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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처네 (반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과거는 새롭다' 유행은 돌고 돌지만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가 없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인생을 얼마 살지는 않아지만 한참 이십대 초를 보내고 있는 딸들을 바라보면 내 이십대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다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살까? 내가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까?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하며 새로운 내 인생을 선택할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그렇다고 지난 시간들이 모두가 다 후회되는 그런 시간은 아니었다고 본다.과거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밑바탕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니 실패든 성공이든 과거에 고마워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선택이란 자신이 하지 않은 부분은 누구나 후회하게 마련이다.
'누비처네' 두껍게 누비고 끈을 달아 아이들을 업을 수 있게 만든 포대기다. 누비처네라고 하니까 무얼까 하고 고개를 갸웃뚱 하게 만드는데 첫아리를 낳고 친정엄마가 전화를 하셔서 하신 말씀 중에 '애기 포대기는 사지 마라.엄마가 사줄테니까..' 그렇게 하여 엄마는 시골양반이면서도 남들 눈에 아쉽지 않게 일명 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쌈짓돈을 꺼내어 겨울용과 여름용 포대기를 사주셨다.아이를 가지고 아프기 시작한 허리 때문에 애들을 업어서 키우지는 않고 그저 옷장에 잘 보관하게 된 포대기,가끔 친정에 갈 때 가져가면 엄마가 대신 아이를 업고 동네를 한바퀴 돌곤 하셨다. 딸만 둘을 낳았는데 친정엄마는 아들을 낳으라는 뜻으로 포대기를 파란색으로 사주셨다. 딸아이에게 파란색이라 한마디 아쉬운 소리를 했더니 여름용은 핑크색으로 구매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이십여년이 지났지만 친정엄마가 사주신 포대기는 아직도 새것처럼 옷장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아마도 딸들에게 물려주지 않을까.
저자의 글은 처음 접해본다.저자의 이름도 처음이다.내겐 생소한데 두꺼운 수필집에 먼저 괜히 무게감이 전해 왔는데 한 편 한 편 읽다보니 진작에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느다. 발간사에서 '아직도 목성균을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간단하게 그를 소개한다면 수필계의 기형도라 할 것이다. 기형도가 죽을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지만 사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후배 시인들이 거의 없다고 평가되듯이, 수필계에서는 목성균이 그러하거나 그리 될 것이다.사실 외면받기야 목성균이 더했다.' 수필을 읽기 전에 작가의 약력을 읽다보니 정말 너무 늦게 너무 괜찮은 작가를 만났는데 그의 글을 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수필계의 기형도'인 목성균이라는 작가는 정말 우리가 잃어버린 감성을 그의 글에 시적 언어로 모두 담고 있듯 한 편 한 편이 정성스럽게 누빈 하나의 작품처럼 모두가 깊은 울림을 주기도 공감가는 글들이 너무 많다.
그의 글을 읽고 싶으면 어느 페이지나 펴서 읽으면 그를 만날 수 있고 우리가 잊고 있던 '과거'와 조우하게 된다. 해설에서 이야기 했듯이 '과거는 새롭다' 라는 말이 글을 읽다보면 공감이 간다. 그는 평범한 일상이나 자신의 과거 이야기들을 통해 삶을 관조하듯 깊은 시적 언어로 짧은 글들을 토해낸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무척 순종적이고 아버지를 크게 생각했던 그,하지만 그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아버지처럼 나이 들어 가면서 아버지라는 산을 넘지는 못한듯 하면서도 자신 속에 있는 갇혀 있는 아버지를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런가하면 '누비처네' 에서처럼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편지와 소액환을 보내어 명절에 내려오는 길에 첫 아이를 낳은 아내에게 누비처네를 선물하게 하는 자상함,이것이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뚝배기에 담긴 장맛처럼 진하고 은근함이 베어 있는 부정을 생각해 한다. 그 속에서 부부의 정은 더욱 깊어가고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저으이 행복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 하다.
그의 아버지는 부정情을 밖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은근하게 그리곤 한번을 표현해도 올곳게 행하신 분인듯 하다. 아들이 등잔의 심지만 키우고 있자 맑고 밝은 불빛을 위해 등잔의 심지를 갈아 주셨던 아버지,그게 아버지 방식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인생의 끄트머리에서는 아들의 수발이 해야했던,쓸모 없는 등잔처럼 쇠잔해지셨다. 세월 앞에 허망한 것이 없겠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지난 시간들의 편린을 하나 하나 이어 맞추어 조각보를 완성하듯 나도 덩달아 꺼내어 보며 미소짓게 만든다. 우리집에서 등잔을 멀리하게 되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들어 가기 전인듯 하다. 등잔불 밑에서 언니 오빠들을 따라 공부를 한답시고 옆에 앉아 책을 보다가 등잔불에 눈썹도 태우고 머리도 태우고 가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추억을 안겨 주던 등잔이 집집마다 편하게 컸다 켤 수 있는 전기가 들어오면서 친정엄마는 등잔을 모두 리어카 장수에게 팔고 말았다. 그 때에는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오래된 물건들을 리어카를 가지고 사러 다니시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 분들에게 빨래비누 몇 장에 팔아 넘긴 것들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기도 했지만 엄마에게는 그것이 어쩌면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없애고 싶은 물건이기도 했을 것이다.아니 가난보다 고난이라고 해야하나. 가끔 식구들과 둘러 앉아 그시대 그런 물건들을 헐값에 팔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말하곤 한다.지난 것에는 다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기쁜 일들 기분 좋은 일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 삶과 죽음등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들이 과감없이 그리고 시적 언어로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무언가 짧은 글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깊은 여운이 짧다고 지나치기 보다는 한번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여운을 남겨 주어 책의 두께가 주는 무게감이 아니라 글이 주는 무게감이 한참을 머물렀던 것 같다. 어릴적 우리집에도 '수탉'이 있었다. 시골에서는 닭은 닭장에 키우기 보다는 낮에는 그냥 풀어 놓고 놔먹인다.아버지는 닭을 애지중지 키우셨고 그 닭들은 아침이면 아버지의 정성에 보답하듯 따뜻한 달걀을 퐁퐁 안겨 주어서 아침이면 막내딸 밥상에 꼭 챙겨 주시곤 했다.그런데 그런 닭이 나도 물론 좋았지만 수탉이란 놈은 정말 무서웠다. 위풍당당하게 멋지게 생겨서 털의 아름다운 빛깔에 취해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는데 이 녀석이 나만 보면 멀리서부터 뒤뚱뒤뚱 하다가 날지도 못하는 녀석이 날아 오듯 내게 달려와 날 쪼곤 했다. 그래서 늘 경계를 하던 녀석,그렇게 수탉과 내 전쟁은 날마다 이어졌고 그런 딸의 모습이 마음 아프셨는지 아버지는 어느 날 아쉬움을 뒤로 하며 그녀석을 밥상에 올리고 말았다. 저자의 <수탉>을 읽으며 내 어린시절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유독 우리집에 오는 수탉마다 나를 경계했는데 왜 그랬는지.
달포 후에 뒷집 새댁은 딸을 낳았다. 물론 순산이었는데 아들과 딸의 차이가 돼지불알의 주체와 객체의 차이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아쉬움이 남았다. -돼지불알 중에서
그런가하면 <돼지불알>에서는 혼자서 낄낄 웃으며 읽었다. 어린시절 시골에서는 마을 잔치가 있으면 돼지를 잡는 마당이 정해져 있고 그 곳에서는 잔칫날에 돼지를 잡았다.돼지오줌보는 동네 아이들이 차지하고 놀이기구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도 어린시절에는 돼지잡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더욱 가깝게 느껴졌던 이야기,그런데 지엄한 시아버지의 돼지불알을 훔쳐다 아래 윗집 며느리들이 포식하듯 맛난 시간을 즐긴 것이다. 맛나기 보다는 둘 다 임산부였으니 단백질 공급원으로 돼지불알을 훔치게 되었던 것인데 시아버지의 물음에 능청스럽게 대답했지만 아들을 순산해서 안겨 드렸던,그럼에도 주체는 아들을 본인의 아내는 딸을 낳음의 서운함일까 객체로 표현된 것이 글의 표현일까.그 이야기를 읽다보니 내가 첫아이를 가지고 시집살이를 하던 시절이 생각났다.할머니까지 정정하게 계신 층층시하,출가를 하지 않은 도련님들까지 있어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과 임신으로 모든 것이 낯선 내게 옆지기는 그리 살갑게 대하거나 임산부를 위하여 먹거리를 잘 챙겨주지도 않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한번은 길가에서 파는 개구리참외가 너무 맛나 보여 사가지고 왔지만 식구수 대로 산것이 아니라 내가 먹을 양인 두어개만 사서 식구들과 나누어 먹기엔 부족하여 집 곁에 받쳐 있는 자전거에 매달아 놓고 윗층에 방이 있어 잠자러 가기 전에 가져 가리라 했던 참외가 자전거가 쓰러지며 식구들이 모두 알게 되었고 그런 맘을 이해해 주기 보다는 자신들을 챙기지 않았다는 설움에 시집살이를 더 고되게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야기는 옆지기와 가끔 꺼내서 단물을 빼먹곤 하는데 참외 이야기를 하면 미안한가보다. 분가해서 살았다면 잘 챙겨 주었을터인데 층층시하에서 시집살이를 고되게 하며 살게 하고 첫 아이에게 부족하게 해 주었다는 생각,글을 읽으며 되새김질 해 본 과거가 가슴 시리지만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소년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까.만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위를 꼭 설명해 주고 싶다. 인생이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면서 요령껏 당면을 피해 가는 것이라는 비뚤어진 생각으로 어느 길을 가고 있지나 않을까? -약속 중에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하나 하나 뜯어 놓고 보면 결코 행복한 이야기가 아닌듯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삶이고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뼛속까지 글쟁이였지만 삶은 그를 문학이 아니라 좀더 진흙탕에 빠져들게 만들었지만 산림직 국가공무원을 하며 자연과 더 가깝게 느끼고 자연을 좀더 깊게 성찰을 하며 문학의 깊이가 더 다져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육백마지기 고원의 통나무집에서 만난 늙은 심마니와 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약속>은 알퐁스 도데의 <별> 보다 더 깊은 울림이나 아름다움을 주는 이야기같다.삶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하듯 그는 아름다운 시적 언어와 탄탄한 구성력으로 깊이 있는 글을 탄생시켜 목성균이라는 커다란 나무에 무성하게 나붓끼는 잎을 만들어 내었다. 이제라도 그를 알았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내 삶이 각박하다고 느낄 때 혹은 독서를 하다가 혹은 글을 쓰다가 무언가 회의가 느껴질 때 '목성균의 수필집'을 꺼내어 읽어보면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글이 주는 힘이 참 크다는 것을 이 수필집에서 느껴본다.언제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몇 번이고 꺼내어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