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시집이라도 시작하면 다행이다. 이게 이 글의 주제문이다.
시 수업 첫 번째 시간이었던가, 자기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읽는 시간을 가졌다.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시인도 있었고, 한 두번 들어 이름이 귀에 익숙한 시인의 시도 있었다. 나는 류근 시인의 시집 『상처적 체질』에 수록되어 있는 ‘유부남’를 낭독했다.
당신이 결혼 따위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어 우리 그냥 연애만 하자, 이렇게 시작하는 시였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현재 욕망에는 충실하지만 자신의 가정은 전혀 깰 생각이 전혀 없는 이기적인 유부남이 여자에게 연애만 하자고, 서로 구속하지는 말자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여자를 꼬드기는 내용의 시다.
선생님은 ‘류근 시인은... 뭐.... “라며 이 시인이 얼마나 유명한 분인지를 표정으로 증명해 주셨고, 앞자리 맞은편의 ㅆ님은 ”ㄷ님, 이런 시 좋아해?“라고 물으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려주셨다.
그 때, 그 시간이 다시 떠오르게 된 건 오늘 아침 신문의 시집 소개란 때문이다.
‘독자 직거래 시인’ 류근, 통속의 미학을 말하다 <한겨레신문 2016. 9. 9.>
첫 시집때도, 두 번재 시집도 류근 시인은 화제의 중심인가 보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축시(祝詩)’ 부분>
왜 베스트셀러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모든 베스트셀러가 다 훌륭한 책이 아닌 건 확실한 듯 하고, 정말 좋은 책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못한 책들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처음 시작할 때는 조금 봐주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다.
좋은 책과 별로인 책, 희대의 명작과 읽지 않았어도 될 책을 판별한 만한 감식안이 있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처음에는, 처음 책 읽기를 시작할 때는 베스트셀러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책을 안 읽는, 아니 책을 못 읽을 수 밖에 없는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어떤 한 사람이, 그래도 책 한 권 읽어볼까, 하고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들어와 책을 검색할 때, 아니면 교보문고에 새로 깔린 반짝반짝 빛나는 새 책들을 훑어볼 때, 그 사람이 802쪽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나 672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를 선택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알라딘 서재에는 책을 전투적으로, 집중적으로 읽으시는 분들이 많으시니 가끔 깜빡할 때도 있지만, 근래에 출판시장이 페미니즘으로 뜨겁다는 걸, 2015년 카톡 유언비어 반박문으로 유명한 심용환 선생의 『단박에 한국사』가 출간되었다는 걸, 김중혁의 신작 『나는 농담이다』가 나왔다는 걸, 사람들은 모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달에 한 권, 아니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그런 경우라면, 어떤 사람이 어디 책 한 번 읽어볼까, 하고 시작하려할 때 접근이 쉬운 베스트셀러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집의 경우는 더한데, 책읽기의 최고봉 시 읽기, 그 중에서도 난해하다는 현대시를 보통의 독자가 처음부터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다.
그렇다면, 많이 알려진 시집부터, 근래에 화제가 된 시집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 싶다. 좋아하는 한 권의 시집이 생기고, 선호하는 시집 전문 출판사를 마음에 두고, 한 명, 한 명 새로운 시인의 시집을 읽어가다 보면, 내 영혼과 똑같이 닮은 한 명의 시인도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화제의 중심, 류근 시인의 『어떻게든 이별』를 구매해서는, 가을이라서 시집이야, 라는 식상한 멘트를 날리며 즐거운 시읽기에 돌입할 예정이다.
베스트셀러 시집이라도 시작이 어디인가.
시작은 반이고, 반이면 많이 왔다.
이제 반이 남았다.
겨우 반이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