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사진 출처 : http://anateresafernandez.com/)
1. 가르치려는 남자들 vs 받아들이는 여자들
man + explain의 합성어 mansplain은 이 단어의 탄생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저자의 설명과는 상관없이 이 책이 발표된 직후에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있으며 그녀의 독특하면서도 일반적인 일화 때문에 그녀를 이 단어의 창조자로 아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 해에 주목할 만한 책으로 꼽히는 의미 있고 훌륭한 책의 저자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그 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도 침을 튀기며 열을 올리며 그 훌륭한 책에 대해 말하는 어떤 돈 많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와 긴밀히 맞닿아 있는 채로 말이다.
어떤 남자들은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은 사실 젠더화된 현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대개 여자들은 지적했다. 여자들이 제 입으로 직접 겪는다고 말한 경험을 기각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우긴다는 점에서, 그 남자들이야말로 내가 그들이 종종 그런다고 말한 바로 그 방식으로 여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셈이라고. (27쪽)
자신이 직접 겪은 일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다고, 네 생각이 틀렸다고, 네가 오해한 거라고 말하는 남자들을 대면하는 일이 즐겁고 유쾌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이야기만 가지고도 한 권의 책이 나옴직하며, 이 책은 그에 대한 답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가 더 주목하는 건 이런 부분이다.
즉,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발언할 권리를 훨씬 많이 인정받아온 사람(17쪽)인 저자가, 이미 다양한 주제로 예닐곱권의 책을 저술해 공히 작가로서의 이력을 소유하고 있는 저자가, 공교롭게도 같은 주제에 관한 다른 책이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그 남자의 말을 믿는다는 것, 내가 그걸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13쪽) 말이다.
남자들은 네가 모르는 게 있다고 말하며, 여자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다고 믿는 것. 남자들은 여자들이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보다 더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믿으며, 여자들 또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 남자들은 가르치려 들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 말이다.
2. 폭력, 통제의 욕망
부연하자면, 총에 맞아 죽은 여성들의 3분의 2 가까이는 현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게 살해되었다. (49쪽)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 번째다. (49쪽)
여성에 대한 폭력, 광범위하고 뿌리 깊고 끔찍하지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타인, 즉 여성에 대한 ‘통제’의 욕망(45쪽)에 근거하는데,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들의 분노는 ‘통제 불가능한 격렬한 분노’가 되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사람을, 연인을, 파트너를, 아내를 살인하는 데까지 이른다. 비극은 내가 너를 통제하겠다는 생각, 너는 나의 지배 아래 있어야한다는 생각, 그것을 거부했을 때는 준엄한 심판을 내리겠다는 생각, 잘못된 이런 작은 생각에서 시작된다. 잘못된 작은 생각은 예상치 못한 환경에서 분노를 일으키며, 분노 유발자인 여성에게는 ‘응징’이 내려진다. 모든 성폭력이 이런 작은 생각에서 시작된다.
3. 고위직 남성의 성범죄, 도미니크 스트로스깐 IMF 전 총재의 경우
전지구적으로 대대적인 빈곤과 경제적 불공정을 낳은 IMF를 이끄는 특출하게 강력한 그 우두머리는 현재 뉴욕 어느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여직원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68쪽)
한국에도 미국의 고급 호텔을 배경으로 하는 이에 버금가는 일화가 있어 원치 않게도 사건의 개요 및 전개상황이 매우 쉽게 이해된다.
[5월 7일-역사 속 오늘] 윤창중 성추행, 끝나지 않은 진실게임
시사위크, 권정두 기자 2014.05.07
윤 전 대변인은 “30분가량의 술자리를 마친 뒤 숙소로 바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노크 소리가 들려 긴급 브리핑 자료를 가져다주는 줄 알고 황급히 문을 열었더니 A씨가 있었다. 그래서 ‘여기 왜왔어, 빨리 가’라고 말한 뒤 문을 닫았다”고 해명했다. A씨가 자신의 방으로 온 이유에 대해서는 전날 모닝콜을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반면 현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전해진 내용은 윤 전 대변인이 8일 새벽 A씨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었고, 새벽 6시쯤 A씨가 뒤늦게 전화를 받자 화를 내며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윤 전 대변인이 알몸 상태로 A씨를 맞았다는 것이 2차 성추행의 내용이었다.
기사 원문 (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22827)
세상에서 가장 유력한 남자중의 하나였던 고위직 남성의 범죄, 정확히는 고위직 남성의 성범죄에 대해 항거할 때, 합의를 거부할 때, 피해자는 자신의 인격을 증명해야만 한다. 피해자가 오해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말하는 가해자와 싸워야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매춘부로 중상하는 언론과도 싸워야 한다.(85쪽)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 여성이 배불뚝이 60대 노인의 알몸을 보자마자 성적 기운이 충만해져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가졌다는 가해자 측의 이야기(86쪽)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위직 남성의 성범죄에 대항할 때는 이 정도가 당연하다. 고발자, 즉 피해자에 대한 인신 공격과 언론의 무자비한 태도에 맞서기 위해서, 피해자는 자신이 받은 상처와 고통에 직면할 시간조차 없다. 그녀는 일어서서 맞서야만 한다. 세상은 가해자, 유력한 남자 편이다.
4. 빨래-널기 = 말소-되기
여기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 (Ana Teresa Fernandez)의 그림에서, 여자는 존재하는 동시에 말소되었다. (102쪽)
존재하는 동시에 말소되는 여자라는 존재는 수천년을 이어온 족보에 등장하지 않는다. 자매들, 고모들, 어머니들, 할머니들, 증조할머니들, 방대한 인구가 종이에서, 그리고 역사에서 지워진다(103쪽). 책 속의 예는 인도의 것인데, 한국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족보만 존재한다. 아무도 여자의 이름이 족보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의 비존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베일은 일종의 프라이버시의 벽이었고, 여자가 한 남자의 소유라는 표지였으며, 휴대 가능한 감금용 건축물이었다. 휴대성이 그보다 떨어지는 건축물은 여자들을 집 안에, 집안 일과 양육으로 이뤄진 가정의 영역에 가두었다. 그럼으로써 공적인 삶을 갖지 못하게 했고,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108쪽)
남자의 소유로서 인식되는 여자가 ‘발언하는 것’,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이미 거대한 도전이다. 여자는 침묵을 강요당하며, 침묵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연인이나 남편,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112쪽).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라지게 하려는 세력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이야기를 자기가 대신 말하려는 세력들과, 여자를 이야기와 족보와 인권헌장과 법률에 기록하지 않으려는 세력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단어로든 이미지로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다. 그 자체로 이미 반란이다. (112쪽)
5. 아, 공부
존경하는 필립 로스의 신작 『네메시스』에 푹 빠지지 못한데는, ‘페미니즘’의 영향이 컸다. 수많은 권장 도서들 중, 나름대로 뽑은 리스트에 따라 책을 읽고 있는데, 『행복한 페미니즘』은 다 읽었지만 어떻게 리뷰를 써야할지 모르겠고,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는 2번째 논문에서 좌절, 잠시 휴지기이다. 공부하고 계시는 애정님들의 글도 읽어야 하는데, 금방 금방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라, 두 번 이상 읽는 경우도 많고, 또 심각하게는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생각도 해봐야 한다. 책 읽는 속도가 달팽이, 거북이와 경쟁하는 수준이라, 이 모든 게 버겁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은 이 일을, ‘페미니즘’을 대해 알고 싶다,는 작은 생각 하나로, 읽고 싶은 재미있는 책들을 뒤로 하고, 난생 처음 보는 책들과 씨름하며 낑낑대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안착해서, 그 안에서 일을 하지 않고, 사회적 고용 관계에 있지 않으면서도 삶을 보장받으면서 살고 있는 내가 (그래요, 권인숙씨, 저 뒤끝 있어요. 그래도 파란 지붕 아래 어떤 분보다는 한결 나으니, 대충 이쯤에서 넘어가세요),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꿰찬다거나 특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야심찬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공부하겠다,고 줄 섰지만(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나@@) 생각만큼 잘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다. 한 가지는 확실한데, 여하튼 나는 ‘읽겠다’는 거다.
잘 정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내가 이해한 바를 정연하게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해보기로 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87쪽)
사사키 이타루가 말한 바, 이것은 나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이고,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나를 내던지는 일이다. 지금까지 내가 겪어왔던 모든 불평등에 항거하는 일이며, 아직도 폭력과 협박, 살해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혹은 한국의 어떤 여인의 침묵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읽는다.
이렇게 어설프게 시작하지만, 시작은 반이고, 반이면 많이 왔다.
시작한다. 그리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