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훅스의 책 『올 어바웃 러브』에 대한 리뷰를 읽을 때도 나는 저자가 유명한 페미니스트 학자인지 몰랐다. 인용된 문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는, 작가 이름도 모른 채 책 제목만 덜렁 외우고 있었다. 알라딘서재에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이야기가 한참일 때도 뭐, 이런 제목이 있어? 라고만 했더랜다. 하지만, 직접 추천받지 않았지만 책표지와 커피 사진으로 추천받은 『정희진처럼 읽기』를 시작하면서 발동이 걸렸고,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는 뒤를 돌아볼 수 없게 됐다.
때는 바야흐로 미국에서 동성애 결혼 합헌 결정으로 SNS가 무지개 물결이고, 모르는 사람이며 글 한 번 읽어본 적 없지만, 페미니스트라 주장하던 남자들의 ‘데이트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면서, 관련 기사가 많이 늘어났다.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기사가 눈에 띈다. 그 전에는 모르고 지나쳤을 이야기들이, 자꾸 보이고, 들리고 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기에 적기가 아닌가 싶다. 이른바 적기 교육이다. 적기 교육, 적기 공부.
사례 1. 2015년 6월 24일.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밀당 못 참는... 집착남을 조심하라"
(http://www.cbs.co.kr/radio/pgm/board.asp?pn=read&skey=&sval=&anum=18931&vnum=3638&bgrp=4&page=&bcd=007C055E&pgm=1383&mcd=BOARD2)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런데 특히 데이트 폭력은 관계집착, 질투심, 이런 것들. 그러니까 요즘 페미니스트라고 널리 알려진 사람, 진보파, 노동운동 일선에서 뛰던 사람, 이런 걸 가리지 않는 거군요?
◆ 서경현> 네, 그렇습니다. 사실은 원래 저도 그 특징을 가지고 연구를 해보았는데 사실은 가부장적인 성격, 남성이 우세하고 여성은 열등하다. 아니면 소극, 수동적이다라고 하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데이트 폭력을 더 많이 하고 여성도 만약에 그런 신념을 갖고 있으면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많은데요. 그렇지만 상대를 남성으로 여자들을 굉장히 사랑하고 사랑해야 하고 여자들을 존중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 정관용> 페미니스트들.
◆ 서경현> 의외로 욱한 성격, 네, 페미니스트가 될 가능성들도 있습니다. 물론 페미니스트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남성 중에 페미니스트는 뭐냐 하면 사실 이 데이트 폭력 가해자들 중에 여자들을 아끼려고 하는 마음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 중에서도 의외로 꽤 많습니다.
◇ 정관용> 참, 그러면 어떤 특징이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주의하시오, 이런 말도 못하겠군요?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건지, 보통의 사람들도 이해를 못 하는 건지, 그걸 잘 모르겠다. 여자들에게 잘 해주는 페미니스트가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방송에서 원했던 게 이런 식의 결론이었을까?
사례 2. 2015년 6월 30일, 한겨레신문, “연애를 허하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8225.html)
페미니스트들은 애초부터 데이트 비용은 분담하고 결혼할 때면 형편껏 함께 집을 마련하자고 제안해왔다.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연애를 허하라”는 운동이 벌어진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좀 다른 맥락에서 다시 그 슬로건을 펼칠 때가 온 것 같다. 연애는 의자 뺏기의 놀이가 아니다. 싱싱하게 연애를 하고 싶다면 나무를 올라갈 사다리를 함께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용기 있고 기품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면 삶의 기획이 가능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함께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엄마가 아닌 여성(들)과 함께 연애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나게 연애하는 것, 어려울까?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사례 3. 저번주, 지하주차장.
집으로 오는 길, 아롱이가 말한다.
“엄마, 우리 양성 평등 교육 받았어요.”
그래? (혹은 그래에?) ‘그래?’는 항상 성의 있게 해야 한다. 두 음절, 내지 세 음절로 동의와 경청의 의미를 바르게 전달할 수 있다. 그래? 뭐를 교육받았는데?
“남자와 여자가 살아가면서 조금씩 불편할 수 있다고.”
음, 그래? 정색하지 않고, 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근데, **아, 남자보다는 여자가 불편한게 더 많아. 아롱이 급정색.
“아니에요, 엄마! 남자들도 불편한 거 되게 많아요.” 뭐가 불편한대?
“데이트 할 때, 돈도 내야 되고, 또... ” 음, 그래. 그렇지. 근데, 요즘에는 여자들도 많이 내.
“아니에요. 남자도 불편한 거 많아요. 돈도 내야 되고.”
아롱이는 집에 오면서 남자가 돈을 내야 된다는 이야기를 1번 더해서 총 3번을 했다. 아롱이는 국어를 아주 잘 하지는 않지만, 보통 10살의 남자아이들보다는 이해력과 공감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내용으로, 어떤 방식으로 양성 평등을 교육했는지는 모르겠지만, 10살 보통 수준 이상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애에게 데이트할 때 돈을 남자가 내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나 보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는 두 번째 논문부터 읽기 어려워, 피하는 심정으로 (아무개님, 보고 계세요? T.T)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고 있다. 쉽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기본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그게 쉽다는 이야기인가?
계급에 상관없이 집에 있으면서 주부의 일만 하는 여성은 고립감과 고독감, 침울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118쪽)
주부의 일만 하는 여성? 뭐야, 지금 내 얘기하는 거야?
여자는 남자와 아이들이 없을 때에만 가정에서 긴장을 풀 수 있었다. (119쪽)
어떻게 알았어?
가정 안에서 여자가 자신의 모든 시간을 다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에 쓸 때, 가정은 그녀에게 긴장을 풀고 쉬면서 기쁨을 얻는 장소가 아니라 일터이다. (119쪽)
내 말이 그 말이예요.
놀라운 책이군. 작가 이름을 기억해야겠어.
『행복한 페미니즘』, 벨 훅스.
2002년에 발간된 책을 앞에 두고, 이렇게 혼자 놀고 있다.
1인 2역. 주거니 받거니. 적기교육. 적기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