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멀고도 먼 감정적인 거리는 어려서 형성되기 시작해서 날마다 강화된다. 누구에게도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는 문화에서 자라는 것,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지내니?’하는 일상적인 인사도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어서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 말이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절대 입에 올리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고 배우는 문화 말이다. 완전히 고립된 공간에서 식량을 비롯한 자원이 점점 고갈되어가는 길고도 어두운 겨울을 지나면서, 불필요하게 서로를 죽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던 옛 바이킹 생존 전략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24쪽)
명절마다 마주치는 기사는 정해져 있는데, 고부갈등, 가사분담, 명절 증후근, 고향에서 기다리는 부모님들, 선물 상자를 들고 재촉하는 귀성행렬 그리고 귀경행렬 등이다. 최근에는 친척들로 북적이는 집을 피해 카페 혹은 호텔로 대피 아닌 대피를 하고 있는 2030에 대한 기사도 자주 보인다. ‘듣기 싫은 질문’이라는 기사도 단골인데, “사귀는 사람은 있니? 언제 결혼할거니?”, “월급은 얼마니?”, “취업은 언제 할래?”등의 질문이 듣기 싫은 질문이라고 한다. 자주 만나지 못해 공통의 화제를 찾기 어렵다 보니, 인류 공통의 화제를 찾으려 하다가, 쉽게 답을 찾기 어렵고, 금방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게 되는 듯 싶다.
아버지 삼형제는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가까이는 1분, 멀어도 15분 거리였기에 이런 중차대한 질문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어렸을 때는 사촌오빠, 언니들을 열심히 따라다녔지만, 점점 커가면서 역시나 공통의 관심사를 잃어버리고, 명절에도 친구를 만나 노는 것이 더 재미있어졌으니 언니, 오빠들과도 그렇게 멀어져 갔다. 큰댁에서의 시간들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지만,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듣기 싫은 질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6개월이 아니라, 한 달, 한 주 이내라도 새로운 소식들은 금방 업데이트 되곤 했다.
인용한 문단을 읽을 때는 묘한 감정이 몰려왔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멀고도 먼 감정적 거리를 느낀다는 것, 또한 그런 문화에 익숙해지며 성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농경사회였고, 그 원인과 결과로서 공동체 의식이 강조되었다. 산업화를 겪으며 인구 밀집이 더욱 심각해졌고, 개인의 입신은 가정의 성공, 가문의 영광으로 이해되었기에 성공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순환 고리에 묶였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의지할 수 있는 선배, 용기를 주는 직장동료를 찾아보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 것 역시 사실이다. 마지막 보루가 가정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언니가 동생에게, 오빠가 동생에게, 동생이 누나에게 의지가 되어야 한다는 혹은 될 수 있다는 기대는 각박해진 현대 사회 속에서 마지막 희망이다. 그런데, 북유럽 가정은 어떠한가. 옛 바이킹의 후손들은 어떤가. 작은 마을에 살면서도 몇 년씩 외삼촌과 이모들을 만나지 않고, 한 집에 사는 오빠들과도 며칠씩 서로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내는 문화 말이다.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는 문화. 침묵을 공기처럼 받아들이며 그에 익숙해지며 성장하는 문화.
우리는 ‘사실은 관심이 없으면서도 기왕에 만났으니 무언가 말해야’ 하기에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중차대한 결정에 대해 가볍게 묻는다. 하지만, 질문은 대답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해라, 취직해라, 결혼해라, 애낳아라, 일생일대 4대 강령을 향해 돌진하는 삶을 독려하기 위해서다.
바이킹 후손들의 문화,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의 어떠한 분쟁도 피하기 위해 형성되고 굳어진 침묵의 문화를 떠올리며, 무엇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할까 생각해 본다. 실패의 기억과 도전의 무게 사이에서 절망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언제 취직할거니?”라고 묻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며칠씩 말하지 않고, 춥고 긴 겨울의 밤들을 혼자, 완벽하게 혼자서 견디는 것이 나은가. 무엇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할까.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더 쓸쓸하게 할까.
큰조카를 집에 데려와서는 맛난 것을 하나도 해 주지 않은 못된 큰엄마의 행태를 반성하며,
토요일 아침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