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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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만들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스토리, 그리고 스타일일 것이다.

 

정유정 작가는 누가 뭐래도 스토리에 탁월하다. 7년의 밤도 그랬고, 28도 그랬다.

이 소설 또한 그렇다. 정신 병원에 있는 동갑내기 환자가 병원에 입원한 생활을 그려내며, 그들의 이야기와 회상을 통해 과거를 풀어내고 결론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읽는 내내 더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정유정 작가의 스타일 때문이겠지. 예를 들면,

 

334P그럼 우리는 이수명씨의 첫 비행을 지켜본 사람들인가요?”

 

336P수명아. 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간 입원해 있던 병동의 사람들이 흡연실 창가에 붙어 있었다. 잘 가리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하늘에는 석양이 번지고 있었다.붉은 하늘 어딘가에서 승민이 충동질했다. 우리 모처럼 트위스트 한번 출까 ... 컴온 에브리바디 .클랩 유어 핸즈 컴온, 렛츠 트위스트 어게인, 라이크 위 디드 라스트 서머....”

 

와 같은 부분들은 읽는 순간 오글거린다고 해야 하나, 일부러 작가가 감동을 주려고 멋을 부린 부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좀 더 담백하게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평범한 문장이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묘한 감동을 주는 법인데, 작정하고 이 부분에서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느낌이랄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인지 그 말에 지치는 느낌이었다. 또 두 주인공에 접근하는 방법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좀 더 인물에 깊이 집중하면 어땠을까, 두 인물이 하는 행동뿐만 아니라 정신병 환자의 생각을 좀 더 보여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그러고나서 생각해보니, 맞다, 이 작가 이 작품 이후에 7년의 밤과 28을 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작가는 자기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는 중인지도. 따뜻하고 보드랍게 품어주는 것이 아니라 차갑고 냉정하게 급소를 찌르는 게 이 작가의 장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기작에서는 부디 그 장기를 살려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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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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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중반부에서 우르술라는 막연하게 불안을 느꼈다고 나와 있다. 오랜 역사에서 비슷한 이름이 집요하게 되풀이되었고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내향적이고 머리가 좋은 반면, 호세 아르카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충동적이며 뱃심은 있으나 비극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다는 사실을 깨닫는 우르술라. 계속해서 헷갈리게 이름을 지은 것은 역사의 반복성을 느끼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고,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지역의 특징일 수도 있다. 작가의 고향인 콜롬비아를 비롯한 남미 지역은 잘 모르지만, 그리스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많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름이 현재에도 있다는 내용을 다룬 다큐를 얼핏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다.

 

2.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는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남미 작가들이 나라를 떠나 교류를 하는 바탕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남미 독립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남미의 여러 나라를  독립시켰다. 콜롬비아만 하더라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가 전부 콜롬비아에 포함되었었다고 한다. 군부의 지배, 민중의 저항, 외세의 침략 등등을 소설 속에 잘 녹여냈다. 비슷한 키워드로 상징되는 한국의 근대사를 비교해 보면, 한국 독자들에게, 특히 민주화 이전의 한국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더 인상적일 수도 있겠다. 온 가족이 모여 사는 대가족적에서 오는 분위기도 한국과 비슷하다.

 

3. 작가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작가의 원래 고향은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마을이고 대학은 수도인 보고타에서 다녔다고 한다. 보고타는 고원지대로, 이곳에 올 때마다 작가는 이방인이 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수도가 고원지대라는 것이 특이했는데, 특이하다고 느낀 것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의 시각 때문인 것 같다. 외세로부터 보호하려면 평지에 있는 것보다 어느 정도 높은 지대에 도시가 건설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마콘도가 세워진 것 자체가 이주로 인해 시작되었고, 마콘도로 오는 사람들, 마콘도에서 성장했지만 마콘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어려운 작가의 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4. 작가는 어린 시절 부모와 일찍 이별하여 조부모의 손에서 컸다고 한다. 작가의 외할머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흔히 설명되는 이 책의 분위기는 꼭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ㅡ로 시작되는 우리나라 전설이나 민담 같기도 하다.

 

5. 중고등학교 시절 사회 시간에 국가가 형성되고 문명이 만들어지는 부분에 대해 공부했던 기억이 아주 어렴풋이 난다. 밑줄을 쳐가며 달달 외웠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아무리 쥐어짜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없어 슬프기는 하지만. 씨족에서 부족이 되고, 다시 여러 단계를 거쳐 왕국과 제국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이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련하게 떠올랐다. 마치 한 문명의 흥망성쇠를 압축해놓은 듯한 이 책에서 나는 흥과 성보다 망과 쇠 쪽이 더 인상적이었다.

 

6. 하느님이 세월에 대해서 무명 한 마를 잴 때 터키인처럼 속임수를 쓰지 않던 옛날은 만사가 요즘과는 달랐다고 묘사하거나, 아우렐리아노 가문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가운데에서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밤마다 사람들을 저택으로 불러 술마시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인간이 아니라 개가 죽은 것 같다고, 많은 고생을 하며 동물 엿을 팔아 지탱해 온 이 미치광이 집안의 운명이 타락의 쓰레기통이 되어간다는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7. 작가는 가장 싫어하는 인물을 콜럼버스로 꼽았다고 한다. 바나나 회사가 들어와 마콘도에 일대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의 핵심은 타락과 착취이며, 회사의 기사들이 노무자와의 약속을 회피하였고 역에 모인 수많은 노무자를 사살하였으며 회사의 핵심 인물은 마콘도 밖을 빠져나갔고 마을이 쇠락해진 과정을 보면, 작가의 생각이 뚜렷하게 읽힌다. 끊임없이 외부세력에 시달렸고 남미의 국가들과 그 안에서 발버둥 쳤던 남미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8. 백년 동안의 고독, 백년의 고독에서 백년은 쉽게 알 수 있다. 책을 읽기도 전에 맨 앞에 가계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독은 무엇일까? 고독이라는 단어는 책을 다 읽은 내 기억이 맞다면 중반부에나 가서야 처음 등장한다. 문명의 번영 후에 쇠퇴가 오고 쇠퇴가 오기 바로 직전, 아무도 그 쇠퇴를 예상할 수는 없지만 뭔가 이전과는 달라졌다고 느끼는 바로 그 시기에, 등장인물들은 고독을 느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닮은 것 같아 약간 떨린다. 대체 고독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라고 하고 누군가는 인간은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 시간을 잘 활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인과 고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쌍의 묶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에 응팔 열풍이 불었나 보다. 고독하기 전, 고독을 느끼기 전 시대의 이야기라서. 그 드라마의 말미에서 모여 살던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아이들은 성장했으며, 어른이 된 아이들은 그 시대를 그리워한다. 아마도 여기에도 고독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9.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성경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누구를 낳았고 또 누가 누구를 낳았고... 이런 족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데다가, 100살 넘게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합쳐지면 더더욱 그렇다. 개미떼나 홍수, 가뭄 등등은 성경에서 흔히 등장하며 사실과 전설이 뒤섞여 있다. 아이가 바구니에 탄 채로 강에서 떠내려왔다는 모티브나, 누군가를 죽이고 나서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는 장면 등등 수많은 장면들은 성경에서 그대로 모티브를 따온 것이 아닌가?

 

10. 성경 뿐 아니다. 이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로마신화에도 빚을 지고 있다. 책 전편에 등장하는 근친상간의 모티브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아마도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남미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설, 민담, 설화의 상당 부분도 이 책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된다. 예전에 성경 속 아브라함의 열 두 아들들은 당시 유대인이 열 두 부족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중 열 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결국 나머지 형제들을 전부 거둔다는 것은 열 한 번째 부족을 중심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해석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아들들처럼 이 책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도 상징으로 읽어야 할까? 아님 정말 그 자체로 읽어도 되는 걸까?

 

11. 집안의 역사는 멈추지 않는 톱니바퀴이며 그 축이 필연적으로 서서히 마멸되는 일이 없다면 영원히 계속 회전하는 바퀴라는 본문 속 내용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한숨을 토해내면서 드는 생각 그대로다. 이 부분이 책의 종반부에 다다라 등장하는데, 부엔디아 가문의 백여년의 역사를 달음박치며 읽어나가다 저 대목에 다다르는 순간, 정말로 한숨이 토해지면서 내가 이 결말을 보기 위해 이토록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허무함과 슬픔, 또 기쁨과 성취감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12. 갑자기 남미로 훌쩍 떠나고 싶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남미에 대한 지식은 축구와 더운 날씨, 그리고 몇몇 유명인이 전부였다. 워낙 기초적인 지식이 없던 터라 이 책 한 권 만 놓고 보아도 전후를 비교해 보면 남미에 대한 내 감정은 천지 차이이다. 물론 잠깐 다녀온 여행으로 그 나라의 전부를 알 수야 없겠지만, 여태까지의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 잠깐의 머무름이더라도 일단 그 곳에 발을 디디고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그 곳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눈을 마주치고 공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나라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착각인 줄 알면서도, 그런 착각에 내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다녀오고 나서 관련 나라의 자료를 찾아보면서 내 지식이 확장되면서 여행 당시의 감동이 증폭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손미나가 페루에 다녀와 쓴 여행기가 눈에 띈다. 다음엔 이 책을 읽어볼까? 아니, 작가와 애증의 관계였다는 페루의 작가 요사의 소설도 좋을 것 같다. 좋은 책은 책장을 덮고 난 뒤, 또 다른 책을 보고 싶게 만드는 생각을 들게 하는 책이라는 내 신조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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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24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ㅡ잘읽었었습니다.^^
 
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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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였다.

 

우메자와 리카

41. 유복한 부모 밑에서 성장해 평범한 가정을 꾸렸으나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은행에서 1억 엔을 횡령하고 도주 중.

 

오카자키 유코

리카의 여고 시절 친구.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청초함을 지닌, 정의로운 소녀로 리카를 기억한다. 과도한 근검절약파.

 

야마다 가즈키

리카의 전 남자친구. 욕심 없고 자기만의 고상한 품위를 지닌 여성으로 리카를 기억한다. 현재 낭비벽이 심한 아내와 갈등 중.

 

주조 아키

리카가 전업주부 시절 다녔던 요리교실 친구. 계산적이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 리카를 기억한다. 쇼핑중독으로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현재 독립 중.

 

히라바야시 고타

리카의 애인. 리카가 담당하는 VIP 고객의 손자. 가난한 고학생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조부를 증오한다.

 

우메자와 마사후미

리카의 남편. 결혼하지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는데 노력도 하지 않고, 아내와의 관계에 큰 열정이 없다.

 

야마다 마키코

가즈티의 아내. 부유했던 친정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현재의 생활수준을 비관하다 쇼핑중독에 빠져 큰 빚을 지게 된다.

 

등장 인물을 보면 한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어떤 인물인지 주인공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주인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돈에 대한 태도가 나온다.

 

유복, 평범, 근검절약, 낭비벽, 쇼핑중독, 가난한 고학생, 부유했던 옛 시절...

 

저 중에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돈을 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나의 태도는 어디에 해당할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낭비하는 것의 반대가 근검절약이라면, 무조건 근검절약하는 것을 찬양할 수 있지만, 마지막에 다다라 유코의 일화가 소개되면서 무조건 근검절약하는 것도 또한 다른 의미에서 돈의 노예가 된 것임을 보여 준다.

 

은행원이 거액을 횡령했다는 뉴스는 종종 TV를 통해 접하게 된다. 그때마다 궁금했다. 도박 때문이었을까, 애인 때문이었을까, 마약을 한 것일까, 세상에 비밀은 없는데 잡힐 것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어쩌면 그런 궁금증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바람난 기혼 직장인의 범죄로 요약할 수 있을 뉴스의 뒷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촘촘히 들어가 있을지 생각해 본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산뜻하지 않고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이 책 전체의 내용이 한 몫 하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한 이유는, 마음이 답답했기 떄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야무지고 똑똑했던 리카가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진출하고, 결혼을 하면서 인생이 어떻게 서서히 진창으로 들어가는지 서늘하게 느껴져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당연히 의문이 든다. 리카가 거액의 돈을 횡령하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인가. 만약 그저 우연이었다면 가슴 아픈 일이다. 다른 결말을 가져올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라면, 그 또한 절망적인 일이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내용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는 개인의 이야기이다. 특히나 그 개인은 세차게 자신의 운명에 맞서고,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밝은 쪽으로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결국 실패할지라도. 현재 나의 위치는 이전까지 내가 선택한 결과의 합이거나, 갈림길에서 내가 택한 방향으로 현재까지 걸어온 곳이다. 리카의 횡령도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결혼 생활, 일하던 도중 있었던 작은 일탈 등등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알아차릴 굵직한 사건 뿐 아니라, 그 사건 사이사이에 있떤 촘촘한 작은 사건들이 하나하나 쌓아올란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나는, 개인의 의지로 인생을 개척한다는 쪽이 마음에 든다. 그 편이 나에게 덜 절망적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나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리카가 너무 일찍 사회에 나오지 않았다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면, 아이가 있었다면, 차라리 이혼을 했다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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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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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안 1000여 편의 작품을 쓴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평균 수명 이상으로 오래 살았을 것이고, 평생 글을 써도 될 만큼 건강했으며, 다른 취미가 없이 오로지 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이 아닐까?

 

마쓰모토 세이초는 1909년에 태어나 1992년에 사망한 일본의 작가다. 80세가 넘었으니 장수한 것은 맞지만, 실제로 그가 글을 쓴 것은 1955년이었다고 한다. 정확히 저자에 성장배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사회경제적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초로, 그의 작품을 기준으로 일본에서는 미스터리 문학을 구분하며, 요즘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작가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미스터리 뿐 아니라, 역사와 평전, 논픽션에 이르기까지 평생 '공부하는 운동가'이며 '실천하는 학자'로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으며, 또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은 나의 느낌은,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보다는 좀 더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두 작가가 마치 걸쭉하면서도 이것 저것 내용물이 많은 전골 같은 느낌이라면, 마쓰모토 세이초는 맑고 담백한 지리탕 같은 느낌이었다. 책의 분량은 250쪽도 안 되고, 철도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는 수학적이며, 사건의 중심 인물은 열 명도 되지 않기 때문에 쓸데없는 곳으로 관심이 쏠리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소설을 참 좋아한다.

 

최근의 일본 작가들보다는, 오히려 나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생각이 많이 났다. 한없이 이야기를 뻗어나가지 않고, 사건 자체에 집중하면서 인물을 놓치지 않게 한다. 다른 소설은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군더더기 없는 작품은 아마도 작가의 성격이 배어나왔을 테니 다른 작품도 비슷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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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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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책의 시작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스토너는 주인공의 이름이며, 이 책은 스토너의 일대기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업을 공부하기 위해 미주리 대학에 입학하지만, 문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부귀영화에 큰 욕심이 없는 그는 평생 학문에만 열중하고, 교수가 되며 학생들을 가르치다 세상을 떠난다. 크게 튀는 부분이 없는, 특별할 것 없는 한 남자의 인생의 이야기는 출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가 21세기에 들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며 수많은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왜 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알 것 같다. 어쩌면 나 또한 나이가 들면 이 소설이 더 좋아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소설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생. 그러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는 평범한 삶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대체 평범한 게 있기나 한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고, 이런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삶 조차도 사실 열심히 노력해야만 가능한 삶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람은,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했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으며,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청혼하여 결혼하였으며, 사랑스러운 딸을 두었고, 심지어 중년에 뜨거운 사랑도 경험하였으며, 평생 현역으로 살다가 노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체 이 사람의 인생 중 어디에 내가 연민을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지나치게 냉정한 탓일까?

 

가난했지만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의 전공을 바꾸었으며, 큰 무리 없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직장 생활을 했다. 경제적 격차가 있는 집안의 여자와의 결혼도 여자의 부모가 그렇게 반기지 않았을지언정 결국 성공했으며, 실제로 결혼 후 처가로부터 약간 도움도 받는다. 사랑스러운 딸의 결혼 생활은 늘 장밋빛은 아니었지만, 평생 딸은 시댁과의 관계가 원만했고 경제적으로도 큰 시련이 없었으며 손자까지 낳으며 나름 만족하고 산다. 죽을 때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에서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심지어, 중년에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연하의 여성과 열렬한 사랑을 하기도 한다.

 

평생 미주리주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결국 보내야했기 때문에? 학과장이나 총장 등 크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 어디에서 슬픔을 느껴야 할까? 그가 고독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고독은 그가 어느 정도 자처한 면이 있다. 학문에 있어서만큼은 타협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조용한 세계를 어떻게든 유지하겠다는 그의 조용한 고집이 다른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는 선하고 참을성 많고 성실한 성격이었으나 현명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불굴의 용기와 지혜로 낙관을 극복하기보다는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편이었다. 21세기 한국의 독한 이야기들에 익숙해진 나는 종종 가슴을 쳤다. '이 사람아, 왜 당하고만 있어. 찍소리라도 내봐야지. 딸을 위해서라도, 사랑하는 캐서린을 위해서라도.' 나는 끊임없이 상상했다. 스토너가 악의 무리(이디스, 로맥스, 찰스 워커)를 놀라운 지혜와 용기로 무찌르고 사랑하는 사람들(딸과 캐서린)을 행복의 세계로 이끄는 상상.

하지만 작가와 스토너는 끝까지 나의 기대를 배반했다. 스토너는 계속 참기만 하는데 악의 무리는 승승장구했다. 상황을 단번에 바꿔주는 극적인 반전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몹시 아쉬워하다가 결국 깨달았다. 독한 삶이든, 화려한 삶이든, 스토너처럼 인내하는 수수한 삶이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똑같다는 것. 그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되뇐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본문 맨 뒤에 붙은 옮긴이의 말이다. 그런데 옮긴이가 지적한 이디스, 로맥스, 찰스 워커가 과연 악의 무리였을까? 내가 잘못 독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부족한 인간일지언정 악의 화신은 아니었다. 스토너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결혼 전 이모와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던 이디스에게 청혼하며 스토너는 결혼 후 자신이 유럽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디스가 딸 그레이스에게 하는 행동들에 대해서 그는 찬성하지 않지만, 두드러지게 반대하지도 않는다. 정말 딸을 사랑했다면 파국을 각오하고서라도 아내와 큰소리를 내며 싸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기치 않은 딸의 임신 소식을 들은 부모는 대조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그 부분에서는 스토너가 참을성이 있고 담대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딸에게조차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소식을 듣고도 그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딸이 아니라 조카라면, 대녀라면, 여동생이라면 가능했을 반응 아닌가? 찰스 워커의 경우, 분명히 문제가 많은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교수라면 그의 반항적인 행동을 포용해줄 수는 없었을까? 찰스 워커의 예비 구두시험에서 로맥스의 행동이 문제라면 동일한 정도만큼 스토너의 행동도 비판받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떨어뜨리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는, 직업으로서의 교수, 학자로서의 양심에서는 훌륭할지는 모르나, 그보다 수십 년 뒤에 태어난 젊은이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이자 인생의 선생님으로 불릴 수 있는 태도는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도 워커가 절대 교육자가 되면 안된다고 단언하는 스토너의 그 태도야말로, 교육자로서 결격사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과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토너가 몰랐을까? 평생 동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슴속에 새겨가며 살아온 인물이 스토너가 아닐까?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 그 안에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평생 지켜가며 살아가는 것. 스토너는 그것을 원했고 어느 정도는 이뤄냈다고 보여진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차피 소설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행위인데, 나에게 좋은 소설은 등장 인물을 얼마나 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이다. 너무나 나와 닮아서 미워할 수 없거나, 내가 꿈꾸는 삶을 보여주거나, 이상하게 공통점이라고는 없는데도 위로를 받는 것 같거나, 아니면 소설 속으로 들어가 손을 잡고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연민을 자아내거나.

 

책날개 뒤쪽에 선데이 타임스 리뷰 일부가 실려 있다. "나보코프 같은 계략, 제임스 같은 반전, 콘래드 같은 묵직한 의미, 포드 같은 뒤틀림은 없다." 어쩌면 이런 점들 때문에 아직 젊은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10년쯤 뒤에 이 소설을 읽으면 느낌이 달라질까? 스토너를 사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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