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어느 토요일 아침 이제 막 옷을 다 입고 신발 끈을 매고 (이제는 다 컸다. 제 할 일은 다 할 수 있는 소년이다),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다 마치고, 이른 아침 봄날 햇빛 속에서 서 있는데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평안과 기쁨을 억누를 수 없는, 황홀한 느낌이었다. 잠시 후 당신은 혼잣말을 했다. 여섯 살보다 더 좋은 건 없어. 여섯은 될 수 있는 나이 중에서 단연코 최고의 나이야. 당신은 그 순간을 3초 전만큼이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아침으로부터 5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당신 안에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게 또렷하게, 당신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 중 그 어느 것보다도 밝게 타오르고 있다.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일으킨 것이 무엇일까? 알 수는 없지만 추측건대 자의식의 탄생과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내면의 목소리가 깨어날 때 여섯 살 무렵의 어린아이에게 일어나는 일, 생각을 하고, 스스로에게 생각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능력. 우리의 삶은 그 시점부터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죽는 날까지 끊김 없이 계속될 내러티브를 시작하는 능력을 얻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까지는 당신은 그저 존재했을 뿐이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일단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말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19-20쪽)
눈에 익은 제목과 표지 때문에 책을 뽑아 들었고 집에 돌아와서야 이 책이 폴 오스터의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소설-에세이의 순서가 좋은데, 요즘엔 자꾸 에세이-소설의 순서로 작가를 만나는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고, 에세이를 읽으면 작가가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다.
여섯 살. 자의식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이 장면이 좋아서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계속해서 19페이지와 20페이지를 오가며 읽고 있다. 생각을 하고, 스스로에게 생각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능력. 그 때가 바로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서는 때라고, 작가는 말한다. 자의식이 탄생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인식하던 때.
나 스스로는 그 때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신을 인지하는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작은 손, 작은 발, 작은 머리.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들. 엄마를 말하고, 자신이 만든 애칭으로 스스로를 부르던 시간들. 아이가 세상과 스스로를 인지하던 그 때, 나를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르던 그 시절에, 나는 좋은 엄마였을까. 나는 착한 사람이었을까.
어린이날에는 파주 지혜의 숲에 갔다.
차를 주차하고 가는 길에 길 잃은 거위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높은 천장 끝까지 가득 채워진 책들이 너무 근사했다.
넓은 탁자 아무 자리에나 앉아, 좋아하는 책을 아무거나 뽑아서는, 좋아하는 음료 아무거나를 마시면서, 아무 때까지 그냥 마냥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사진 100장을 찍겠다는 내 앞에서 아롱이가 한껏 점프를 한다. 아롱이는 나를 많이 닮아 생김새와 성격은 물론, 고기, 햄, 소시지를 좋아하는 식성까지 판박이인데, 이렇게 점프를 하면서도 코믹한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가히 나를 능가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트 속 아롱이는 참말로 어린이다.
마냥 좋은 어린이날, 하루가 그렇게 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