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셰익스피어

    

나는 처음부터 셰익스피어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책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데 의미를 두었던 것 같기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소네트 몇 개를 읽었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소네트 한 개를 외웠다. 십이야를 읽었던 것 같고, 좋으실 대로였던 같기도 하고. 아무튼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훌륭하지만 너무 옛날 사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철없는 청춘. 그 때는 인생을 몰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셰익스피어는 세계 최고의 문호라는 명성을 누렸으나 그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아주 단편적이고 불확실하다.(25) 확실한 기록 중에 하나가 15821127일 발행된 결혼 증서인데, 18세의 셰익스피어는 자기보다 여덟 살 연상의 마을 자작농의 딸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26) 작가 개인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유치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관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의 극에 자주 등장하는 맹목적인 사랑이란 주제가 실제 그의 사랑과 얼마만큼 닮아있는지, 나는 그런 것이 궁금하다. 이 책이 말한다. 그런 궁금증이라면 저에게 물어봐 주세요.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책소개> 빌 브라이슨은 특유의 재치 있고, 간결하지만 강렬한 필치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삶과 근거 없는 억측과 음모설을 파헤친다. 셰익스피어는 누구이며, 그는 과연 그 작품들을 집필한 진짜 셰익스피어였을까?

 

 

 

 

 

 

셰익스피어 작품 대부분이 그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를 당대에 유행하던 연극 작품을 모아 놓은 수집가정도로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상황은 조금 복잡했다.

 

당시 연극은 대단히 인기가 있어서 극장마다 쉴 새 없이 새로운 연극이 공연됐다. 한 작품의 평균 공연 횟수는 10회가 넘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한 극단이 성공적인 작품을 공연하면 경쟁극단에서는 극작가에게 비슷한 주제의 새로운 연극을 가능한 한 빨리 제공하도록 요청했다. (46)

관객의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유행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요즘의 드라마와 비교해 보면 이해가 쉽다. 특별한 이유 때문에 금남의 장소에 들어가 남장을 하게 된 아리따운 여주인공이 직업적 성취와 멋진 남주와의 진실한 사랑을 획득한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몇 년전부터 최근까지 유행이다. 비슷한 내용, 비슷한 전개이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와 닿는 대사, 특별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박민영이, <바람의 화원>에서는 문근영이, 최근에는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김유정이 비슷한 유행극의 비슷한 역할을 맡아 자신만의 특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지 않은가. 이만하고.

  

  

 

2. 여성 혐오

 

의처증 3부작 오셀로, 겨울이야기, 심벨린에는 아내가 바람을 피워 이마에 뿔이 돋은 오쟁이 진 남편(cuckold)들이 나온다. 제일 유명한 이야기면서 비교적 최근에 읽어 기억이 또렷한 오셀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에밀리아가 말한 이 대사에서 묘사하는 속성은 곧 이아고의 의심이다. 또 장차 오셀로가 겪는 의처증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성적 상상력에 시달리는 이아고는 모든 여성이 음란하고 부정하다는 병적인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기 아내 에밀리아와 데스데모나를 포함한 베니스 여자들 대부분이 부정한 여자고 베니스는 자기와 오셀로처럼 오쟁이 진 남편 천지라고 생각한다. (185)

 

이아고는 베니스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당대의 편견도 이용한다. 그는 베니스 여성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태연히 음탕한 짓을 하지만 남편만은 속이죠.” (33201-203) 같은 대사들을 통해 음란한 기질이 베니스 여성들의 일반적인 속성인 양 말한다. (187)

아내를 의심하던 이아고는 오셀로에게도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는다. 이아고는 자신의 아내 에밀리아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의심한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며 세상 모든 여자에 대한 증오를 키워나간다. 이아고는 오셀로에게 당신도 부정한 아내를 두었으니 나와 같은 입장이다라고 말하며, 부정한 아내(로 의심받는, 실제로는 정숙한 아내)를 둔 자신들을 한없이 불운하고 억울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한 여성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전체 여성에 대한 미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거절에 대한 실망감이, 근거 없는 의심에 기반한 증오가 여성 혐오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에서, 가해자는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CCTV 분석과 정황 파악을 통해 가해자가 화장실에서 남자 6명을 그냥 내보내고 첫 번째 만난 여성을 살해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범죄 대상으로서 여성만기다렸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의 살인이 여성 혐오에 의한 것임을 추정하거나 혹은 확신할 수 있다. <경향신문, 2016520. “살인범, 남자 6명 그냥 내보내고 여자만 기다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02230005&code=940100>

자신을 무시했던 특정한 여성에 대한 미움이 여성 일반에 대한 증오로 변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아주 여러 번, 이 사건은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조현병환자의 일탈이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그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고 그것은 여성혐오. 이것이 그의 망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망상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 만약 우리 사회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고,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남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에 비해서 특별히 남자들에게 더 기분 나쁜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병을 갖고 있으며, 범죄를 저지른 그는 아마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소외감과 분노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소외감의 원인을 여성들의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찾고, 분노의 초점을 여성들에게 맞춘 것은 분명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우리 사회 내에서 최근 들어 뚜렷하게 늘어난 심리적 현상인 여성 혐오가 (만약 그에게 정신병적 망상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의 망상 속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성 혐오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망상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망상을 가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병적 증상은 맥락이 있다.       <경향신문, 2016519, 서천석 정신과 전문의

 

사랑하는 이의 배신, 변심 혹은 불륜에 대해 질투의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으로 두 사람이 묶여있을 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가히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만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할 때에는, 서로 사랑할 때에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을 내 사람이라고,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타협 없는 배타성역시 사랑의 중요한 측면이라 생각한다.

오셀로의 질투에 공감한다. 질투할 수 있다. 문제는 그의 질투, 어쩌면 사랑에 근거했을 수도 있을 그의 질투를 이아고가 비겁하게 확대시켜 가는 방식이다. 이아고는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모든 여자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데스데모나의 사랑이 필요한 오셀로에게 그녀에 대한 잘못된 허상을 심어줌으로써, 오히려 그녀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사랑을 갈구하는 오셀로에게 증오를 가르쳐줌으로 해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했던 그 여인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의심 많은 이아고, 아내를 의심하던 이아고가 했던 일이다.

 

 

3. 다시 셰익스피어

 

너무 오랫동안 돌고 돌아 이제 겨우 4대 비극. 그래도 읽어야겠다. 셰익스피어를

사느냐 죽느냐햄릿과 욕망의 화신 맥베스, 그리고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효녀로 만들어다오,리어왕을 읽어봐야겠다.

 

 

 

 

 

 

 

 

 

 

하지만, 제일 먼저 읽고 싶은 책은 리처드 3.

 

 

 

 

 

 

 

 

완숙기에 쓰인 비극들과는 달리 인물들의 성격이 변화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리처드 3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악인으로 등장하며 자신이 저지르는 온갖 만행에 대한 심리적 갈등이나 고뇌가 없다. 아직까지 셰익스피어 특유의 깊이 있는 심리적 묘사와 내면에 대한 통찰력이 발휘되지 않은 탓이다. (137)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는 이 이야기를 읽고 싶은 건, 사랑 혹은 사랑 아닌 어떤 것 때문이다. 그의 사랑이 진심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악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의 고백을 맘껏 누렸을텐데.

 

리처드    당신의 아름다움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이 나의 잠을 설치게 하고

당신의 달콤한 품에 안겨 한 시간만이라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남자를 죽여도 좋았습니다. (12125-28) (142)

 

꼭 셰익스피어여서는 아닐 테고. 어쩌면 꼭 셰익스피어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이야기다. 내가 진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이야기다. 속고, 속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사랑이야기.

만나게 되고, 눈길을 마주치고, 마주하고, 바라보며 웃고. 그리고 미소 짓는. 그렇게 사랑하는 이야기다.

그게 바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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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6-09-06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 셰익스피어 작품을 다시 쭉 읽었는데,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뭐랄까... 불편한 기분이 들고 화가 나는 부분도 꽤 많더군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여자는 부정한 짓을 언제든지 저지를 수 있는 존재랄까요. 남자는 그래 마땅하지만 여자들이 그러는 건 아주 `부정`한 일인 거죠. 거의 모든 여성 캐릭터가 수동적이라는 점도 그렇고.... 암튼 전 셰익스피어 작품을 좋아할 순 없을 것 같아요. ㅎㅎ

제가 이번에 읽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엔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악인(들)은 끝까지 악인입니다. 아니, 이 작품을 읽으면 인간 자체가 악 같아요. ㅎㅎ

단발머리 2016-09-09 11:42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이 말씀하시는게 뭔지 알것 같아요. 맞아요, 불편하기도 하고, 가끔 화도 나구요.
근데, 가끔은 저는 작품 속의 생각들이 다 셰익스피어의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도 해봐요.
그러니까, 그게 셰익스피어의 생각이나 말이라기 보다는 셰익스피어라는 거울을 통해 그 당시 사회와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때도 있거든요. 그러면 셰익스피어가 조금 덜 밉기도 하구요.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는 처음 듣는 작품이네요. 찾아봐야겠어요. 충격적인 작품이라 하시니....
더욱 궁금합니다. ㅎㅎㅎ

꿈꾸는섬 2016-09-07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셰익스피어를 읽은 게 언제적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단발머리님 글 읽으니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도 재밌을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16-09-09 11:33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리처드 3세-햄릿-맥베쓰, 이렇게 순서는 정해놓았는데... ㅎㅎ
다른 책들에 밀리지 않아야겠는데, 걱정입니다.
에이바님이 최근에 세익스피어 관련해서 완전 좋은 페이퍼를 올려주셔서요.
저는 에이바님 페이퍼 읽다가 읽고 싶은 책들이 몇 권 더 늘었어요.
영국의 작가들이 <셰익스피어 다시 쓰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하네요. 멋져라~~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고나서 그 작품들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항상 계획은 이렇게 원대한지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