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소유한 재산이 막대할수록 아내는 그만큼 더 가혹하게 예속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언제나 여자의 예속이 가장 확연한 것은 부유계급에서이다. 오늘날에도 가부장제 가족형태가 존속하는 영역은 부유한 지주계급의 가정이다. 남자는 자기가 사회적·경제적으로 강력하다고 느낄수록 더 권위적인 가장 역할을 한다. 반대로 공통의 빈곤은 부부를 평등한 관계로 만든다. (134쪽)
『제2의 성』의 이 단락을 풀어낸 책이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이다.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고학력자 여성들이 피지크 57 Physique 57과 소울사이클SoulCycle을 광적으로 추종하면서, 직업 대신 완벽한 몸매 가꾸기에 집중하고, 원하는 명품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아이들의 학업과 학교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행태를 실제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기록한 보고서다. 저자는 가끔 연구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녀들처럼 명품백을 얻기 위해 돈과 시간을 들이고,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파크 애비뉴 여성들의 특이한 행동의 원인을 저자 웬즈데이 마틴은 두 가지로 추정한다.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역만의 불균형한 성비 문제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이 둘인 환경에서,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또는 내가 선택한 이성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외모에 집착하고, 육아에 올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과 일치한다. 보부아르의 표현대로라면 남편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예속, 웬즈데이 마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 호모 사피엔스의 의존성. 경제적 무능력 혹은 취약성이 여성의 예속을 가능케한다는 주장이다.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비인간 영장류에 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는 밥벌이하는 자의 권위를 살 수 없다. 이를 잘 알거나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기에,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 243쪽)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곱씹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불쑥 찾아 올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지금까지 내가 (사회적 고용관계에 의한)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저질체력인 나는 직장과 가정, 회사일과 가사노동 사이를 하염없이 헤매고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아 남편과 나의 권위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겠지만, 그 차이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너무 바쁠 것이기 때문에. 이중노동의 프레임 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더 유능한 커리어우먼, 더 부지런한 워킹맘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을테다.
지금의 나는, 『제2의 성』을 통해 경제적 취약성이 여성의 예속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통해 남편과 나의 권위 사이의 심연 같은 차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돈을 벌어야할 텐데, 일을 찾아야 할텐데, 하고 생각한다. 『제2의 성』을,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읽고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왼쪽도 오른쪽도,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이쪽도 저쪽도, 피하고 싶은 선택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