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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이 책에 실려 있는 단편들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레 내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삽질'이었다.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데, 알고 보니 파야 할 땅은 그 땅이 아니었다거나, 애초에 땅을 팔 필요조차도 없었다거나, 혹은 아무리 파려고 노력해도 삽만 허공에서 버둥댈 뿐 아무 성과도 없거나.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악독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 아니 오히려 평범하다기보다는 조금 더 착하고 순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면서 의도치 않게 실수하고, 몰랐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며,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라 한 때 분명히 그랬던 적이 있었고, 요즘엔 아주 조심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또 아니라, 읽다 보면 특정할 수 없는 모두에게, 혹은 내 옆의 누군가에게 연민을 품게 되는, 그런 소설들.
행정동
-만지긴 누가 뭘 만졌다고 그래!
-아까 분명......
오재우는 말끝을 흐렸다.
-밀친 거야, 밀친 거라구! 아까 다 봤다며!
-그러니까 그때 분명......
오재우는 그때 잠깐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웠다.
-너, 내가 그렇게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계속 이러는 거야? 응?
-아니, 난 아까 정말 다 봐서......
-남자 새끼가 치사하게 같은 조 사람 흠이나 잡으려고 들고......
여자는 그렇게 말한 후,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오재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무언가 갑자기 그의 몸에서 쑤욱, 빠져나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재우는 다시 뛰다시피 여자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여자의 어깨를 잡앗다.
-이 개새끼야!
여자가 메고 있던 가방으로 오재우를 내리쳤다.
-싫다잖아! 내가 싫다고! 내가 아니라잖아, 이 개새끼야!
여자는 제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뺵, 소리를 질렀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어쨌든 그 사건 조사하면서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구속할 수 있었지. 모양새가 좋잖아. 불순좌경세력들이 폭력까지 휘둘렀으니까, 우리가 예상한 그림보다 훨씬 좋은 그림이 나온 거야. 문제는...... 네 삼촌이었는데, 분명 모임엔 이름이 올라가 있으니까 기소를 하는 게 마땅한데, 그러기엔 내가 좀 미안한 거야. 그래서 내가 우리 반장한테 사실 저 친군 빨대가 맞다고, 내가 활동비로 따로 포섭한 친구라고 말해 거지. 그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던 게, 그 프라이드를 살 떄 내가 네 고모 명의로 넣어둔 돈 중에서 30만원이 빠져나갔거든. 물론 네 고모는 그떄 잠깐 빌려 쓴다고 생각했겠지만 말이야......
-삼촌도, 삼촌도 그걸 알게 되었나요?
나는 술잔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그럼, 잘 알지. 네 삼촌 조사 끝나고 나갈 떄 내가 다 말해줬으니까. 그떄 30만원이면 꽤 큰 돈이었거든.
나는 그제야 프라이드가 후진되지 않는 이유를, 그 수수께끼를 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것은 그 30만원과 관계된 일일지도 몰랐다.
-거기에 삼촌이 좋아했던 여자도 한 명 있었다던데...... 혹시, 모르세요?
-모르긴, 잘 알지. 주동급이어서 내가 직접 조서 꾸몄는 걸...... 걘, 그때 형기 받고 그다음 해에 바로 청주로 갔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김 박사님, 김 박사님...... 김 박사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잘 들었어요. 하지만 김 박사님...... 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네 이야기 말이야! 나에겐 지금 그게 필요하단 말이야, 김 박사, 이 개새끼야.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당혹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하지만 그는 또 한편, 이 아이가 기증자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가 얼핏 생각한 기증자의 아이는,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채 열 살도 되지 않는 꼬마아이였다. 삼십대 후반이라는 기증자의 나이 떄문에 자동적으로 그런 그림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능성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앞에 앉아 있는 이 아이는, 어쩌면 누군가의 문병을 온 학생일 수도 있고, 장염이나 빈혈 떄문에 입원한 환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환자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르고, 혹 상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가능성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 아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탄원의 문장
나는 조금 당황했다. 당황했지만 또 한편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그녀앞 소파로 다가갔다.
-아니, 나는 어쨌든 P에 대해선 최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교수님도 P에 대해선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그 개자식 말만 들으셨으니까.
여학생이 갑자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해 나는 어, 한 상태에서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 개자식이 종종 언니한테 손찌검한다는 것도 말하던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입증 불가능한 것들은, 어쩌면 입증 가능한 사실들로부터 나오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것은 '발견'의 영역이지, '발명'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사실들과 사실들 틈 사이에서 불가능한 것들은 시작되고 피어난다는 것, 그래서 숙명적으로 사실들의 세계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최의 탄원서는 시작되었다.
이정(而丁)-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
"언젠가 수환 학생이 이정 선생의 이름을 처음 말하면서 그게 '고무래가 되겠다'라는 뜻 아니냐고 물어왔던 적이 있고. 나는 그때 그런 뜻도 있지만 그건 그냥 글자 모양 그대로 보는 게 맞을 거라고 말해주었소. 그러니까 쇠스랑(而)과 망치(丁)가 맞을 거라고...... 우린 해석하기보단, 보이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화라지송침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지금 참아내고 있는 그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게 못한 사람들, 죄의식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거절을 참아내는 사람들과 망상을 참아내는 사람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기도 한다. 누가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참아내고 있는가, 누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한계를 말해주는, 숨겨진, 또 하나의 눈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나 아내나, 우린 둘 다 기종 씨를 참아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나의 그것과 아내의 그것이 다를 수 있고, 나의 짐작과 아내의 진실이 같을 순 없을지라도 기종 시를 외면했다는 점에서 아내나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 나느 가끔 내가 그를 참아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그랬다면, 아내는 나 또한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결코 아내를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나 역시도 아내의 입장이었다면, 그건 또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내나 나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내는 선에서,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그게 조금 쓸쓸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게 또 우리였으니까.
내가 양돈축사를 떠나기 직전, 꽁지머리 남자에게서 들은 일화는 이런 것이었다. 기종 씨의 아버지가 양돈축사에어 가까운 폐비닐하우스에서 목을 맸다는 것, 의자를 밟고 올라가 목을 맸다는 것, 그 아래에서 기종 씨가 꼬박 사흘을 지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남자는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장님이 그 청년 아버지가 장사를 치러주었다고. 그다음부터 계속 머슴처럼 부렸다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나는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속옷은 속에 입는 옷이 맞잖아? 그치, 형? 그래야 속옷이 되는 거잖아, 응?
나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이며, 계속 형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화도 통 없던 형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나는 오래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이산 가족처럼 오래오래, 두서없이 말을 했다.
한데, 깊이 잠들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형이 갑자기, 툭, 한 마디 던졌다.
-미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