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소유한 재산이 막대할수록 아내는 그만큼 더 가혹하게 예속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언제나 여자의 예속이 가장 확연한 것은 부유계급에서이다. 오늘날에도 가부장제 가족형태가 존속하는 영역은 부유한 지주계급의 가정이다. 남자는 자기가 사회적·경제적으로 강력하다고 느낄수록 더 권위적인 가장 역할을 한다. 반대로 공통의 빈곤은 부부를 평등한 관계로 만든다. (134쪽)

    

 

 

 

  

  

 

 

 

 

 

 

 

 

 

 

 

『제2의 성』의 이 단락을 풀어낸 책이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이다.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고학력자 여성들이 피지크 57 Physique 57과 소울사이클SoulCycle을 광적으로 추종하면서, 직업 대신 완벽한 몸매 가꾸기에 집중하고, 원하는 명품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아이들의 학업과 학교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행태를 실제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기록한 보고서다. 저자는 가끔 연구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녀들처럼 명품백을 얻기 위해 돈과 시간을 들이고,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파크 애비뉴 여성들의 특이한 행동의 원인을 저자 웬즈데이 마틴은 두 가지로 추정한다.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역만의 불균형한 성비 문제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이 둘인 환경에서,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또는 내가 선택한 이성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외모에 집착하고, 육아에 올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과 일치한다. 보부아르의 표현대로라면 남편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예속, 웬즈데이 마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 호모 사피엔스의 의존성. 경제적 무능력 혹은 취약성이 여성의 예속을 가능케한다는 주장이다.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비인간 영장류에 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는 밥벌이하는 자의 권위를 살 수 없다. 이를 잘 알거나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기에,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 243쪽)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곱씹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불쑥 찾아 올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지금까지 내가 (사회적 고용관계에 의한)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저질체력인 나는 직장과 가정, 회사일과 가사노동 사이를 하염없이 헤매고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아 남편과 나의 권위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겠지만, 그 차이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너무 바쁠 것이기 때문에. 이중노동의 프레임 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더 유능한 커리어우먼, 더 부지런한 워킹맘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을테다.

 

지금의 나는, 『제2의 성』을 통해 경제적 취약성이 여성의 예속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통해 남편과 나의 권위 사이의 심연 같은 차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돈을 벌어야할 텐데, 일을 찾아야 할텐데, 하고 생각한다. 『제2의 성』을,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읽고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왼쪽도 오른쪽도,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이쪽도 저쪽도, 피하고 싶은 선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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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7-08-15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성 장바구니 담고 갑니다 :-)

단발머리 2017-08-16 20:58   좋아요 1 | URL
반가운 댓글입니다. 초딩님~~
사유의 깊이와 책두께에 비해 가격은 무척 착합니다. 저와 함께 <제2의 성>의 매력에 빠져보아요~~~^^
 

 

 

 

 

 

 

 

 

 

 

 

 

 

 

 

나는 그 ‘부재하는 공통성’을 찾아내야 한다. 위치 A와 위치 B와 나 사이를 삼각측량하듯 가늠해서. 그 ‘부재하는 공통성’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 자체로 형상을 지닐까, 아니면 형상은 존재하지 않을까? 만일 후자라면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형상화해야 할까? 

간단한 일 아니겠느냐,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크지는 않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모호한 구석이 없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그리고 바로 귓전에서 들린 것 같았다. ...

 

뻔한 일 아니겠느냐, 또 누군가가 말했다. 목소리는 역시 바로 귓전에서 들렸다.

뻔한 일? 나는 나 자신을 향해 따져 물었다. 대체 뭐가 뻔한 일이란 말인가?

멘시키 씨에게는 있고 여기에는 없는 걸 찾아내면 되지 않는냐, 누군가 말했다. 변함없이 또렷한 목소리였다. 마치 무향실에서 녹음된 목소리처럼 잔향이 없다. 소리 하나하나가 명료하게 들린다. 그리고 관념을 구상화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억양이 결여되어 있다. (310쪽)

 

  

 

And so the prayer narrowed itself down to that simple entreaty – Please tell me what to do – repeated again and again. I don’t know how many times I begged. I only know that I begged like someone who was pleading for her life. And the crying went on forever. ...

    

Then I heard a voice. Please don’t be alarmed – it was not an Old Testament Hollywood Charlton Heston voice, nor was it as voice telling me I must build a baseball field in my backyard. It was merely my own voice, speaking from within my own self. But this was my voice as I had never heard it before. This was my voice, but perfectly wise, calm and compassionate.

 

The voice said: Go back to bed, Liz.

I exhaled. (18p)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나’에게 들리는 소리는 외부의 소리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나와는 다른 존재의 소리다. 모호한 구석이 없는 또렷한 소리다.

 

『Eat  Pray  Love』에서 저자가 들은 소리는 자신의 목소리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차분하고 다정한 소리다.

 

두 경우 다 혼자 있을 때, 조용할 때,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들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을 때, 온 신경을 다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을 때, 들린다.

너의 목소리 혹은 나의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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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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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서의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신간이 나온다고 다 찾아 읽지는 않는데, 이번 신간은 유독 눈길이 간다. 집 근처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모두 <대출중>인 데다가, 허용인원 초과라 읽을 날짜를 가늠할 수 없다. 기다릴 수 없어 주문했다.

 

 

“ ... 전 누구나 인생에서 그렇게 대담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포인트가 찾아오면 재빨리 그 꼬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쳐서는 안 돼요. 세상에는 그 포인트를 붙들 수 있는 사람과 붙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다 도모히코 씨는 전자였죠.”

 

대담한 전환. 그 말을 듣자 문득 <기사단장 죽이기>의 광경이 떠올랐다.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는 청년. (175쪽)

 

 

대담한 전환. 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하루키의 삶이 생각났다. 대담한 전환의 시기에 그 꼬리를 붙들고,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치지 않아 소설가가 되었다. 오늘에도 소설을 쓰는, 팔리는 소설을 쓰는, 소설 때문에 독자를 줄 세우는 그런 소설가가 됐다.

 

청소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틀고, 알라딘 샤르트르 글라스에 오미자를 한 잔 따르고, 얼음을 동동 띄우고, 군옥수수맛 꼬깔콘을 꺼낸다.

 

하루키 읽을 준비 끝.

2017 여름,의 중간쯤이라고 할 때,

현재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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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7-08-05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디 부러운 여름독서타임이로군요!^^
사르트르 글라스에 얼음 띄운 오미자차와 꼬깔콘과 하루키!
뭔가 오묘한 조화로군요.하루키키키

기사단장은 평이 반반이긴 하던데 (제 북플에 올라오는 알라디너분들 위주에요!^^) 그래도 하루키니까,읽어야지 않을까?싶어 저도 매번 도서관 가서 검색중인데 매번 퇴짜!!!!ㅜㅜ
신간이나 유명책들은 대출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구입할까?고민중인 책들이 많아요.
여튼 책 읽기에 몰입도가 가장 좋은 계절인 여름독서(물론 단발머리님처럼 쾌적한 환경이 갖춰져야겠죠?^^)
덥겠지만,응원합니다^^

단발머리 2017-08-10 21:41   좋아요 0 | URL
제일 자랑스러운건 물론 샤르트르 유리컵이구요.
(설거지할 때 너무 조심하느라 불편하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루키죠.

전, 하루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많이 읽지도 않았구요.
제가 좋아하는 건, 하루키 스타일 같아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살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쓰고 달리고 수영하고... 그런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1권을 마쳤는데, 아직까지는 ‘역시 하루키‘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도 이번에 하루키 구입하게 된 동기가 ‘허용 인원 초과‘였거든요.
동네 도서관 5군데에서 2권씩 주문해도 그러더라구요.

전 작년에 덥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요. 더위를 안 타는데도 진짜 덥더라구요.
차라리 올해는 포기 모드. 이제 여름은 계속 더우려나봐 ㅠㅠ
책읽는나무님도 무더위 잘 견디시기 바래요~~~~

쇼코 2017-08-1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저는 하루키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 책은 이상하게; 당겨서 구매했어요. 그런데 정작 사놓고 읽지는 않고 있었는데 단발머리님 발췌해 놓은 부분을 보니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저도 샤르트르 글라스가 있어요. 먼가 반갑네요. ㅎㅎ 기사단장 죽이기를 안주삼아 샤르트르 글라스에 씨언한 맥주 마시면서 하루키와 찐한 이야기 나누어 볼랍니다. ㅎㅎㅎ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단발머리 2017-08-14 17:5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쇼코님~~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니까 딱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요.
저는 <기사단장 죽이기> 1권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뭐랄까요, 역시 하루키! 하면서요.
반갑습니다. 앞으로 자주 뵈요.
쇼코님도 하루키 단상 올려주시구요.^^
 

  

 

  

  

 

 

 

 

 

 

 

 

 

 

병원에 있으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근데 다른 가족들과 있었던 일은 잘 떠오르질 않아요. 엄마도, 오빠도, 그리고 동생인 현정이도 희끄무레한 안개 속에 묻혀 있는 것만 같아요. 기억 속에서는 아빠와 저, 오직 두 사람만 도드라져요. 그때 아빠가 뭘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선물을 사왔는지 다 생생해요. 다른 가족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거야. 아마 옆에서 웃고 있었을 거야. 아마 집에 없었을 거야. 그들은 모두 ‘아마’의 영역에 속해 있어요. (14쪽)

 

 

몇 회였던가. <알쓸신잡>에서 김영하는 문학 또는 소설의 역할이 감정을 전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자신은 소설 속에 무엇인가를 숨기거나 감춰두지 않는다고 했다. 감정을 전하고 싶다고, 감정을 전하기 위해 쓴다고 말했다.

 

<오직 두 사람>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감정이라면 울분이다. 울분. 답답하고 분함 또는 그런 마음. 화자가 바보 같다고 여겨질 때도 여러 번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어린애 같을까.

 

 

내 인생은 뭐가 남았지? 아빠와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빠를 기쁘게 해주려 공부해서 아빠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아빠가 권해준 전공을 선택했고, 주말마다 시간을 같이 보냈어요. 보란 듯이 예술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되지 못해 늘 미안했고, 아빠가 친구들에게 자랑할만한 직업을 갖지 못해 언제나 부끄러웠어요. (32쪽)

 

 

아빠가 원하는 대로 노력하는 인생. 아빠의 계획대로 사는 인생. 아빠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남자 친구하고나 할 만한 일을 아빠와 하나하나 해나가는 인생. 아빠의 기분을 헤아리고, 아빠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먼저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인생. 본인이 중독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얼마만큼 보내고, 아빠를 피해 미국까지 도망쳐서야 ‘이젠 아빠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인생. 아빠와 진짜 이별한 후에야 인생의 또 다른 발걸음을 준비하는 인생. 무언가 처음으로 해 보려는 인생.

아빠와 어느 정도 선을 그어야겠다고 결심했던 날,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를 맞이하는 장면은 김애란의 단편 <건너편>의 그 장면과 꼭 같다.

    

 

『바깥은 여름』

 

 

 

 

도화가 이별을 준비할 때면 두 사람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생겼다. 이수가 새 직장의 면접을 앞두고 있거나, 도화가 승진을 하거나, 이수의 생일이거나, 누가 아픈 식이었다. 미래를 예측해 결론 내리기 좋아하는 도화는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빤히 읽혀 울적했다. 과음한 이수는 하루종일 앓을 것이다. 술과 담배 냄새로 이불을 더럽히고 땀에 전 몸으로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두통을 호소하겠지. 그러다보면 우리는 오늘도 헤어지지 못할 것이다. (94쪽)

 

 

 

 

 

『나이트』, 『Night』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이 책도 생각난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이송되었다가 간신히 살아난 엘리 위젤의 자전 소설 『나이트』다. 같이 수용소로 끌려온 엘리의 아버지는 병을 얻게 되고, 나중에는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갈증 때문에 계속 물을 찾는 아버지는 엘레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다. 시끄럽다고 독일 병사에게 맞게 될까 두려워,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엘레는 아버지의 애달픈 외침에 응답하지 않는데...

 

 

I woke up at dawn on January 29. On my father’s cot there lay another sick person. They must have taken him away before daybreak and taken him to the crematorium. Perhaps he was still breaking . . .

 

No prayers were said over his tomb. No candle lit in his memory. His last word had been my name. He had called out to me and I had not answered.

I did not weep, and it pained me that I could not weep. But I was out of tears. And deep inside me, if I could have searched the recesses of my feeble conscience, I might have found something like: Free at last! ... (112쪽)

 

 

아버지는 지옥 같은 세계에서 나를 보호해준 유일한 존재이고, 또한 현재는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힘이다. 오랫동안 의지해왔던 종교적 신념 혹은 사회적 약속 그 자체이며, 이름을 아는. 또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밀한 어떤 ‘신’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내 아버지다. 아버지와 영영 이별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


마침내, 자유다!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모는 존재 자체가 억압이다’라고 말했더니, 친구는 화를 냈다. 부모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왜 부모가 억압이냐고 했다. 친구 말이 맞다. 친구네는 부부 사이가 각별하고, 가족끼리 터놓고 이야기하고, 공부를 포함해 대부분의 일에 관해 아이들에게 강압하지 않는다. 서로 말이 잘 통하고, 서로를 좋아하는 유쾌한 분위기의 가정이다. 그러니 ‘부모는 존재 자체가 억압’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나로 말하자면, 컴퓨터 화면을 굳이 온몸으로 가리는 큰애 때문일 수도 있겠고, 학교에서의 일을 물을 때마다 “네, 아니에요~”를 연발하는 둘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아이들이 나를, 나의 존재를 억압으로 느낄 수 있다고, 그렇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람이며, 오늘 내가 넘어서야 할 사람. .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며, 그 사랑에 근거해 내게 희망을 품는 사람.

나의 장점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단점 또한 잘 알고 있는 사람.

한 때는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떨어져 있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되는 사람.

죽는 그 순간까지 나를 이기는 사람이자,

결국에는 나에게 지게 될 운명을 가진 사람.

 

 

김영하는 어떤 감정을 전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난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부모라는 억압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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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 2017-08-03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는 존재 자체가 억압이라고 생각하는 1인.ㅎㅎ 그리 억압적이지 않은 분위기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요~

단발머리 2017-08-03 23:13   좋아요 1 | URL
저의 부모님은 제게 억압적이지 않으셨어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요...
걱정은 제가 억압적인 부모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거죠.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쑥님이 계셔서 왠지 반가운 마음입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
 
제2의 성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108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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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승리는 우연도 아니고 폭력적 혁명의 결과도 아니었다. 인류의 태초부터 남성은 생물학적 특권 때문에 자기들을 지배적 주체로 확립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런 특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06쪽)

 

 

생물학적 특권 때문에 남자들은 ‘남성보다 여성’, 혹은 ‘남성과 여성’, 또는 ‘여성과 남성’의 사회가 아니라, ‘여성보다 우위에 있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확립했다. 남성 우위의 사회는 현재에도 강건하다.

 

 

거의 모든 여자들 – 85% 이상 – 은 이 기간에 장애를 나타낸다. 출혈하기 전에 혈압이 오르고 그 다음에는 내린다. 맥박수와 체온이 때때로 오르고, 열이 나는 경우도 빈번하다. 복부에 통증도 느낀다. 변비 다음에 설사가 따르는 경우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또 간장비대·요폐·단백뇨의 증세도 자주 나타난다. 많은 여자들은 후점막의 충혈(인후통)을 보이고, 어떤 여자들은 청각·시각의 장애를 호소하기도 한다. 땀이 많이 나고, 월경 초에는 ‘특유한’ 냄새를 수반하는데, 이는 아주 지독하기도 하고 월경기간 내내 지속되는 수도 있다. ... 중추신경 계통이 침해되어 자주 두통이 일어나고, 자율신경계통은 과도한 반응을 나타낸다. (56쪽)

 

 

여성은 남성과는 다르게 혹은 남성이 전혀 추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어린애를 낳을 준비를 하고, 빨간 주름의 붕괴 속에서 유산을 한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 육체의 주인이지만, 여자의 육체는 그녀 자신과 별개의 것이다.(57쪽) 암컷은 몸 전체가 모성의 노동에 적응하게 되어 있고, 모성에 지배된다. 암컷은 종의 먹이인 셈이다.(49쪽)

 

여성이 한 달에 한 번씩 임신을 위한 준비와 임신 실패의 뒤처리를 감당하게 된 것은 여성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다. 물론이다. 남성들이 바랐던 일도 아니다. 한 달 30일 중, 짧게는 5일, 길게는 7일 동안 여성이 겪게 되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은 여성의 선택이 아니다. 물론이다. 이것 역시 남성이 여성에게 짐 지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과는 다르게 ‘생리’라는 생물학적 조건 속에 처할 때, 남성에게서 일어나지 않는 일을 겪어낼 때, 이에 대한 해석은 여성에게 불리할 때가 많다. 이 일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리 중이라는 이유로 죽어가는 여자들 ··· 네팔의 끔찍한 악습> (2017/07/13, SBS 뉴스)에 의하면, 2005년부터 공식적으로 불법이 되었음에도 네팔의 많은 여성들이 <차우파디>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한다. 차우파디는 힌두교의 오랜 관습으로, 생리 중인 여성이나 산모를 부정한 존재로 여기고 이들을 격리시키는 공간을 의미한다. 격리가 되면 우유를 마실 수도 없고, 평소 같은 식사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생리 중인 여성이나 산모는 집 밖의 헛간이나 오두막에서 생활해야 한다. 야생동물, 뱀의 위협과 더위와 추위, 성폭행의 위험 속에서도 어린 소녀들, 젊은 여성들, 아이들의 엄마는 매달 생리할 때마다 헛간으로, 오두막으로 쫓겨 간다.

 

여성이 생리를 한다는 것은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남성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성장할 때 겪게 되는 여러 과정의 하나, 매우 성가시고 불편한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생리 중인 여자는 불경하다는 생각, 생리하고 있는 여자가 집 안에 있으면 불행을 가져온다는 생각들이 여자들을 이런 위험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옳지 않은 생각, 잘못된 생각들이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문화 또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학대를 정당화하고 있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받게 되는 핍박과 고통.

먼 나라에서 오늘에도 일어나는 이 안타까운 일들은,

60년 전, 시몬 드 보부아르의 통찰이 정확히 가닿는 지점이다.

암컷. 종의 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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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7-2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책도 읽으셨습니까....
존경합니다, 단발머리님.
멋져요!

그런데 네팔에 저런 악습이 있다는 거 저는 몰랐어요. 하아-
여성을 향한 저런 악습은 대체 제가 모르는 곳에 얼마나 더 많이 있는걸까요..

단발머리 2017-07-25 10:39   좋아요 0 | URL
아직 읽고 있는 중이예요. 이제 막 200쪽을 넘겼습니다^^

저도 네팔의 이런 악습에 대해서는 기사를 보고야 처음 알았어요. ㅠㅠ
우리가 아는 세상과 우리가 모르는 세상의 간극이
생각보다 크고 넓은 것 같아요.
더 알게 될수록 더 많이 깨닫게 되는 나의 무지와 나의 무심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