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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ㅣ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평점 :
지금 한국이 싫은 이유, 지금 한국을 떠나고 싶은 이유, 지금의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한국사람이라고 한다면 세 가지 혹은 네 가지의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조건에서 불리한, 기울어진 판 위에서 시작하는 20대라고 한다면, 적어도 7개 아니, 8개 정도는 댈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이 싫은 이유, 한국을 떠나고 싶은 이유를 말이다.
장강명의 소설은 『댓글부대』 이후 두 번째인데, 우리 모두를 울적하게 만드는 무거운 주제인데 반해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독자에게 쉽다고 인식되면서 빠르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역시 작가의 역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나 역시 빠르게 책장을 넘긴다.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171쪽)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국가, 나라에 대한 신뢰가 실종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는 하다. 좋은 시절, 일테면 근로자 우대 비과세 적금이율이 10%였던 때를 별 생각 없이 당연하게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더 어리둥절한 일이다. 있는 집 자식들은 군대를 가지 않는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장관 내정자들의 청문회에서 속속들이 확인하면서도 이런 게 바로 금수저-흙수저의 적용편이라는 걸 바로 믿지 못 했다. 부모의 경제력과 자녀들의 명문대 진학률 사이의 연관관계도 아무래도 그렇겠지,하고 그냥저냥 넘겨 버렸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 같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헬조선’은 떠나고 싶은 나라가 됐다.
한국이 싫어서, 라기보다는, 한국에 살 수 없어서, 한국이 살지 못하게 해서 떠나려하는, 떠날 수밖에 없는 청춘들, 한 해에 호주 이민을 신청한 젊은이들이 이만 오천명을 넘어 삼만 명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아무래도 가깝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 해에 이만 오천명. 아니, 삼만명.
『종횡무진 한국사』에서던가, 고 남경태님은 정조 이후 몇몇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왕을 좌지우지하고, 백성들은 탐욕스런 지방관들에게 끊임없이 수탈을 당하고, 더 이상의 강탈을 감당하지 못해 집을 버리고 유랑하는 백성들의 이야기, 즉 삼정의 문란과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봉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때, 이미 조선은 망한 상태였다. 나라가 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망한 상태로 100년을 갔다. 열강의 침략과 일본에 의한 국권피탈은 망한 나라 조선에게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수도 있다. 놀라운 건 조선이 일본에게 어떤 방식으로 당했다는 게 아니라, 나라가 망한 상태로 100년을 갈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망할 놈의 100년 동안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민중의 몫이다. 무식하고, 가진 게 없고, 힘이 없는 민중들에게 그 100년은 참으로 끈덕지게 길다. 물론 일본의 침략 뒤에는 더 고단한 삶이 이어진다.
밑줄은 좀 다른 문장에 긋는다. 나 역시 강남 출신이 아니고, 집도 그냥 그렇고, 그리고 여자니까, 나도 2등 시민이라는데 껄끄럽게 동의한다. 여자는 자기의 꿈을 이루려는 남자를 따라가야 하지만, 남자는 자기의 꿈을 이루려는 여자를 따라 갈 수는 없다는 걸 슬프게 확인한다. 그리고 마지막.
나도 전업주부로 살고 싶지는 않다. 원래부터 전업주부로 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그렇게 똑똑한 여자애는 아니었지만,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바보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 건 사실이다.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은 사실 좀 귀찮기는 하다. 게을러진 것 또한 사실이고, 사고의 폭 또한 좁아진 걸 느낀다.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건, 나는 참 잘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작가가 그려낸 전업주부의 그림은 나 역시 싫어하는 모습이라는 걸 일부러 밝혀둔다.
오늘의 결론은 ‘한국이 싫어서-헬조선-2등시민-페미니즘-전업주부’인가.
한국이 싫어요. 여긴 헬조선이라 2등시민인 제가 살기 힘들어요. 페미니즘이라니요. 그런 얘기 했다간 대쎈 여자라고 따돌림 당해요. 저요? 저.... 전업주부인데요.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61쪽)
실제로 걔는 좀 졸렬하게 굴었지. 사랑을 인질로 삼았어.
"너 나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면 그냥 내 옆에서 한국에 있어 주면 안 돼? 호주에 가는 게 그렇게 중요해?"
난 그 말을 이렇게 받았지.
"너도 나 사랑한다며. 나 사랑하면 날 따라서 호주에 가면 안 돼? 기자가 되는 게 그렇게 중요해?"
지명이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건 안 되겠다고 하더라. 자기는 기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이제 내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고도 했어. "호주에 가는 게 너의 꿈이구나."라고 그는 맥없이 중얼거렸어. (62-3쪽)
한국에서 살아도 그냥 전업주부로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 딱히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한국의 구직 시장이 어떤지도 몰랐어. 그래도 일은 하고 싶었어. 은혜도 그렇고 학생 때는 똑똑하던 여자애들이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바보 되는 거 많이 봤거든.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부딪치고 그러지 않으면 되게 사람이 게을러지고 사고의 폭이 좁아져.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게 되고. 난 그렇게 되기 싫었어.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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