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처네 (반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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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새롭다' 유행은 돌고 돌지만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가 없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인생을 얼마 살지는 않아지만 한참 이십대 초를 보내고 있는 딸들을 바라보면 내 이십대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다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살까? 내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까?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하며 새로운 내 인생을 선택할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그렇다고 지난 시간들이 모두가 다 후회되는 그런 시간은 아니었다고 본다.과거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밑바탕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니 실패든 성공이든 과거에 고마워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선택이란 자신이 하지 않은 부분은 누구나 후회하게 마련이다.

 

'누비처네' 두껍게 누비고 끈을 달아 아이들을 업을 수 있게 만든 포대기다. 누비처네라고 하니까 무얼까 하고 고개를 갸웃뚱 하게 만드는데 첫아리를 낳고 친정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하신 말씀 중에 '애기 포대기는 사지 마라.엄마가 사줄테니까..' 그렇게 하여 엄마는 시골양반이면서도 남들 눈에 아쉽지 않게 일명 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쌈짓돈을 꺼내어 겨울용과 여름용 포대기를 사주셨다.아이를 가지고 아프기 시작한 허리 때문에 애들을 업어서 키우지는 않고 그저 옷장에 잘 보관하게 된 포대기,가끔 친정에 갈 때 가져가면 엄마가 대신 아이를 업고 동네를 한바퀴 돌곤 하셨다. 딸만 둘을 낳았는데 친정엄마는 아들을 낳으라는 뜻으로 포대기를 파란색으로 사주셨다. 딸아이에게 파란색이라 한마디 아쉬운 소리를 했더니 여름용은 핑크색으로 구매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이십여년이 지났지만 친정엄마가 사주신 포대기는 아직도 새것처럼 옷장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아마도 딸들에게 물려주지 않을까.

 

저자의 글은 처음 접해본다.저자의 이름도 처음이다.내겐 생소한데 두꺼운 수필집에 먼저 괜히 무게감이 전해 왔는데 한 편 한 편 읽다보니 진작에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느다. 발간사에서 '아직도 목성균을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간단하게 그를 소개한다면 수필계의 기형도라 할 것이다. 기형도가 죽을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지만 사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후배 시인들이 거의 없다고 평가되듯이, 수필계에서는 목성균이 그러하거나 그리 될 것이다.사실 외면받기야 목성균이 더했다.' 수필을 읽기 전에 작가의 약력을 읽다보니 정말 너무 늦게 너무 괜찮은 작가를 만났는데 그의 글을 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수필계의 기형도'인 목성균이라는 작가는 정말 우리가 잃어버린 감성을 그의 글에 시적 언어로 모두 담고 있듯 한 편 한 편이 정성스럽게 누빈 하나의 작품처럼 모두가 깊은 울림을 주기도 공감가는 글들이 너무 많다.

 

그의 글을 읽고 싶으면 어느 페이지나 펴서 읽으면 그를 만날 수 있고 우리가 잊고 있던 '과거'와 조우하게 된다. 해설에서 이야기 했듯이 '과거는 새롭다' 라는 말이 글을 읽다보면 공감이 간다. 그는 평범한 일상이나 자신의 과거 이야기들을 통해 삶을 관조하듯 깊은 시적 언어로 짧은 글들을 토해낸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무척 순종적이고 아버지를 크게 생각했던 그,하지만 그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아버지처럼 나이 들어 가면서 아버지라는 산을 넘지는 못한듯 하면서도 자신 속에 있는 갇혀 있는 아버지를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런가하면 '누비처네' 에서처럼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편지와 소액환을 보내어 명절에 내려오는 길에 첫 아이를 낳은 아내에게 누비처네를 선물하게 하는 자상함,이것이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뚝배기에 담긴 장맛처럼 진하고 은근함이 베어 있는 부정을 생각해 한다. 그 속에서 부부의 정은 더욱 깊어가고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저으이 행복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 하다.

 

그의 아버지는 부정情을 밖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은근하게 그리곤 한번을 표현해도 올곳게 행하신 분인듯 하다. 아들이 등잔의 심지만 키우고 있자 맑고 밝은 불빛을 위해 등잔의 심지를 갈아 주셨던 아버지,그게 아버지 방식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인생의 끄트머리에서는 아들의 수발이 해야했던,쓸모 없는 등잔처럼 쇠잔해지셨다. 세월 앞에 허망한 것이 없겠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지난 시간들의 편린을 하나 하나 이어 맞추어 조각보를 완성하듯 나도 덩달아 꺼내어 보며 미소짓게 만든다. 우리집에서 등잔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들어 가기 전인듯 하다. 등잔불 밑에서 언니 오빠들을 따라 공부를 한답시고 옆에 앉아 책을 보다가 등잔불에 눈썹도 태우고 머리도 태우고 가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추억을 안겨 주던 등잔이 집집마다 편하게 컸다 켤 수 있는 전기가 들어오면서 친정엄마는 등잔을 모두 리어카 장수에게 팔고 말았다. 그 때에는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오래된 물건들을 리어카를 가지고 사러 다니시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 분들에게 빨래비누 몇 장에 팔아 넘긴 것들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기도 했지만 엄마에게는 그것이 어쩌면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없애고 싶은 물건이기도 했을 것이다.아니 가난보다 고난이라고 해야하나. 가끔 식구들과 둘러 앉아 그시대 그런 물건들을 헐값에 팔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말하곤 한다.지난 것에는 다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기쁜 일들 기분 좋은 일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 삶과 죽음등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들이 과감없이 그리고 시적 언어로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무언가 짧은 글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깊은 여운이 짧다고 지나치기 보다는 한번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여운을 남겨 주어 책의 두께가 주는 무게감이 아니라 글이 주는 무게감이 한참을 머물렀던 것 같다. 어릴적 우리집에도 '수탉'이 있었다. 시골에서는 닭은 닭장에 키우기 보다는 낮에는 그냥 풀어 놓고 놔먹인다.아버지는 닭을 애지중지 키우셨고 그 닭들은 아침이면 아버지의 정성에 보답하듯 따뜻한 달걀을 퐁퐁 안겨 주어서 아침이면 막내딸 밥상에 꼭 챙겨 주시곤 했다.그런데 그런 닭이 나도 물론 좋았지만 수탉이란 놈은 정말 무서웠다. 위풍당당하게 멋지게 생겨서 털의 아름다운 빛깔에 취해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는데 이 녀석이 나만 보면 멀리서부터 뒤뚱뒤뚱 하다가 날지도 못하는 녀석이 날아 오듯 내게 달려와 날 쪼곤 했다. 그래서 늘 경계를 하던 녀석,그렇게 수탉과 내 전쟁은 날마다 이어졌고 그런 딸의 모습이 마음 아프셨는지 아버지는 어느 날 아쉬움을 뒤로 하며 그녀석을 밥상에 올리고 말았다. 저자의 <수탉>을 읽으며 내 어린시절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유독 우리집에 오는 수탉마다 나를 경계했는데 왜 그랬는지.

 

달포 후에 뒷집 새댁은 딸을 낳았다. 물론 순산이었는데 아들과 딸의 차이가 돼지불알의 주체와 객체의 차이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아쉬움이 남았다. -돼지불알 중에서

 

그런가하면 <돼지불알>에서는 혼자서 낄낄 웃으며 읽었다. 어린시절 시골에서는 마을 잔치가 있으면 돼지를 잡는 마당이 정해져 있고 그 곳에서는 잔칫날에 돼지를 잡았다.돼지오줌보는 동네 아이들이 차지하고 놀이기구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도 어린시절에는 돼지잡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더욱 가깝게 느껴졌던 이야기,그런데 지엄한 시아버지의 돼지불알을 훔쳐다 아래 윗집 며느리들이 포식하듯 맛난 시간을 즐긴 것이다. 맛나기 보다는 둘 다 임산부였으니 단백질 공급원으로 돼지불알을 훔치게 되었던 것인데 시아버지의 물음에 능청스럽게 대답했지만 아들을 순산해서 안겨 드렸던,그럼에도 주체는 아들을 본인의 아내는 딸을 낳음의 서운함일까 객체로 표현된 것이 글의 표현일까.그 이야기를 읽다보니 내가 첫아이를 가지고 시집살이를 하던 시절이 생각났다.할머니까지 정정하게 계신 층층시하,출가를 하지 않은 도련님들까지 있어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과 임신으로 모든 것이 낯선 내게 옆지기는 그리 살갑게 대하거나 임산부를 위하여 먹거리를 잘 챙겨주지도 않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한번은 길가에서 파는 개구리참외가 너무 맛나 보여 사가지고 왔지만 식구수 대로 산것이 아니라 내가 먹을 양인 두어개만 사서 식구들과 나누어 먹기엔 부족하여 집 곁에 받쳐 있는 자전거에 매달아 놓고 윗층에 방이 있어 잠자러 가기 전에 가져 가리라 했던 참외가 자전거가 쓰러지며 식구들이 모두 알게 되었고 그런 맘을 이해해 주기 보다는 자신들을 챙기지 않았다는 설움에 시집살이를 더 고되게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야기는 옆지기와 가끔 꺼내서 단물을 빼먹곤 하는데 참외 이야기를 하면 미안한가보다. 분가해서 살았다면 잘 챙겨 주었을터인데 층층시하에서 시집살이를 고되게 하며 살게 하고 첫 아이에게 부족하게 해 주었다는 생각,글을 읽으며 되새김질 해 본 과거가 가슴 시리지만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소년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까.만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위를 꼭 설명해 주고 싶다. 인생이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면서 요령껏 당면을 피해 가는 것이라는 비뚤어진 생각으로 어느 길을 가고 있지나 않을까? -약속 중에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하나 하나 뜯어 놓고 보면 결코 행복한 이야기가 아닌듯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삶이고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뼛속까지 글쟁이였지만 삶은 그를 문학이 아니라 좀더 진흙탕에 빠져들게 만들었지만 산림직 국가공무원을 하며 자연과 더 가깝게 느끼고 자연을 좀더 깊게 성찰을 하며 문학의 깊이가 더 다져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육백마지기 고원의 통나무집에서 만난 늙은 심마니와 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약속>은 알퐁스 도데의 <별> 보다 더 깊은 울림이나 아름다움을 주는 이야기같다.삶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하듯 그는 아름다운 시적 언어와 탄탄한 구성력으로 깊이 있는 글을 탄생시켜 목성균이라는 커다란 나무에 무성하게 나붓끼는 잎을 만들어 내었다. 이제라도 그를 알았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내 삶이 각박하다고 느낄 때 혹은 독서를 하다가 혹은 글을 쓰다가 무언가 회의가 느껴질 때 '목성균의 수필집'을 꺼내어 읽어보면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글이 주는 힘이 참 크다는 것을 이 수필집에서 느껴본다.언제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몇 번이고 꺼내어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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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 안녕? - 자폐증 천재 아들의 꿈을 되찾아준 엄마의 희망 수업
크리스틴 바넷 지음, 이경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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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에 보았던 영화 <레인맨>,더스틴 호프만과 톰 크루즈의 영화로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였다. 형인 더스틴 호프만이 자폐연기를 펼쳤는데 정말 인상 깊었다.한참 더스틴 호프만이 인기였던 시대였고 톰 크루즈는 떠오르는 샛별과 같았는데 우리에게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자폐에 대해서 잘 보여준 영화 였고 언제 보아도 괜찮은 영화다. 그런가 하면 서번트 증후군을 다룬 영화 <모짜르트와 고래>는 서번트 증후군인 남과 여자가 평범한 삶을 꿈꾸는 영화다. 음악이나 미술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인 남자와 여자,그들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을 하고 보통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서번트 증후군',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내 아이가 자폐아라고 한다면 어떨까? 제이콥은 18개월에 중증 자폐 판정을 받았다. 성장해서도 운동화 끈도 제대로 묶지 못할 것이라 했기에 특수 교육을 받아야 했던 아이가 어느 날 평범하지 않은 공감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 들이며 부모에게 모든 문을 닫아 걸게 된다. 왜 아이가 갑자기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을까? 자식을 낳은 부모들은 장애를 가지지 않은 아이를 낳은 것만도 감사하게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는 몇 번의 거짓말을 하게 된다고 한다. 나 또한 그러했다.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 모든 부모의 눈에 자기 자식은 모두 대단하고 이뻐 보이기 때문이다.그런 제이콥이 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것일까?

 

제이콥은 18개월에 자폐 판정을 받는다. 특수 치료를 받게 되지만 그렇다고 특별나게 바뀐 것은 없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떠했을까? 아이가 자폐아라고 한다면 제이콥처럼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제이콥 부모처럼 아이를 평범한 아이처럼 키울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라면 제이콥처럼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성장해서도 천재적인 능력을 그만큼 뒷받침 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졌을까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예전에 내가 살던 곳에 젊은 엄마의 첫 딸아이가 서너살이 되도록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행동에 조금 이상을 보였다. 그러면 엄마들은 조금 늦게 되는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는데 다른 모든 것은 정상인데 얼굴 표정이 달라서 병원을 찾게 되었고 자폐 판정을 받게 되었다. 평범하던 가정은 일순간 큰 파도가 몰아친 것처럼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쳐다본다는 느낌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소식은 끊겼다.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이콥의 엄마는 제이콥이 자폐 판정을 받았다고 다르게 키우기 보다는 자신의 아이로 포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운동도 하고 함께 어린시절을 나누게 하고 싶어했고 운영하는 어린이집과 같은 시설과 자폐아들을 위한 시설에서도 내 아이처럼 아이들을 포기하기 보다는 아이가 가진 능력 캐치에 나서서 부모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아이가 사회생활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그렇다면 제이콥은?

 

운동화 끈도 묶지 못할 것이라 했던 제이콥은 특별했다. 알파벳을 거꾸로 외우기도 했고 숫자와 별자리등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던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엄마는 아이가 대화를 할 수 있도록,아이가 있는 세상에서 세상으로 그 빛을 옮겨 주었다. 언젠가 자폐아를 가진 부모들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는데 한시도 맘을 놓지 못하는 엄마들은 아이가 집에 들어 와서도 맘을 놓지 못하고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그런데 제이콥의 부모는 우리의 부모들 보다는 더 자유롭고 아이가 원하는 능력을 잘 파악한 듯 하다. 자신의 아이에게 그리 했으니 자신을 찾는 자폐아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여 우연하게 찾아갔던 천문대에서 제이콥의 능력을 알게 되었고 운동화 끈도 묶지 못할 것이라 했던 아이가 천만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에 맞는 대화 상대를 찾아 주고 싶어 하면서 갖은 노력을 한다. 동생들도 태어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거기에 루프스라는 병을 앓으면서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아들 셋을 키우고 일까지 하면서 제이콥의 자폐아 뒷바라지까지 하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지만 제이콥을 천재라고 하기 보다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크리스틴'의 아이로 크길 바랐다.

 

이 책은 제이콥의 동영상을 보게 되면서 정말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교육과 아니 내 교육방식과 크리스틴의 교육방법을 비교해 보고 싶었다. 어떻게 아이를 키웠는지,자폐아라면 대부분 엄마들이 힘들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을텐데 포기하기 보다는 천재로 '미래 노벨상 후보자'로 거듭나게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길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18개월 중증 판정을 받고 자폐아가 받아야 하는 특수교육을 받고 그저 일반인들과 섞여 일반교욱을 받을 정도로만 교육을 시켰더라면 어떠했을까?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이 가진 능력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식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욕심으로 밀어부치는 경우가 많다. 엄마가 아이가 가진 능력을 파악하지 못했더라면 아이가 말문을 열었을까? 천재라고 해도 그의 자폐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안심하기 보다는 그가 자폐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이제 제이콥은 엄마를 벗어나 모두의 제이콥이 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제이콥에게 기울였던 관심을 조금 거두어도 될 듯 하다. 이제는 모두가 제이콥을 주목하고 있다.

 

제이콥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담담하게 엮고 있는 이 책은 자폐아 교육이나 양육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보통의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한번 읽어봐야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이 책을 읽기 전에 와이즈베리의 <부모의 자격>이라는 책을 읽었다. 우리나라 교육은 오로지 대학진학을 위한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모두가 대학 그것도 명문대를 향하여 있다. 하지만 그 현실은 어떠한가? 명문대를 나왔다고 취직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명문대를 위해서 우리의 교육은 아이들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거는 기대감 욕심은 떠 어떤한가? 모든 것은 악순환처럼 모두가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교육은 무언가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어떤 연결고리가 끊어져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이 현실에서 이루지기란 참 힘든 일인듯 하다. 제이콥의 엄마인 크리스틴이 제이콥이나 그외 어린이집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읽으며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놀면서 배우고 함께 어울리면서 배운다. 천재로 키우려 한것이 아니라 크리스틴의 아이로 키우려 노력했다. 제이콥과 대화를 하기 위하여 했던 일들 속에서 그가 천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불꽃'을 품고 있다. 하지만 '불꽃'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니까. 그러니 부모는 아이가 품고 있는 '불꽃'이 빛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잘 지켜보아야 한다. '불꽃'을 확인했다면 그때부터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될 수 있도록 연료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부모를 비롯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불꽃' 모두에게는 이런 불꽃이 있다. 그 불꽃을 찾아 내어 좀더 활활 타오르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 같다.하지만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 불꽃을 찾아내기 보다는 부모가 불꽃을 만들어 주고 타오르게 해준다.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게 내버려 두기 보다는 부모의 욕심으로 모든 것을 채우려 한다.그게 우리의 교육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두가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시킨다고 내 자식도 학원이나 과외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두면서 어우러지고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제이콥의 든든한 후원자로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알파맘 베타맘이란 말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이가 가진 불꽃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한 듯 하다. 제이콥이 자폐 판정을 받고 그저 자폐아 교육을 받고 운동화 끈도 못 묶는 아이로 버려 두었다면 천채물리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제이콥은 아인슈타인보다 아이큐가 높다고 발혀졌고 미래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크리스틴이 하는 이야기를 그저 자폐아를 가진 부모의 말로 흘려 버렸다면 지금의 그가 없었을 것인데 아이지만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보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이들도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이들도 그렇고 우려보다는 그가 앞으로 꺼내 놓을 무긍무진한 능력이 더 기대된다. 나는 과연 내 아이들의 불꽃을 바로 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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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자격 - 내가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가
최효찬.이미미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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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만큼 교육열이 높은 곳이 있을까? 유치원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행해지는 모든 교육의 결과는 대학 진학,명문대 진학을 위한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 서울을 해야 어디 나가서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것처럼 사회는 간판을 위한 곳처럼 공교육은 대학진학을 위한 경쟁터로 아이들 개개인의 능력과 적성보다는 대학 진학율로 판가름 난다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모된 입장에서 나 또한 그런 욕심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대한민국의 부모라면 자신의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그 시간을 지나 딸들은 이제 대딩 2학년이 된다. 정말 말도 못할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런 시간은 누구에게 털어 놓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에 틈이 벌어지지 않고 원만하게 진행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고3병은 자식들만 겪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함께 심한 몸살을 앓는다. 그렇게 하여 대입 때만 되면 전국의 유명한 기도터는 수험생 특수라도 누리듯 장악을 하고 있는가 하면 어디 산사에 가서 백팔배라도 해야할 것만 같은 불안한 맘이 엄습한다. 고3병 이전에는 중2병으로 그야말로 사춘기와 함께 부모와 자식간의 소통이 단절되듯 하는 시간을 겨우 지났다고 생각하다 마주하게 되는 고3병은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부모도 자식들도 이 시간을 지나고 나면 너덜너덜 해진다고 할 수 있다.나 또한 딸들과 그 시간을 정말 징하게 보냈다고 볼 수 있다. 큰딸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 힘들게 재수를 결심하고 일년여 다시 뛰는 시간이 막내가 고3이었기에 두녀석과 함께 고3을 또 겪고 견디어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다시 겪고 싶지 않고 너무 그 무게를 무겁게 느꼈기에 체력적으로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시간을 보낸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듯이 자식 교육에도 정도나 정답은 없는 듯 하다. 특목고나 자사고에 간다고 모두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운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자사고나 특목고를 가도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일반고보다도 더 못한 결과를 얻게 되기도 하지만 그 현실을 겪어낸 아이들은 자괴감에 빠져 자신감을 잃기도 한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이 부모가 원하는 안정된 평생직장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고 싶어하는,자신감이 충만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서인지 부모가 끝까지 뒷바라지를 해주리라 믿는 경우도 많다. 두녀석이 대학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할 시간에 두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지금까지 순탄하게 걸어 왔던 길과는 너무도 다르기도 하지만 부모가 원하는 길이 아니기에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길로 자식들을 유도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욕심에 따르지 않기에 기대치에 못 미치는 자식들 때문에 늘 불평을 하게 되었다. 자식 욕심을 내려 놓으라고,자식은 부모의 욕심과는 다르게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시대하고 해도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는가 하면 엄마가 그만큼 열성적으로 밀어부치지 않아서하고 단정하게 되었다. 왜 꼭 그래야 하는가? 자신들 인생인데 왜 부모의 욕심으로 자식들 앞날을 길닦이 해줘야 하는가.실패도 인생이고 성공도 인생이고 모든 것은 경험이 되어 자신들 인생인데 왜 부모가 선택해 주어야 하는지.

 

자식들이 크고 나서도 우리는 늘 자식들 문제로 큰소리를 낼 때도 있고 딸들과 이야기를 하며 의견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하는 것은 없다. 그렇기도 하지만 비슷한 또래 집단의 자식들과 '비교'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도 분명 부모의 욕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안다. 자식을 믿고 기다려주기 보다는 무언가 당장 결과를 내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부모가 걸어 왔고 겪어 온 길을 걷지 않고 좀더 좋은 길을 걷게 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두 약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분명 자식들도 그 나름대로 자신들이 설계한 인생이 있고 머리가 크고 나서 부모가 간섭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모와 자식간에 틈만 더 벌어지게 한다.대한민국의 엄마들은 너무 조급하게 자식들 교육을 서둘러대는 철새들처럼 옮겨 다닌다. 아이들을 키우며 그런 영우를 너무도 많이 봐 왔다.누가 어디 좋다고 하면 쪼로륵 그곳으로 몰렸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밥먹듯 하니 아이들이 거기에 맞추기가 힘들다. 그런가하면 누가 어디 과외나 학원을 다닌가고 하면 꼭 우리도 시켜야만 하는 것 같다. 불안증,자식이나 부모가 다 겪는 불안감에 사교육은 번성하고 공교육은 믿음을 잃었다.

 

일선에서 다양한 사례를 접한 이야기들이 맘을 아프게 한다. 나와 딸들도 그런 길을 걸어 왔지만 지나고 보니 다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진다.왜 대학에 목을 매야하는지.능력이 있다면 대학이 아니어도 능력을 평가 받을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는데 학연 지연의 끈들이 내 아이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지.대학만 들어가면 다 되는것 같았는데 '청년실업'이라는 말이 또 징검다리처럼 앞에 놓인다. 정말 힘든 세상이다. 남보다 뛰어난 스펙을 쌓으려고 뛰어다녀도 막상 졸업도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이젠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자식을 제대로 키우는 것인지.그저 믿고 기다려주는 지지자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알파맘이 되어 남보다 더 뛰어 다녀야 하는 것인지 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정말 답이 없다.그렇다면 우리의 노후는 누가 보장을 해준단 말인가. 대한민국에서 부모와 학부모로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아이를 키우는 일은 때로는 즐거움이고 때로는 게릴라전이다.' 라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난다. 그렇게 살아 온 것 같은데 늘 자식들에게는 모자란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비교를 싫어하면서도 친구들 부모님이 해주시는 것들을 비교하는 것을 보면서 밑을 보고 살라고 하지만 그 또한 힘들다는 것.사회가 일등만,성공한 이만 박수 쳐주는 세상이라 그런가 밑에서 열심히 하는 나머지 사람들의 능력은 빛을 잃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책은 1장은 '대한민국은 지금 교육피로 사회' 2장은 '학부모라서 불안하다 3장은 '사춘기,이 또한 지나가리라' 4장은 ' 부모 욕심을 버려야 비로소 아이는 비로소 꿈꾼다.' 5장 명문대 아니면 어때요, 행복한 게 최고야' 6장 ' 부모의 자격:뚝심 있는 부모가 되기를' 스무살이 넘게 키우고 보니 정말 '교육피로 사회' 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어느 시가를 거쳐도 교육피로다 초등학교라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초등4학년 성적이 대학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은 대학을 위해 시간의 노예처럼 움직이지만 어떻게 해도 늘 불안 불안하다. 부모로 뚝심을 지키기 보다는 부모의 욕심이 앞서 자식 앞을 가로 막는 경우가 많아 아이들은 더 힘들게 12년의 시간을 보내지만 대학 앞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방황하는 아이들과 부모도 많다. 우리의 교육은 무언가 변화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이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은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공부를 하지 않고 맘껏 놀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놀아보지 못하고 어린시절을 보낸것이 한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공부를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흐름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압에 편승하여 자신들도 시간의 노예처럼 살아 왔다는 것이 슬프다고 한다.하고 싶은 것 맘껏 하면서 보냈더라면. 누구가 지나고 나면 후회를 하게 되는데 공부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닌데 왜 꼭 명문고 명문대에 힘을 줘야 하는지.자신들의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안다면 그 길을 좀더 격려 해주는 부모가 된다면. 그렇다고 부모 학부모의 시간이 끝난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부모의 자격도 학부모의 자격도 힘들다는 것이다.모든 것은 다 지나가게 되어 있지만 그 시간속에서는 누구가 허우적 거린다. 하지만 정답은 없다는 것,타인의 성공한 방법이 내 아이에게 적용된다고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부모의 욕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믿고 때로는 기다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것.

 

부모&학부모/ 와이즈베리/부모의 자격/최효찬 이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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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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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작품으로는 단편집인 <디어 라이프>가 처음이었으니 이작품은 두번째다.장편이 아닌 단편만 쓰는 고집스러움 속에 저자의 인생이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이 녹아 있다. 어떻게 보면 장편을 읽는 것이 더 편하고 우리는 그런 글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져서인지 단편을 읽는 것이 힘들게 아니 힘들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단편집보다는 그래서 장편이 더 인기일 것이고 단편집은 어찌보면 외면 당하는 현실에서 단편을 고집하듯 많은 인물들과 이야기 속에서 거기에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 그런가 어렵다는 꼬리표를 달게 되면서 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데 두 권을 만나면서 앨리스 먼로에 대한 생각은 읽으면 읽으수록 재밌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캐나다의 일반적인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만남과 헤어짐 상실등 우리가 삶에서 부딪힐 수 있는 문제 속에서 드러날 수 있고 녹여낼 수 있는 감정들이 솔직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먼로의 짧은 문장속에서 살아 숨쉰다. <런어웨이>는 <떠남>을 새롭게 번역하여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떠남' 칼라는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어느 날 떠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욕망에 빠져 실비아의 도움을 받아 우연히 떠나게 된다.자신들이 키우던 염소도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왜 자신은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하는 남편과 갇힌 삶을 살고 있는지. 이웃인 실비아는 그녀가 떠날 수 있게 모든 것을 도와준다.하지만 자신의 둥지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나던 버스 안에서 폐쇄공포증처럼 느끼는 현실에 대한 되새김질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남편의 품이 자신에게는 꼭 맞는 옷이란 것을 알게 되고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간다. 결국 떠나지 못하고 떠나려 시도했던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느꼈던 감정들,살면서 우린 선택의 기로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현재의 위치를 바꾸고 싶어 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운명처럼 받아 들이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떠나는 자보다 안주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떠남이란 용기 있는 자의 내일로 가는 기차표와 같은 것이다.

 

<우연> <머지않아> <침묵>은 줄리엣에 대한 이야기의 연작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고전을 공부하고 있는 줄리엣,그녀는 엄마에게 인정을 받기 보다는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께 더 인정을 받은 인물이고 남들이 가지 않는 별볼일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게 된다.그런 그녀가 우연하게 만났던 에릭이라는 남자에게 편지를 받게 되고 막연함에 그를 찾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아내는 불의의 사고로 인해 편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며 보낸 편지는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다.아니 그녀의 삶을 흔들어 놓게 되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에게 가지만 가는 날이 그의 아내 장례를 치르는 날이다. 어떻게 이런일이.그에게는 그녀 말고도 여자 친구가 있지만 그와 줄리엣은 결혼하지 않고도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게 되고 퍼낼러피라는 딸을 낳게 되고 그녀를 데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집을 찾게 되지만 결혼식을 치르지 않고 아이를 낳고 사는 자신의 삶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 들일지.그런가 하면 부모님의 삶이 새롭게 그녀의 눈에 들어 온다.

 

나이가 들거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다 보면 평범하게 보아오고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오던 것들이 다른세상 다른 시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줄리엣 역시나 아가씨 때에는 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삶을 보게 되고 자신 또한 결혼이라는 약속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아니 에릭이라는 남자가 그녀와 함께 하기 전의 문란하다 생각할 수 있는 여자관계 때문에 그와 다투게 되고 그 일로 바다에 나갔던 그가 사고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면서 그녀와 딸인 퍼낼러피의 관계는 틀어지고 만다.아니 퍼낼러피가 이유도 없이 그녀를 떠나가고 만다.왜 퍼낼러피가 엄마를 떠나야만 했을까? 성장해서 아니 자신의 무언가를 찾아서.왜 퍼낼러피는 '침묵' ㅎ야만 아니 침묵하고만 있는 것인가.엄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해서일까.자식들이 부모의 삶을 모두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뜻이 통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식은 자식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녀석들이 자신들의 삶만 고집할 때 어떻게 보면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먼로의 단편을 읽으며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삶이란 무엇이지라는 생각을 조금 더 해보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다. 단편들이 조각 조각이어져서 하나의 조각보로 완성되듯 그녀는 어떻게 보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삶이지만 장인이 이어붙힌 조각보처럼 버려지면 아무 값어치 없는 이야기들이 장인의 손에 의해 값어치 있는 조각보로 단편집으로 완성되어 한편의 아름다운 '인생'을 완성하듯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쏟아내고 있는 것 같다. 살면서 어떻게 좋은 일만 기쁜 일만 만들어 나갈 수 있나.슬픈 일도 때론 상실도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도 있고 누군가 태어나면 누군가는 떠나가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삶이나 죽음이나 같은 연장선상에 이어져 있기도 하지만 다른 얼굴도 아니다. 인생의 파도를 넘고 넘다 보면 단단해지듯 그녀의 단편들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인생이라는 그 앞에 숙연해지는 것 같다. 어느 한 편을 골라 읽어도 인생이 보이고 그 속에서 내 삶도 그리고 당신의 삶도 엿볼 수 있다. 이 단편집에는 남자 보다는 여자에 좀더 중점을 맞추었다고도 볼 수 있다. 남자로 인해 변하는 여자의 삶,혹은 여자로 인해 변하는 남자의 삶.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인생이란 어차피 혼자 가는 길이다. 먼로의 소설들은 다음에 한번 더 읽고 싶어진다. 좀더 삶의 깊이가 있을 때 단편들을 다시 읽는다면 그 깊이를 좀더 가늠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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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전쟁 -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7개월
김용원 지음 / 고려원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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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폐암 판정을 받고 부산에 계신 어머니를 파주의 둘째 아들네 집으로 모시고 오면서 시작된 어머니와의 7개월간의 동거,선물과 같은 시간들이 때로는 가족간의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분명 자식된 도리이고 누군가는 책임을져야 하는 상황이지만 큰 병이기에 많은 돈이 들고 시한부 삶이기에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삶을 지켜 본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을,그래도 마지막까지 지켜드리며 어머니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때로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과감없이 솔직하게 남겨 어떻게 보면 모두에게 선물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 책은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7개월' 더군다나 폐암 판정을 받으신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이라 더 읽고 싶었다. 저자보다 더 앞선 시간에 나 또한 친정아버지를 폐암으로 보내 드렸던 아픔이 있어 어떻게 보면 아버지를 생각하며 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친정아버지는 당신이 먼저 병원에 가셔서 검사를 해보시고,병원에 잘 가지 않는 분이신데 얼마나 아팠으면 병원에 가셨을까? 그런데 의사는 좀더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렇게 하여 자식들과 함께 종합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하게 되었는데 폐암2기,발견은 정말 더 진행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했는데 위치가 너무 좋지 않아서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것이다.다른 부위에 있었더라면 수술하여 좋은 경과를 낼 수 있는데 왜 하필 손도 댈 수 없는 부위에서 아버지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는지.그렇게 하여 검사하시는 동안 병원에서 일주일 계시게 되었는데 엄마가 함께 계셨다. 그때까지는 그리 많이 아프시지 않으신 상태라 아버지는 곧 나으리란 기대감에 더 빨리 집에 가고 싶으셨는지 모른다.그리고 한참 바쁜 일철이었으니 시골분이 일을 놓고 그냥 계시기란 정말 답답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아버지는 내게 그 시간을 선물해주시는 것처럼 여겨 아버지와 함께 일주일을 뜻 깊게 지냈다. 아버지는 막내딸 덕분에 병원생활이 지루하지 않았다고 하셨고 함께 계신 분들도 정말 좋아하셨다.

 

암선고를 받고 나니 약보다 민간요법에 더 귀가 솔깃해져서 누가 무엇이 좋다고 하면 그것을 찾아 다니게 되어 있다. 우리도 와송에 비단초 상황버섯등 암에 좋다는 것을 해드리며 조금이라도 우리 곁에서의 아버지 시간을 연장해 보려고 노력했다. 더 미리 잘해드렸어야 했는데 시한부 삶이라고 하니 아버지가 그립고 안타깝고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몇개월 정정하시더니 일년여 다 되어 가면서 급기야 아버지의 건강은 하루 아침에 쇠락,입원 후 수개월 후에 다시 명절을 보내고 입원하시게 되었다. 이런저런 검사를 받는 다는 것도 힘들지만 그래도 곁에 자식이 함께 있으니 기꺼이 받으시며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셨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안좋아지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이런저런 실수도 하시고 어린애처럼 간식 하나에도 즐거워 하시고,그런 시간들이 지금은 정말 값지게 내게 저장되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 모두가 아버지와 함께 나눈 이주일의 시간은 정말 선물과 같은 시간들이었는데 입원 후 시나브로 드시는 것이 줄어 들더니 아버지는 김장을 모두 마치고 두다리를 펴고 자려는 그 순간에 주무시며 편안히 가셨다.믿어지지 않고 내게만 슬픔이 닥친듯 했지만 그 시간도 다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이젠 그 슬픔도 퇴색해 버려서 아버지의 기억이 희미해 지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저자의 어머니는 강인한 분이셨다. 이 땅의 어머니란 이름이 모두 강인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여장부처럼 살림을 꾸려 가시면서 마지막 그 시간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시던 꼿꼿하시던 분이셨으니 당신이 그런 큰 병에 걸렸다는 것 자체를 아마도 받아 들이시기 힘드셨을 것이다.아니 꼭 일어나시리라 믿으셨을 것이다. 대부분 일을 하시던 분들은 건강하게 다시 건강을 되찾아 당신이 하시던 일을 하시리라 믿으시간다.친정 아버지 또한 그러셨다. 당신이 하시던 밭일이며 논일이며 그것 손을 놓으면 누가 할 사람이 없으신것처럼 걱정을 하셨다. 당신 안계시면 자식들 입에 들어갈 것이 없는 것처럼 노심초사 늘 걱정하셨기에 더 일어나시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셨다. 하지만 암이라는 놈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한번 물고 늘어지면 놓아주질 않으려 한다. 한사람을 그물에 걸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모두를 못살게 굴기도 한다. 친정아버지는 그래도 고생을 많이 하시지 않고 가셨다고 볼 수 있고 병원비도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은 편이다. 다른 분들에 비하면. 암환우 가족들이 겪는 고통,경제적 손실은 환자가 겪는 고통도 크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도 크다.

 

누군가는 환자 곁에서 돌봐 드려야 하고 병원비도 감당해야 하는가 하면 그에 준하는 모든 일들을 감당해나가야 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때론 고부간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고 형제간의 갈등및 가족간의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그것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닥칠 수 있는 문제이고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한번 겪고 나니 누군가의 부모님이 혹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면 이젠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큰 슬픔을 한번 겪고 나니 대처하는 힘이,좀더 단단해졌다고 할 수 있는데 막상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한 친구들은 걱정을 하며 자문을 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고 모든 것은 다 지나가게 되어 있고 슬픔은 내게 닥쳤을 때에는 커보이지만 남의 슬픔일 때에는 내게 보이지도 않을 때가 있다.그래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슬픔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겪고 나면 담담해진다.그 아픔이 아버지건 어머니건 간에 슬픔은 정말 내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 오는 것 같다.

 

단골미용실에서 머리를 하시고 당신이 사시던 부산 만덕에서의 삶을 더 연장하길 원하셨지만 어머니에겐 고향과 같아도 자식들에게는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던 그 곳의 삶이 어머니의 마침표로 인해 모두 박제화되듯 사라져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지만 어쩌지 못하고 현실에서 손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당신의 삶을 받아 들이시는 어머니의 여정을 지켜보며 그 시간들이 결코 가족의 갈등의 시간이 아니라 당신에게 선물과고 같은,7개월이 선물이라고 하는 것을 읽으며 나 또한 공감하며 아버지를 떠 올리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되새기고 싶지 않은 아픔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읽으며 난 아버지를 그리워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를 보내 드리던 그 시간들이 오버랩 되면서 눈물이 쏟아져 어느 순간 줄줄.곁에 계실 때 잘해드려야 하는데 그게 또 맘처럼 잘 되지 않는다. 늘 혼자 계시는 엄마께 잘해드려야지 하면서도 잘 안된다.마음 뿐이다.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고 되돌리고 싶고 그것이 인간의 마음인가 보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나는 그동안 잘 살았다.그 동안 행복했으니 울 필요 없다.' 라는 말씀을 읽으며 우린 아버지께 당신이 폐암이라고 직접적으로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엄마와 아버지는 대충 알고 계셨지만 아버지가 더 일찍 삶을 놓아 버리실까봐 말슴 드리지 않았는데 그게 한편으로는 후회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삶을 정리할 시간을 드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한편으로는 더 고생 안하시고 편안하게 주무시며 가신 것이 큰 복처럼 여겨지고 모두가 또 그렇게들 말씀들 하신다.아버지는 병원에 계신 동안 유언처럼 내게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그 모든 것을 잘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딸이되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당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다 가셨다고 늘 생각한다. 저자의 어머니 또한 비록 자식들과 마찰은 있었지만 그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올곧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던 강직한 분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다.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식에게 의지해야 하는 자신의 육신에 대한 원망이 아마도 자식들과 마찰로 빚어지지 않았을까.그래도 죽음 앞에서 자식들간 매듭을 풀고 가시고 누군가에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고 가셨으니.저자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좀더 친정엄마께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어디까지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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