은 읽으면서 재미있었다. 내가 아직 대학생이었던 시절의 생각이 나기도 하고.

 

짙은 색의 단정한 옷, 흰 셔츠와 넥타이(강의실 안의 유일한 넥타이)는 젊은 남학생들의 공격적으로 남성적인 캐주얼웨어와 확연히 구별된다. 남학생들 대부분은 운동화와 흰 울 양말, 추울 때는 청바지, 더울 떄는 반바지(허벅지를 가리는 버뮤다팬트로, 더 짧은 반바지는 강의실에 어울리지 않는다) 차림이다. (중략) 공부하는 학생에서 한순간에도 공사장 인부나 싸움하는 갱으로 변할 것 같은 모습이다. 남학생은 여학생에 비하면 지저분한 어린아이로 보인다. 여학생들은 모두 십대 시절의 칠푼바지나 헐렁한 셔츠, 위로 부풀린 헤어스타일에서 벗어났기 떄문이다. 여학생들은 벌써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풍기며, 아주 고상한 파티에 참석하는 차림새로 강의에 들어온다.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내용이 약간씩 바뀐 게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아마도 결말 부분일 것이겠지만, 그것 이외에도 중간 중간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20대 시절 이 소설을 접하고 수십 년간 그 감동을 잊지 않았으며,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감독의 말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 작품 속 조지를, 감독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 같다. 그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소설 속 조지의 몇몇 대사들이 영화에서는 바뀌었는데, 그 기준은 감독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다.

 

"아니, 환각이라고 말할 만한 효과는 없어. 처음에는 멀미가 나더군. 심하지는 않았어. 그래도 좀 무섭긴 했어. 지킬 박사가 처음으로 약을 먹었을 때도 무서웠겠지. 그런 느낌이었어. 그러다가 색이 아주 밝게 두드러져 보였어. '사람들이 왜 저 색을 못 알아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식당 테이블에 어떤 여자 지갑이 놓여 잇었는데, 그 빨간색이 지금도 눈에 선해. 신문에 난 스캔들 기사처럼 생생했어. 사람들 얼굴은 캐리커처로 보였어.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사람 성격이 확 드러나 보이고, 아주 단순해지고 선명해졌어. 몹시 잘난 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자기 몸이 아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싸움만 바라는 사람도 잇어. 무엇에도 화내거나 공격적이지 않기 떄문에 그저 아름답기만 한 사람도 몇 명 보여. 이런 사람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아, 모든 것이 점점 삼차원이 돼. 커튼이 아주 무거워 보이지. 조각품처럼 보이기도 해. 나뭇결은 꺼끌꺼끌해보이고, 꽃과 식물도 아주 생생해져. 보랏빛 화분 하나는 지금도 눈에 선해. 움직이지는 않지만, 분명 움직일 듯 보여. 움직이지 않고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같아. ......그러다가 사물이 완전히 본모습을 드러내지. 방의 벽들과 주위 모든 것이 숨을 쉬고, 나뭇결이 액체처럼 흐르기 시작하지. ......그러다가 그런 모습은 서서히 다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가. 숙취는 없어. 약효가 사라진 뒤에는 괜찮아."

 

젊은 시절, 잠깐 약물을 복용하고 난 후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조지의 대사이다. 실제로 약물을 복용한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이렇게 길게 구체적으로 쓰여진 글은 나는 처음 봤기에 흥미로웠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내용이 조금 바뀌었는데, 조지는 자신의 눈썹이 보기 싫어서 밀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제자인 케니에게 너는 그렇지 말라고 한다. 바로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이었다고. 감독이 얼마나 이 소설에, 소설 속 조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침울하고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슬프다. 왜 자기 삶을 이렇게 살고 있을까? 물론 보수가 적다. 물론 경제적인 측면세어 큰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물론 회사 중역들과 섞이는 축복을 즐길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인생의 4분의 1밖에 살지 않은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이 위안이 되지 않나? 쓸모없는 소비재를 파는 데 도움을 주는 것보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나? 자신이 이 나라의 직업 중 절망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직업을 가진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나?

 확실히 이 우울한 교수들은 모르고 있다. 알려고 노력하면 좋을 텐데. 그러나 이 사람들은 스스로 이 직업을 택했고, 이 직업으로 살아야 한다.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을 등치는 법을 배웠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중년, 장사치, 야바위꾼 같은 다수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도 얻은 것은, 인정 못 받고 메마르고 어려운 지식 뿐이다. 그렇다. 대중은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중은 지식없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제품과 실용적인 응용만 바란다. 대중은 말한다. 이 교수들은 한심하다고. 어떤 지식으로 돈을 벌 수 없다면, 그 지식을 왜 알아야 하나? 우울한 교수들은 그런 대중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하며, 자신이 약고 탐욕스럽지 못한 것을 남몰래 부끄러워한다.

 

아, 어쩌면 이렇게 요즘 현실과 다를게 없을까. 인류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한다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조지는 지금 이 취기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아주 조야하게 말하면, 플라톤의 『대화』같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 그렇다. 그렇지만 『대화』같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포장한 말은 아니다. 짐짓 겸손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서로를 헐뜯는 대결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지루한 주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도 아니다. 무엇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고, 얼마든지 주제를 바꿀 수 있다.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특별한 관계에 함꼐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지의 생각으로는, 여자와는 결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여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남자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대화 상대 사이에는, 가령 흑인과 백인의 대화 같은, 양극성이 있어야 한다. 대화 상대인 두 사람 사이에는 상반되는 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조지와 케니의 경우처럼, 연륜과 젊음 같은. 왜 상징적인 인물이 되어야 하나? 대화는 그 속성상 개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는 상징적인 만나밍다. 대화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편이 갈라지면 안 된다. 그러므로 대화에서는 무엇이라도 말할 수 있다. 굳은 자기주장이나 무시무시한 비밀이라도, 상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나 단순한 은유를 통해서 객관적인 말이 된다.

 조지는 이 모두를 케니에게 설명하고 싶다. 그러나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며, 자칫 케니가 이해 못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무엇보다 조지는 케니가 이해하기를 바라며, 케니가 이 대화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고 믿고 싶다.

 

이것 또한 일종의 상징인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고대 그리스 시절 동성애가 활발했으며, 그것은 사랑보다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존경이나 찬사와 같은 행위이고 상대의 지식을 내 것으로 전수받고 싶다는 뜻에서 출발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소설 속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이며, 여기까지 소설이 오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성적 기류가 흐르는 것이 분명하다. 소설 속에서는 조지, 또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이성애에 대한 혐오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종종 등장하는데, 그것마저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이 둘은 대화를 하고 있고, 그러면서 조지가 떠올리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최고 학자였던 플라톤의 『대화』. 그리고 이것의 진정한 의미를 상대가 알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것을 직접 설명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 애인의 갑작스런 죽음 후 스스로 싱글맨이기를 자처하던 그가 조심스레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닥치는 종말. 어쩌면 우리 모두는 죽을 떄까지 싱글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상대와의 진정한 소통을 갈망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하는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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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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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특이하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건지는 지명 이름이다. 영국 땅이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던 땅이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이곳에 진입하고, 패망하여 물러날 때까지 몇 년 동안, 이 섬 사람들은 독일군의 횡포에 시달리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강도는 점점 심해진다.

독일군의 여러 가지 강제적인 규정 가운데 한 가지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독일군이 고기를 독점하기 위한 것으로, 어느 날 눈을 피해서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돼지고기를 먹다가 독일군에게 들키게 된다. 자칫하면 처벌 받을 수 있는 상황,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은 북클럽, 이른바 독서 모임 중이었다고 이야기하며,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몇 번의 모임을 가지게 된다. 처음에 이렇게 시작했던 그들만의 책읽기는 단순히 독일군에게 보여주기위한 형식적인 모임에서 벗어나, 당시 견디기 힘들었던 삶을 지탱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위로하는 행사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감자껍질파이란? 물자가 부족해 먹을 게 워낙 없던 그 시절, 모임 때마다 감자껍질로 파이를 만들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체 감자로 만든 파이도 아닌, 감자 껍질로 만든 파이란 어떤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고 먹어보고 싶지도 않다. 얼마나 그 시절의 삶이 고단했을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이다.

 

다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영국에서 유일하게 점령했던 건지 아일랜드에 대한 출판사의 설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6월 15일, 영국 정부가 영국해협에 위치한 영국 왕실 자치령인 채널제도가 전략상 요충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군사적 방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건지 섬 정부는 우선 학령기 아동을 모두 대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얼마 후, 독일군 정찰기는 건지 섬의 수도인 세인트피터포트에 정박한 호송선을 군대수송선으로 오인한 나머지 (사실 호송선은 영국 본토로 향하는 배에 토마토를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었다) 폭격을 가해 30~40명가량의 섬 주민이 사망한다.
그리고 1940년 6월 30일 독일군은 건지 섬에 상륙한다(그 후 며칠 만에 다른 채널제도 섬들도 점령된다). 이후 섬 전체가 영국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로 활용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당한 유일한 영국 영토로 점령은 1945년 5월 9일까지 이어진다.

 

 

전쟁이 끝나고 1년 후,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작가 줄리엣은 자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는 책을 가지고 있는 건지 섬의 한 주민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고, 곧이어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도 편지 교환이 시작되면서 건지 섬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알려지게 된다.

 

이 책은 작가의 유작이자,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평생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하며, 지역 신문의 편집을 한 적도 있었던 작가는, 아마도 책을 사랑했고 수많은 작가들을 흠모했을 것이다. 1976년에 이 섬을 방문했던 작가는, 수십년간의 조사 과정을 끝낸 후 2000년경에야 집필을 시작했으며, 2008년, 책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작가의 유일한 작품, 수십년간의 집필 과정, 죽고 나서야 출간된 책, 그리고 출간 직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 소설 밖의 이야기도 한 편의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물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뜬 작가와, 종전되기 바로 직전에 사망한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삶이 겹쳐지고, 평생 출판할 가치가 있는 책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과, 책을 사랑한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마음이 합쳐지면서 오는 감동은 먹먹하다.

 

문학이란, 삶을 버티게 해 주고,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게 해 주는 것. 알고 있는 사실이다. 충분히 머리로 알고 있는데, 이 것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확인해 가는 과정은 가슴이 시릴 정도이다. 엄연히 허구인데, 소설 속 이야기들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의 생생한 묘사? 탄탄한 구성?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글쎄, 이런 식의 분석이 다 무슨 필요가 있나 싶다. 그 어떤 평론가들의 분석보다도 전쟁 당시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감상이 더 와닿는 것처럼. 문학이란 그저 좋은 것, 그저 위로가 되는 것, 그저 힘이 되는 것, 그냥 그대로 삶의 일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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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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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왜  이제서야 내가 읽었을까.

 

39쇄 돌파.

그 이후로 얼마나 더 책을 찍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렇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당시에 꽤 많은 친구들의 SNS 프로필 사진이 이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세계적인 감독 이안이 만든 영화가 개봉하여 좋은 평을 듣기도 했다.

 

왜 이 책을 내가 그동안 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내가 싫어하는 요소가 많아서?

 

아마도 취향이라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에, 나중에라도 교육으로 바뀔 여지가 없다. 그저 어릴 때 가졌던 이거 좋아, 저거 싫어, 의 개념이 커서까지 가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이 책은 내가 어릴 때부터 선호하지 않았던 소설의 요소가 전부 들어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수많은 세계 명작 동화 시리즈에서 내가 유일하게 싫어했던 책은 명견 래시였다. 사람처럼 말도 하지 못하고, 인간에 대한 태도가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바뀌지 않았기에 다른 이야기의 인간들처럼 질투하고 시기하고 고민하고 반성하고 사랑하고 화해하는 과정이 없기에 지루하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제는 약간 두꺼워진 세계 명작 전집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싫어했던 것은 시튼 동물기. 이건 마치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이었다. 물론 백과사전도 나름대로 그 재미가 있기는 하지만 즐거움이 아니라 지식을 쌓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좀 더 두꺼워진 청소년 명작들 중에서 내가 또 싫어했던 것은 걸리버 여행기. 어린 시절 단 몇 쪽의 책으로만 구성되었던 내용이 차라리 좋았다. 내용이 길어지면서 긴 여행 동안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서만 지내야 했던 걸리버의 삶을 따라가며 누군가와 소통하지 못하고 그저 손님으로만 머무르는 것 같은 이야기에 지쳤다. 물론 이 책 전체가 훌륭한 우화이자 풍자이며 시대적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 내가 다 자라고 나서 안 일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처럼 변화무쌍하지 않고, 처음의 태도가 끝까지 바뀌지 않으며, 인간과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는 동물이 등장하면 나는 그 이야기가 금방 시들해졌다. 물론 키우는 동물과 어느 정도로 영혼을 교감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인간과 인간 처럼 그 과정이 복잡다단하며 다사다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이런 독서 습관은 나만의 것이었던 모양이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동물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내가 읽지 않은 이유는 이런 선입견 때문이다. 다수는 좋아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맞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떄문에.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던 책에 대한 선입견은 전부 사실이 아니다. 이 책은 참 어마어마한 책이며, 거대한 은유이다.

 

이 책에 나오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절대로 만만한 동물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파이에게 일관된 행동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경계했다가, 달려들었다가, 복종했다가, 다시 반항했다가, 순응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헤어질 떄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꼭 인간과 인간 관계 같다. 환상이기는 하지만, 리처드 파커와 파이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며 과거에 있었던 일들과 현재 상황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을 작가가 부여한 것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실수를 통해 목마름이라는 원래 이름 대신 호랑이가 새끼때 그를 잡은 사냥꾼의 이름을 얻게 된 에피소드를 일부러 정교하게 만들어 내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끝에 가서 알려지지만, 사실 리처드 파커는 단순히 호랑이가 아니며, 또다른 주인공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 과정은 파이가 진술하는 과정에서 선박 회사쪽에서 나온 두 명의 일본인들의 대화를 통해 분명하게 서술된다.

 

리처드 파커는 누구였고, 파이가 만났다는 눈 먼 요리사는 누구였으며, 얼룩말은 누구였고... 이런 직접적인 대사가 나오면서 두 가지의 결말이 정확하게 제시가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자연스레 실제 진실은 이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일각에서는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게 진짜고, 다른 하나가 픽션일 수 있다고. 어쩌면 둘 다 픽션이며, 제 3의 이야기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독자의 개인적 경험과 상황에 따라 특정 결말을 정할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결론은, 이거다. 처음 내가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그것, 그리고 대다수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 이야기. 그렇다면 현실은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하며 추악하고 나약한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아야 하는 것. 그렇게나 길게 1부에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애했고, 주인공이 사건 전후로 어떤 종교적 태도로 삶을 견지하는지를 보여준 이유는 그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종교라는 것은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그리고 온 가족이 전부 죽고 혼자 바다에서 표류하면서 과연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구출된 이후로도 고아로서 낯선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만 했던 파이, 그 소년에게 종교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떄로는 만들어서라도 무작정 믿어서라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삶을 견디기가 힘들 수 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영화가 있다.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아직 어려서 수용소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준다. 만약 사실 그대로 알았더라면, 아들은 살아날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하얀 거짓말 때문에 아이는 수용소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아이에게도 아버지의 이야기가 오로지 허구이기만 했을까? 아이는 아버지의 말대로 이른바 미션을 훌륭히 수행했고, 끝까지 살아남아 승자가 되어 탱크를 탈 수 있었고 어머니를 만났다. 아이에게는 아버지의 그 이야기가 진실이었던 것이다.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 그러나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진실이 되었고 살아남을 수 있게 했다. 삶을 견디기 위해 파이가 믿을 수 있었던 것, 믿어야만 했던 것에는 종교 말고 또 한 가지가 있다. 파이가 만들어낸 이야기.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을 어쨌거나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예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위로가 아닐까,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가 종교에 있다면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어떤 이유와 설명을 한다면 그 부분이 아닐까, 작가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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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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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 딱 맞는 사람이 바로 저일 거예요. 당신의 실제 삶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에미라는 여자가 있다. 레오라는 남자가 있다.

어느 날 둘 사이에 이메일이 오고 가기 시작한다.

잡지의 정기 구독을 취소하기 위해 에미가 이메일을 보내는데, 주소를 잘 못 치는 바람에 레오에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 후, 에미가 한 번 더 고객 단체 메일을 발송하면서 레오의 주소까지 포함시키게 되며 둘 사이에 이메일 교환이 시작된다.

 

영화 유브 갓 메일이 생각나기도 하고, 말랑말랑한 로맨스가 기대되다가, 에미는 남편과 아이 둘이 있는 여성이라는 대목에 가서는 좀 의아해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레오가 선을 그으려는 행동을 보이자, 오히려 에미는 더 적극적으로 이 활동을 이어 나가려고 하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 개방적인 유럽의 이야기라서 그런가, 아니면 두 아이가 자신과는 피가 섞이지 않은, 남편이 데려온 아이라서 이럴 수 있는 것인가, 혹은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낀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고, 결국에는, "어? 혹시 이 여자 결혼했다는 것은 거짓말 아닐까? 일부러 자신을 보호하려고 연막을 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부족할 게 없는 결혼 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오게 되는 권태 때문에, 이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해 딱, 자신의 지루함을 없애는 정도까지만 이 관계를 허용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깝다는 것은 거리를 줄이는 게 아니라 거리를 극복하는 거예요. 긴장이라는 것은 완전함에 하자가 있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완전함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완전함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데서 생기는 거예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라는 책 제목은 은은하면서도 열정적인 감정이 묻어 있다. 메일을 주고 받은 두 사람에게는 암호이기도 하고 열쇠이기도 한 말일 것이다. 편지라는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인지, 중간 중간 소위 말하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감정이 흘러 넘치는 부분도 있었다. 냉정하게 서술함으로써 오히려 뜨거운 것이 부각되는 소설의 흘러가는 모습을 보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소 견디기 힘이 들었다. 서간 형식의 소설에서는 보통 한명의 화자만 일정하게 등장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 번갈아가면서 화자가 바뀌어서 따라가기가 좀 힘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화자가 두 명이 등장할 경우 그 두 명의 구분이 뚜렷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의 경우는 그냥 한 사람이 각각 성별을 달리해서 두 개로 쪼개진 느낌, 그러니까 두 인물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지가 않았다. 아무리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캐릭터는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처럼 혹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츠지 히토나리'와 '공지영'처럼, 두 명의 남녀 작가가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각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남자 작가라서의 한계랄까, '에미'의 캐릭터가 종잡을 수가 없었고, 분명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입장에서 바라본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패착은, 후반부에 돌입하여 제 3자의 개입인데,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역량 부족이 아닐까 싶었다. 좀 더 완벽해지려면, 끝까지 이 소설은 둘만의 메일로 남았어야 했다. 누군가가 이 관계에 영향을 준다 하더라도, 직접 메일 수신 과정에 끼어들거나 하지 않고, 철저히 소설 밖에서 존재해야지 그 목소리가 직접 들렸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어쨌든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 인해서 두 남녀의 방향이 틀어졌고, 남자가 결단을 내렸고, 그 과정이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기교와 노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를 떠올렸다. 정체를 모르는 사람과의 서신 교환, 점점 사랑을 느끼는 남녀,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소설이 훨씬 못 미쳤다. 고전이 왜 고전이 되고 오랫동안 읽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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