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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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책의 시작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스토너는 주인공의 이름이며, 이 책은 스토너의 일대기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업을 공부하기 위해 미주리 대학에 입학하지만, 문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부귀영화에 큰 욕심이 없는 그는 평생 학문에만 열중하고, 교수가 되며 학생들을 가르치다 세상을 떠난다. 크게 튀는 부분이 없는, 특별할 것 없는 한 남자의 인생의 이야기는 출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가 21세기에 들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며 수많은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왜 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알 것 같다. 어쩌면 나 또한 나이가 들면 이 소설이 더 좋아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소설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특별할 것 없는 인생. 그러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는 평범한 삶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대체 평범한 게 있기나 한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고, 이런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삶 조차도 사실 열심히 노력해야만 가능한 삶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람은,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했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으며,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청혼하여 결혼하였으며, 사랑스러운 딸을 두었고, 심지어 중년에 뜨거운 사랑도 경험하였으며, 평생 현역으로 살다가 노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체 이 사람의 인생 중 어디에 내가 연민을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지나치게 냉정한 탓일까?

 

가난했지만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의 전공을 바꾸었으며, 큰 무리 없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직장 생활을 했다. 경제적 격차가 있는 집안의 여자와의 결혼도 여자의 부모가 그렇게 반기지 않았을지언정 결국 성공했으며, 실제로 결혼 후 처가로부터 약간 도움도 받는다. 사랑스러운 딸의 결혼 생활은 늘 장밋빛은 아니었지만, 평생 딸은 시댁과의 관계가 원만했고 경제적으로도 큰 시련이 없었으며 손자까지 낳으며 나름 만족하고 산다. 죽을 때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에서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심지어, 중년에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연하의 여성과 열렬한 사랑을 하기도 한다.

 

평생 미주리주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결국 보내야했기 때문에? 학과장이나 총장 등 크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체 어디에서 슬픔을 느껴야 할까? 그가 고독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고독은 그가 어느 정도 자처한 면이 있다. 학문에 있어서만큼은 타협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조용한 세계를 어떻게든 유지하겠다는 그의 조용한 고집이 다른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는 선하고 참을성 많고 성실한 성격이었으나 현명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불굴의 용기와 지혜로 낙관을 극복하기보다는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편이었다. 21세기 한국의 독한 이야기들에 익숙해진 나는 종종 가슴을 쳤다. '이 사람아, 왜 당하고만 있어. 찍소리라도 내봐야지. 딸을 위해서라도, 사랑하는 캐서린을 위해서라도.' 나는 끊임없이 상상했다. 스토너가 악의 무리(이디스, 로맥스, 찰스 워커)를 놀라운 지혜와 용기로 무찌르고 사랑하는 사람들(딸과 캐서린)을 행복의 세계로 이끄는 상상.

하지만 작가와 스토너는 끝까지 나의 기대를 배반했다. 스토너는 계속 참기만 하는데 악의 무리는 승승장구했다. 상황을 단번에 바꿔주는 극적인 반전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몹시 아쉬워하다가 결국 깨달았다. 독한 삶이든, 화려한 삶이든, 스토너처럼 인내하는 수수한 삶이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똑같다는 것. 그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되뇐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본문 맨 뒤에 붙은 옮긴이의 말이다. 그런데 옮긴이가 지적한 이디스, 로맥스, 찰스 워커가 과연 악의 무리였을까? 내가 잘못 독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부족한 인간일지언정 악의 화신은 아니었다. 스토너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결혼 전 이모와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던 이디스에게 청혼하며 스토너는 결혼 후 자신이 유럽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디스가 딸 그레이스에게 하는 행동들에 대해서 그는 찬성하지 않지만, 두드러지게 반대하지도 않는다. 정말 딸을 사랑했다면 파국을 각오하고서라도 아내와 큰소리를 내며 싸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기치 않은 딸의 임신 소식을 들은 부모는 대조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그 부분에서는 스토너가 참을성이 있고 담대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딸에게조차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소식을 듣고도 그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딸이 아니라 조카라면, 대녀라면, 여동생이라면 가능했을 반응 아닌가? 찰스 워커의 경우, 분명히 문제가 많은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교수라면 그의 반항적인 행동을 포용해줄 수는 없었을까? 찰스 워커의 예비 구두시험에서 로맥스의 행동이 문제라면 동일한 정도만큼 스토너의 행동도 비판받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떨어뜨리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는, 직업으로서의 교수, 학자로서의 양심에서는 훌륭할지는 모르나, 그보다 수십 년 뒤에 태어난 젊은이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이자 인생의 선생님으로 불릴 수 있는 태도는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도 워커가 절대 교육자가 되면 안된다고 단언하는 스토너의 그 태도야말로, 교육자로서 결격사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과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토너가 몰랐을까? 평생 동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슴속에 새겨가며 살아온 인물이 스토너가 아닐까?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 그 안에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평생 지켜가며 살아가는 것. 스토너는 그것을 원했고 어느 정도는 이뤄냈다고 보여진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차피 소설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행위인데, 나에게 좋은 소설은 등장 인물을 얼마나 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이다. 너무나 나와 닮아서 미워할 수 없거나, 내가 꿈꾸는 삶을 보여주거나, 이상하게 공통점이라고는 없는데도 위로를 받는 것 같거나, 아니면 소설 속으로 들어가 손을 잡고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연민을 자아내거나.

 

책날개 뒤쪽에 선데이 타임스 리뷰 일부가 실려 있다. "나보코프 같은 계략, 제임스 같은 반전, 콘래드 같은 묵직한 의미, 포드 같은 뒤틀림은 없다." 어쩌면 이런 점들 때문에 아직 젊은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10년쯤 뒤에 이 소설을 읽으면 느낌이 달라질까? 스토너를 사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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