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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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의 예술'인 광고,어떤 이는 광고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움직이는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는 정말 중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일 것이다.그런가 하면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광고시간에 아이들을 티비앞에 앉혀 놓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변화무쌍하게 변하는 그 짧은 시간을 아이들은 정말 좋아한다. 그런 광고에 다른 것도 아닌 '인문학'이라니.내가 제일 어려워 하는 말이 인문학이 아닐까 한다.나를 비롯하여 한때 인문이라는 분야는 잘 읽지 않는 분야였고 인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나오면 인문학은 좀더 즐거워지고 즐길수 있고 읽어 볼수 있는 분야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나 또한 그러했으니 말이다. '인문학' 하면 무척 어렵게 느껴지는데 사람에 관한 학문이라고 하면 또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일 수 있다. 사람에 관한 언어,문학,역사,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 광고에도 필요할까? 제목이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라고 해서 어려운 듯 하지만 아마 그 속에 담긴 '창의성'에 다가가려 한 의도가 아닐까.

 

주변에서 광고를 하겠다고 고집하는 청춘들이 있어 어찌보면 한발은 광고에 옮겨 놓았다고 할 수 있다.광고를 하지 않으면서 광고에 관해서 들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고 '광고'와 싸워야 하는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다른 이들이 하거나 그저 매체를 통해 보는 광고는 그런가 했지만 가까운 사람이 광고를 한다고 하면 달리 보인다. 그야말로 창의성도 뛰어나야 하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체력도 단단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광고'란 무엇일까? '세상에 널리 알림' '매체를 통해 제품에 관하여 소비자에게 알림' 그저 알리는 수준이 아니라 광고엔 '언어,문학,역사,철학' 그 모든 것이 담긴다. 저자의 광고는 그야말로 한편의 시를 보는 듯한 광고들이 많은가 하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카피들이 많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핟'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 ',카피로 시작해서 광고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두머리 격인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유명한 광고를 혼자 해결한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그룹의 순간 순간이 모여서 만들어낸 작품으로 어느 한사람의 머리에서 나온것이 아니란 것을 강조한다.

 

광고는 '소통'이다. '발신자 → 메시지 → 수신자' 가 아니라 ' 수신자 → 메시지 → 발신자' 가 되어야 소통이 온다고 그는 이야기 한다.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발신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되질 않습니다. 수신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소통이 쉬워집니다.' 역지사지가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소통이다. 통해야 주머니도 마음도 열리고 주머니도 열릴 것이다. 발신자의 마음에만 드는 광고를 만든다면 수신자,소비자에게는 외면당하는 광고가 될 것이다. 그 소통은 어디에서 올까? 창의성과 통한다고 한다. 창의성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이큐가 높아서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자신의 아이큐는 높은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예를 들어 보인다.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많은 책을 읽는다. 책 읽기는 '파도타기'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저는 책 읽기를 파도타기 같다고 말합니다. 왜 영화에서 파도 타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차게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처음 파도타기를 하면 잘 못 타니까 물만 먹겠죠. 괴로움 거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파도를 제대로  타기 시작하면 그 재미에 흠뻑 빠져버리지요.' 읽기와 쓰기는 모든 것의 기초다. 그 기초를 다지지 않고 우린 결과물만 건져 올리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 아이들은 특히나 읽기를 않한다. 스마트한 시대에 스마트폰이 넘쳐나고 인터넷이 발달했다고 해서 전자기기에 우린 뭔가 중요한 것을 빼앗겨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기본도 분명 읽기와 쓰기다. 그는 자신의 아이큐가 높아서도 아니고 읽기와 메모라고 한다. 좋은 것도 적어 놓거나 저장해 놓지 않는다면 잊어버린다. 꼭 필요할 때 꺼내어 쓸 수가 없다.

 

창의성을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세가지가 있단다. '스승과 함께 부대끼면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것,강의를 듣는 것,책을 읽는 것이다.' 타인에게서 전해 듣고 느끼고 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읽으며 구하는 것이라 한다. 쉽게 읽는 것은 쉽게 잊혀진다.하지만 스스로 찾아서 읽고 그것이 쌓이다 보면 타인이 훔져 갈 수 없는 지적재산이 자신 안에 쌓이고 그것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샘솟아 나오게 되어 있다.인터뷰이 박웅현이 말하는 창의력은 어디에서 올까? '창의력은 경탄에서 나온다. 자주 경탄할수록 더 많은 창의력이 생긴다. 그래서 박웅현은 명함 뒤쪽에 이렇게 새겨두었다고 한다. "저는 제가 나를 놀라게 만들고 싶습니다. 또 제 팀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제작진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경탄,내가 놀라고 타인이 놀라고 모두가 놀랄만한 것에서 창의력이 생긴다하니 삶에도 적용을 해봐야겠다. 밋밋한 것에서는 경탄이 있을 수 없다.

 

광고에만 소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소통이란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다. 블로그에서도 스마트폰에서도 이웃과도 가족과도 소통이 안되면 마찰음이 생기게 되어 있다.그렇다고 내 취향만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교집합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그 밑바탕에는 다른 것도 많은 노력을 거쳤겠지만 우리가 너무 쉽다고 할 수 있는 '책 읽기'라는 단순하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독서가 근간을 이른다는 말이 제일 가슴에 와 박힌다. 독서를 정말 처음 시작할 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보는 듯 하다.많은 이들이 책을 읽거나 관계한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책 추천' 일 것이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을,아니 내게 의미 있던 책을 어느 것이라 정의하지 않는다. 스스로 책과 부딪혀보게 한다. 포기를 해도 스스로 하고 끝까지 읽는 것도 스스로 하게 만든다. 어느 분야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내게 의미 있던 책이라고 추천했다고 상대에게 의미 있는 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예처럼 그의 강의 중에서 그가 찍은 광고가 다른 나라에서도 소통할까? 역으로 다른 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던 광고가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반응을 불러 일으킬까? 문화가 틀리니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것을 얼마 살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이 책을 읽고나니 리모콘을 들고 광고시간에 채널을 돌리는 것이 미안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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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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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은 절대로 먼저 읽지 마십시오.' 왜? 그러니까 더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문구다. 추리소설은 마지막에 나오는 반전이 소설을 읽으며 가졌던 긴장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은데 마지막 반전이 무엇이 숨어 있길래 그럴까? 저자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보았지만 작품 하나 하나 모두 다른 트릭과 이야기가 담겨 있어 어떤 책을 읽어도 재밌는데 요즘은 다작의 나쁜 예처럼 매너리즘에 빠진 듯 하여 쉬고 있었는데 독서를 하다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추리소설을 읽으면 다시금 독서의 열정을 다시 불사를수 있기도 하지만 저자의 신간이 나온 것을 보니 읽지 않고 쌓아 두었던 책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추리,의학,사랑 그리고 추리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인간심리도 잘 나타나 있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소설이고 저자는 그런 소설을 쓰기 위하여 고심한 듯 하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반전'에 무언가 큰 것을 숨기고 있는 듯 하다. 추리소설은 대부분은 '트릭'을 숨겨 놓고 있는데 흔한 예로 밀실트릭이나 범인을 꼭 잡아야 하는,그에 따른 형사시리즈나 자신이 만든 인물 시리즈도 있는가 하면 열린 결말로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는 경우도 있다. 이 소설 또한 범인을 잡았으나 그 범인을 누구로 봐야할지 독자의 몫인 듯 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누가 범인이고 왜 죽여야 했는지 명시를 해 놓듯 소설을 이끌어 간다.하지만 그 깊은 속엔 그만한 이유의 반전을 숨겨 놓았다. 공대출신이며 만능스포츠맨인 저자라 그런지 그의 소설에는 저자의 전공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소설에는 의학부분에 좀더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한다.

 

벽돌병원,그곳에서 유사쿠와 사나에의 운명의 끈이 시작되었다면 아키히고와 미사코 그리고 유사쿠의 운명이 다시금 벽돌병원에서 출발한다.유사쿠가 어린시절 집 근처에 있던 벽돌병원에 자주 놀러가서 만나던 여인 사나에가 어느날 추락사를 했다. 그리고 경찰인 아버지는 그녀의 무덤에 그를 데리고 가게 되고 사나에가 없는 벽돌병원,그곳에서 미사코를 만나 운명 같은 첫사랑을 하게 되지만 그들의 운명은 끈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경찰이었던 유사쿠의 아버지,뇌출혈로 쓰러저 아들인 유사쿠가 의대 시험을 보러 갈 때마다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기울어가는 가세와 아버지 때문에 의대를 포기하고 미사코도 포기하고 경찰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유사쿠,그에게 아버지는 벽돌병원에서 의문사를 한 사나에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남겨 준다. 왜 그사건은 타살인듯 했는데 누군가에 의해 덮어져야 했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아키히코와의 악연,영원한 라이벌이며 숙적처럼 여겨지던 아키히코,유사쿠는 한번도 그를 이길수가 없었다. 공부에서도 늘 아키히코가 일등이라면 모든 것에서 자신의 앞에서 가로막던 장애물과 같았던 아키히코,그들의 운명은 의대라는 대학진학까지 이어지지지만 아키히코는 합격하지만 유사쿠는 불합격으로 인생길이 나뉘게 된다. 그로부터 서로의 인생길을 가던 그들이 '스가이 마사키요'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금 운명의 끈이 연결되게 된다. 대입시험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던 두사람 카사키요의 죽음으로 인해 경찰과 피해자와 연결된 인물로 마주하다 첫사랑 미사코가 그의 아내가 된것을 알게 되고 운명의 장난에 마음아파 하는 유사쿠,하지만 살인사건의 배후에 깔린 무언가 알 수 없었던 오래전 벽돌병원의 사나에사건부터 풀어나가야 할 것만 같은 예감에 오랜 숙적의 그 원초적 원인부터 파헤쳐 나가게 된다. 자신들이 연결된 그 '끈'은 무얼까? 미사코가 무언가 좋은 운의 끈을 가지고 아키히코의 아내가 된 그 뒷배경에는 무슨 일이 숨겨져 있을까.

 

유사쿠의 아키히코도 숙적이지만 아키히코와 마사키요'도 숙적관계라 누가봐도 아키히코가 마사키요를 죽였다고 볼 수 있다. 다분히 살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살인무기도 가지고 있으며 살인후에 신발에 묻혀 온 '꽃잎' 에서도 범인이 누군지 밝혀 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오래전 UR전산은 무언가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되는 큰 사건을 안고 있다. 그것을 막아야 했던 아키히코의 운명은 그를 좀더 냉철하고 차가운 인물로 만들어낸 듯 하고 아내 미사코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만들었다. 무언가 늘 숨기고 있는듯했언 아키히코,그런 그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었던 미사코,그들의 풀리지 않을것만 같던 매듭은 어느순간 하나가 풀리면서 서서히 여러개의 매듭이 함께 풀린다.누가 만들어 놓은 운명의 장난인가? 그 운명의 장난인 매듭을 풀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UR전산의 나오아키,그의 마지막 말은 그들의 운명의 장난에 대한 마지막 뉘우침처럼 들린다. '아키히코,미안하다.잘 부탁한다.....' 운명의 아퀴를 짓지 못하고 가야했던 그의 말처럼 시작된 운명의 수레바퀴는 마사키요의 죽음에 이르러 모든 매듭을 풀게 되지만 무언가 씁쓸함이 남는다. 서로 다른 선을 달려 왔지만 무언가 닮은 듯 마주하고 있던 그들의 운명,숙적으로 시작하여 한여인을 사이에 둔 사랑까지,그들의 운명은 숙명이었던 것일까? 숙명,날 때부터 카고난 정해진 운명,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다. 벽돌병원 마당에서 만남에서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그들 곁에 있었다는 것이 무섭고도 안타깝지만 이제 자신들의 숙명을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 끝은 해비하지 않을까. 자신들의 운명을 마지막까지 알지 못하였다면 언제까지 숙적이었겠지만 그 운명을 알게 되었으니 숙명으로 바뀌게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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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인사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6
김경해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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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힘든 일이다.펑범하지 못한 경우에 아니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범하거나 그렇지 않거나로 나뉘는 그 구분선이 사람 마음을 참 힘들게 한다. 평범한 삶을 원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아이들,그들은 시설에서 살고 있고 부모가 있을수도 있고 편부모 일수도 있는데 그들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이모와 원장님인 '엄마' 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며 성년이 되면 독립을 하여 자신들의 삶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언제 부모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가출과 탈선을 더 밥먹듯이 하고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희망'이라는 태양이 있을까.

 

시설은 가정집과 비슷했으니 개발이 되어 '아파트' 식으로 바뀐 그야말로 외관이 좋아서 후원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변모를 한 곳에서 비슷한 상황의 남자 아이들이 북적북적,그러니 늘 사고가 잇따르고 사내 아이들은 담배와 술 가출 그런가 하면 한참 성장기의 아이들은 이성에도 눈을 뜨려 하고 있다. 그런 속에서 제일 맏이라 할 수 있는 태양,그는 나이만 제일 많지 모든 것은 루저수준이라 할 수 있는 미달이다. 키도 학력도 모든 것에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부족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이라고 있어야 사회에 나가 기본은 할텐데 학교울렁증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가 없거니와 그가 자주 가는 곳은 도서관이고 시설에서 5년 이상을 살았기 때문에 군대를 가지 않는단다.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이야긴지.그렇다면 군대도 면제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그야말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한가지도 가지고 있은 사람이 된다. 거기에 부모가 버리듯이 했으니 자신의 미래에 대한 태양을 구경할 수 없는데 이름은 '태양'이니 이게 무슨 아리러니란 말인가. 시설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보면 이런 아이러니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있는데 그중에 누군가 태양에게 쪽지를 보냈는데 이름이 '사랑'이다. 누굴까?

 

시설의 아이들은 비슷한 처지이지만 그들만의 규칙처럼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교육시키듯 매를 때리기도 하는데 태양은 그런 예가 싫다.그런가하면 시설안에서는 형들은 동생들이 보고 배울까봐 담배도 피지 않는다. 용돈이 생기면 동생들에게 모두 쏘는 녀석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책에 빠지는 녀석도 있고 자신의 겉모습에 치중하는 친구다 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도 어느 순간에는 시설에서 나가야 한다. 그들이 꿈꾸는 미래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에게는 이런 것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만들어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작은 임대아파트라도 얻어서 독립을 잘하려면 학교도 마쳐야 하고 취업도 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 먼 미래보다는 자신이 현재 놓이 상태를 십분 이용하며 살 듯 철없이 사는 녀석들이 많다. 태양은 그게 걱정이다. 왜 자신이 루저가 되어야 하는지.사랑이가 보내준 쪽지의 말과 사진처럼 낮에 태양빛을 모았다가 밤에 환한 빛을 빛내는 그런 태양이 되고 싶은데 자신들에게 미래는 있을지.

 

자신들도 곧 어른이 되겠지만 이렇게 부모 맘대로 사랑을 해 놓고 자신들을 시설에 버리듯 방치해 두고 사는 어른들이 정말 못마땅하다. 태양의 아버지도 십여년전에 벌써 그와 연락이 끊어졌지만 친엄마도 소식이 끊어졌다는 것이 못마땅하다. 하늘 아래 부모없이 뚝 떨어져 나온 자식들이 하나도 없을텐데 왜 어른들은 낳아 놓기만 하고 자식들을 이렇게 버려 놓고 자신들도 올바르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자신은 부모가 된다면 자식에게는 그런 삶을 살게 하지 않을 것이라 하지만 현재를 보아서는 태양빛이 자신에게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막막하다. 도서관에서 책 속에 파묻혀 있으면 좋은데 그렇다고 미래 사서가 되려 한다고 해도 현재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다. 시설을 살다 성년이 되어 독립해 직장에 다니며 애인도 있고 임대아파트도 마련하여 근처에서 살고 있는 형을 만나러 가 보았지만 그것이 결코 행복한 삶 같지는 않은,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형과 이야기를 나누고 배불리 먹고는 왔지만 그 시간이 행복하지는 않았다.왜 일까.

 

이제 무언가 자신도 서서히 '어른' 이 되려면 준비를 해야 하고 '독립'을 하려면 준비해야 하는데 학교 울렁증에 고등학교 졸업장은 멀은듯 하고 모든 면에서 사회에서 자신을 받아 줄것만 같지 않은데 무슨 방법을 찾아야할지.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그 사랑이라는 아이를 먼저 찾고 그 다음 자신의 희망을 찾아야 할 듯 하다. 태양이나 사랑이나 이름으로 봐서는 시설에 버려질 아이들이,시설에 살 아이들이 아닌것 같지만 그들은 남들보다 결코 행복하지 않고 녹록하지 않은 현실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거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이보다는 불행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늘 부족함에 채우려고 들지 비우려고 하거나 만족하는 이들은 드물다.하지만 이제 태양이는 하나씩 하나씩 벽과 부딪혀 나가려 한다. 자신앞에 있는 미래와 부딪혀 태양빛을 충전하려 한다. 시설도 집이고 함께 하는 친구들도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삶 그 속에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고 찾아 주는 친구도 있으니 말이다. 청소년들이나 부모들이 읽으면 많은 생각을 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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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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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어떤 것보다 사랑이라는 말에는 미움도 증오도 기쁨도 슬픔도 다 담겨 있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어느 것보다 사랑이 제일 실천하기 어려운 것 같다. 종교적인 아가페적인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 그런가하면 부모간의 내리사랑등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역사와 종교적 의미로 담아 낸 소설은 사랑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힘들었던 우리 역사가 담겨 있기에 더 절실하면서도 이성간의 사랑뿐 아니라 동성이지만 같은 처지의 신부 서품을 향해 나아가는 수사 동지인 미카엘과 안젤로의 이야기가 있어 더 울컥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던 사람이 아니 무척 가깝던 사람이 갑자기 죽음이란 것을 맞이하면 정말 받아 들이기도 힘들지만 어느 때보다 절대적 존재에게 물음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왜? 왜? 왜 나에게만?' 이라면 끝없는 질문을 해보지만 해답은 늘 자신안에 존재한다.

 

신부서품을 기다리고 있는 요한 수사에게 '소희'라는 인물은 한때 절대적 존재를 버리게 만들기도 했던 절절한 사랑의 이름이다. 할머니의 냉면집을 물려 받으면 걱정없이 살게 되겠지만 대학2년 갑자기 그는 신앙의 길로 접어 든다. 수도원 복도에서 걸레를 미는 외국인 토마스 수사처럼 그런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삶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보게도 되지만 그와 관련있는 미카엘이나 안젤로와의 연결선이 되기도 한다.세상의 연을 끊고 절대적 존재만을 위한 삶을 산다고 결정한 이들의 삶은 보통의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버겁고 힘겹다.힘든 시간에 그들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 인연들,소희와 미카엘을 찾아 오는 여인은 그들을 절대적 사랑에 흔들리게도 하지만 더 단단하게 담금질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빠스님의 조카였던 소희가 수도원에 오던 날부터 그는 목련꽃향기처럼 배꽃향기처럼 흔들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차에 몸을 싣듯 오락가락 한다.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의 생일까? 소희를 택하는 삶일까? 신을 선택하는 삶일까?

 

이상하다.이 지상을 떠난 사람의 자취는 그가 남긴 사물에서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된다. 죽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나는 사람이 있다. 살아 있었으면 그저 그렇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을 평범하고 시시한 한 사람의 생이 죽어서야 모든 이의 삶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

 

 

그런가하면 미카엘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불쌍한 인연이 있다. 그와 맺어진 끈을 놓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를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흔들어 놓는 여인,급기야 그녀의 도움으로 인해 어쩌면 미카엘과 안젤로가 절대적 존재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에는 불행한 선택을 하는 여인의 일방통해적 사랑도 참 불쌍하고 불행하다. 요한과 미카엘과 다른 사랑을 보여주는 안젤로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도 너무 안타깝다. 그들의 안타까운 마지막 죽음에 미카엘의 흔들리던 사랑이 서서히 잔뿌리를 내리며 더 깊숙히 자리를 잡게 되기도 하지만 그의 할머니의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까지 연결된 역사의 끈은 또 다시 그를 아가페적 사랑에 눈을 뜨게 만든다. 절대적 존재란 무엇인지.

 

어떻게 보면 그들은 선택되어진 듯 보인다. 아무에게나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는 폭넓은 아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수도자의 사랑을 실천하고 따라야 하지만 그 얽매인 틀보다는 현재의 눈에 보이는 사랑을 실천하고 도움이 되려 했던 미카엘의 사랑이 규율이나 법칙보다는 어쩌면 가난한 아이들에게 잠자리와 밥 한끼가 더 질실했는지도 모른다. 기도속에 갇힌 사랑이 아닌 현재에 꼭 필요한 사랑을 더 원했던 미카엘의 사랑과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안젤로,그 두사람의 사랑을 모두 가진 듯한 요한의 사랑.거기에 이성간의 사랑도 느껴 보았기 때문에 더 폭넓은 사랑을 가지게 된 그에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은 좀더 사랑의 시야를 넓혀 주면서 절대적 존재에 가까이 가는 '높고 푸른 사다리' 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지지 않았을까.

 

젊은 날,그것도 신부 서품을 앞두고 있던 수사 생활 기간에 이성간의 사랑을 느끼고 감당하고 그 아픔을 견디어 냈기 때문에 이성간의 사랑이 아닌 또 다른 사랑을 볼 수 있었고 택할 수 있는 요한으로 거듭났던 것 같다. 그가 아픈 몸을 이끌고 오는 소희보다는 자신으로 인해 태어나게 되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된 모자를 만나러 가길 원했던 것은 사랑도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본다. 물도 흘러야 물이고 고여 있으면 썩는다고 하지만 사랑 또한 물처럼 흘러야 제 값어치를 하는 듯 하다. 부부간의 사랑은 자식에게 내리사랑으로 이어지듯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에 확신이 확실하게 없던 요한에게 이성간의 사랑은 어쩌면 시험이었는지 모른다. 높고 푸른 사다리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그가 한번 흔들리지 않고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지에 관한 바람처럼 모진 바람과 비를 이겨내고 무지개를 향해 나아가듯 그가 품을 수 있는 사랑은 이제 잔바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 되었다.사랑이 돌아서던 순간에는 너무 힘들고 이겨내지 못할것처럼 눈물겨웠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니 모든 것은 빛이 바래 미카엘의 이야기도 별감정없이 끄집어 낼 수 있게 되기도 했지만 사랑이 한 곳에 고여있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 더 넓은 곳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민을 오래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밤잠 못 잔다고 하느님 앞에서 울부짖으면서 큰 소리로 기도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아요.그냥 내버려두세요,꽃이 피게, 새가 울게, 바람이 할랑할랑 불어가게...... 다만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하나만 믿으면 됩니다.그러면 실은 아무것도 걱정할 일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역사와 이성간의 사랑이 엮이면서 좀더 절절하게 읽어나가게 되었다.물도 도랑물일 때는 시끄럽고 소란스럽지만 강을 지나 바다에 이르면 잔잔해진다. 사랑 또한 이와 같은가 보다.요한의 젊은 날 신을 택한 순간에 소희라는 이성을 만나 여름날 폭우처럼 그 사랑에 젖어 열병을 앓았다면 이젠 가을날 잎을 떨군 나무들처럼 바람에도 비에도 잔잔해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높고 푸른 사다리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다. 할머니가 흥남부두에서 만난 커다란 배처럼 살아 남기 위해서는 삶의 사다리를 올라야만 했고 살아남기 위하여 그들이 택한 것은 바다처럼 잔잔함이었다.바다로 이르기 위하여 요한이 흔들렸던 지난함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으며 물론 이성간의 사랑보다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이 있음을,그로 인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음을.문득 책을 읽다 지난날 시인특강에서 들은 '관계가 힘들 때에는 사랑을 선택하라' 라는 말이 생각났다. 퍼내고 퍼내어도 사랑을 다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갈텐데 미움을 퍼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절대자인 위로 향하는 사랑도 중요하겠지만 아래로 향하는 사랑도 중요함을,그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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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여 바다여 2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1
아이리스 머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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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책에 길들여졌는지 <바다여 바다여1>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앞부분을 읽으면서는 무료하다고 느낄정도로 속도감이 나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읽다보니 찰스의 삶에 빠져 들며 인생을 한번 다시 반추해 봐야하지 않을까.찰스,그는 은퇴를 하여 바닷가 오두막에 머무르고 있는 은퇴한 배우이며 극작가이다.그의 사촌 제임스와 비교되던 어린시절에는 그가 이렇게 유명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군인의 삶을 선택하고 티벳의 불교에 빠진 제임스에 비해 그는 배우와 극작가 연출가라는 옷을 입게 되면서 그야말로 카사노바 깡패 제왕처럼 여자들 위에서 군림한다. 그렇기에 아직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질 못한 것인지 그는 아직까지 홀몸이다. 그런 그에게 과거의 악령과 같은 '여자'들은 이곳 한적한 바닷가 마을까지 그를 쫓아 온다.

 

그의 첫사랑이라 여겼던 클레멘트를 비롯하여 리지등 다른 남자의 여자까지 빼앗아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의 갈증을 채워주는 여자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그러다 우연히 이 한적한 바닷가에서 그의 어린시절 사랑과 우정을 다 바쳤던 여인인 '하툴리'를 만나게 되지만 어린시절 추억속의 소녀가 아닌 그녀는 이제 늙고 추레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 있는 전쟁에 참전했다 다리를 다치게 되어 절뚝이는,불구의 몸으로 무언가 사회와 하틀리에게 불만이 가득한 것만 같은 벤을 보고는 다시금 하틀리에게 '사랑'아닌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벤에게 강한 질투를 느낀다. 하툴리는 그를 버리고 달아나더니 벤과 결혼하여 아이도 낳지 못하고 타이투스를 입양하여 키우지만 벤은 그를 찰스의 아이라고 오해를 하여 그녀와 타이투스에게 못되게 군다. 그의 불만은 그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인생이 점철된것처럼 그 모든 오해가 하틀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타이투스는 한적한 바닷가 오두막으로 찰스를 찾아와 그와 함께 하게 되니 벤의 오해는 깊고 찰스의 하틀리에 대한 거짓된 사랑은 더욱 증폭되어 가기만 한다.급기야 하틀리를 유괴하여 감금까지 해 보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하틀리의 마음을 얻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강제적으로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니 자신이 하틀리에게 향하고 있는 마음은 '질투 혹은 집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질투가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들고 삐뚫어지게 만드는지 찰스의 행동은 그야말로 겁잡을 수 없다.그런 와중에 소용돌이가 있는 다리에서 누군가 그를 뒤에서 밀어 바다로 떨어지게 만들고 급기야 타이투스는 수영하다 바다에 빠져 죽게 되는 사고가 발생한다.모두가 벤이 저지른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를 밀어 빠뜨린 것은 그의 잘못된 사랑을 저지하려는 다른 이의 행동이었고 타이투스는 젊음을 빙자한 아니 오만하게군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젊음 하나로 바다를 자연을 이기려 했던 무모함이 그의 젊음을 앗아가 버렸다. 하틀리의 사랑을 잃어도 타이투스를 자신의 아들로 삶아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던 찰스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는데 급기야 사촌 제임스의 죽음까지 그를 강타하고 만다. 삶이란 무엇일까? 사랑만이 온전한 삶이라 여기며 살아온 그에게 죽음 또한 삶의 일부이며 잘못된 사랑은 사랑이 아닌 자신을 망치는 질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서야 비로소 한적한 바닷가의 자연이 눈에 그리고 마음에 들어온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과 바다에서 보기 힘들다는 바다사자 네마리까지 그야말로 행운처럼 자신에게 찾아 온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손 안에 거머쥐려고만 생각했지 관조하거나 관망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손에 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나니 이제서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우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좇는 것으로 삶을 허비해 버리는 사람도 종종 본다.모든 것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자신이 손에 쥔 막대한 것으로 자신의 삶을 망치는 일들도 종종 본다. 인생에 정답은 없겠지만 너무 과한 것은 해가 된다. 거기에 한 몫하는 '질투,집착' 또한 사람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찰스의 삶을 통해 세심한 묘사로 보여준다. 삶에서 물러나 바닷가 한적한 오두막에 거처를 마련했다면 과거도 현재도 모두 벗어 버리고 그야말로 초야에 묻혀 자연인을 삶을 살리라 생각할텐데 찰스의 삶을 온전하게 그러질 못했다.과거의 악령들은 현재의 악령이 되어 그의 삶을 온통 지배하여 더욱 질투에 불을 지르게 만들었다.그렇다고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랑이 집착을 한다고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제왕의 초라한 삶, 사랑은 일방통행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사랑만 보고 하틀리와 벤,타인의 사랑을 보지못하는 아니 타인의 삶이나 사랑을 존종해주지 못하는 자신우월주의처럼 군림하던 찰스의 뒤안길은 그야말로 누구보다 초라하다. 늙고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인생이라 생각했던 하틀리와 벤의 사랑은 그의 인생보다 따뜻하다.타인 위에서 군림하려 했던 삶,그것을 내려 놓으라고 어쩌면 사촌 제임스는 티벳의 불교와 그의 삶의 자취를 그에게 남겨 주었는지 모른다. 널리 자비를 베푸는 불교의 삶이 찰스에게는 필요했던 것을 제임스는 보았을 것이다.

 

사람은 타인의 삶은 잘 보고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기는 힘들다. 등잔 밑이 어둡듯이 찰스처럼 질투와 집착으로 가려진 삶이라면 더욱 그 그늘에 가려진 깊고 넓은 사랑을 보기는 어렵다.타이투스를 잃고 하틀리를 떠나 보내고 제임스를 또 막연하게 보내고 나서야 인생이란 것을 조금 다시 보게 된 찰스,인생은 밀물과 썰물의 조율이 있어야 비로소 담금질이 되어 단단해지고 넓게 볼 수 있는 것을 지금까지 밀물로 가득 채우기만 한 삶은 아니었을까.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욕심으로 여자로 채우려 했던 그야말로 일방통행만 했던 삶이라면 이제는 삶과 죽음의 그 경계를 경험하고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며 밀물과 썰물의 조율을 알게 된 그의 삶이 바다와 무엇이 다를까? 바닷가 오두막 그의 집에는 전주인의 삶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듯이 과거의 악령과 함께 현재까지 뒹굴며 진흙탕을 만들었던 찰스의 삶이 이젠 무언가 담금질을 시작했다. 오두막 집에서 그늘 괴롭혔던 이상한 현상들은 과거를 떨쳐내지 못한 그의 밀물과 같았다면 이젠 과거와의 조우는 현재를 관조할 수 있는 삶으로 그를 이끌어 줄 것이다. 어렵게 읽다가 재밌게 빠져 든 <바다여 바다여> 머독의 뻘에 빠져서 허우적 거린것처럼 이 책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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