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열풍은 말 그대로 '열풍'이다.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아니, 어쩌면 한국에서 더 많이 하루키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를 무시하려 하고, 그러면서도 하루키에 대한 관심을 숨길 수 없는 것 같다. 책판매가 시작되는 평일 오전에 대형서점에 사람들을 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작가는 '하루키'라고 한다. 신문 속 사진으로 끝없이 늘어선 줄들을 볼 때, 다시 한 번 하루키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나는 하루키의 책을 한 권만 (끝까지) 읽어봤기에, 하루키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루키의 책을 안 읽고 지나가기는 좀 뭣 해서, 도서관에 책을 예약하고 내 순서를 기다렸다. 

고등학교 1학년, 아니 2학년 때, 숨막히는 입시 공부에 (공부 열심히 안 했는데, '숨막히는 입시'라고 쓸려니, 부끄러워 숨이 막힌다.) 여념이 없던 시절, 친구 집 책장에 꽂힌 '상실의 시대'는 말 그대로 눈길을 끌었다. '숨막히는 입시 제도 하'에서 나의 자랑스러운 '전교 1등' 친구가 사실 집에서는 한가로이 유명 일본 작가의 '책'을 읽고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나중에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을 때, 나는 소설 속 '나'를 좋아하게 됐는데, 그의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 생활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 후에 <해변의 카프카>인지 <태엽감는 새>인지에 도전했다가 '성적인 장면'을 넘어가지 못 하고, 읽기를 그만두었다. 몇 년 전, <1Q84>도 '여자 동성애자 사이의 육체적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막혀 버려 읽기를 포기했다.  

그러고 보니, '하루키 포기'의 대부분은 '성적인 장면' 때문이다. 나는 왜 이렇게 이 부분을 싫어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이 부분을 불편해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이 부분을 읽기 어려워 하는 걸까. 좀 더 정곡을 찔러 표현하자면, 나는 왜 이렇게 이 부분에 집착하는 걸까. 

20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가히 '폭발적 문화 쇼크'를 안겨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성적인 부분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가히 압권이어서, 나는 지하철에서 여러 번 책을 강제로(?) 덮어야만 했다. 김훈의 <칼의 노래>도 그랬다. 길지 않은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 몇 장이 그렇게도 힘들고 불편했다. 나는 그 부분이 '남성 작가'에 의해, '남자'의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달리 생각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이후에 박경리의 <토지>를 읽게 되었을 때, 이런 내 예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 어떤 부분도 너무 적나라하지도, 너무 과장되지도, 그렇다고 미화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덤덤했다. 하지만, 홍명희의 <혼불>은 내 예상이 틀렸다고 말해주었다. 소설 속 '희대의 사건'일 수 밖에 없어 사실적 묘사가 필요했던 장면임에도, '생략'에 가깝도록 간단히 그 부분을 넘어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다시 드는 한 가지 의문은, 나는 왜 이렇게 이 부분에 집착하는 걸까.

벙커 라디오1에서 '무려 철학박사 강신주의 특강'이 있다. 한 달에 한 두번, 대학로에 위치한 벙커 커피숍에서 이루어지는데, 강의 내용이 책으로도 묶여 나왔다. 


 



 

 

 

 

 

 

 

 

 

 

 

 

주로 앞부분은 각 주제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뒷부분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강신주 박사의 대답이다. 보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들까지도 솔직히 질문하는 경우가 많고, 강신주 박사의 대답도 거의 대부분 돌직구이다. 나는 전체는 아니고 일부를 유튜브를 통해 들었는데, '이 죽일 놈의 사랑'이던가, '몸'에 대한 강의에선가 강신주 박사가 한 고등학생을 언급하는 걸 듣게 됐다. 

그 고등학생은 남자 고등학생인데, 모든 것을 '성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보는' 아이였다. 정확히는 그 모임에서 그 고등학생을 지칭하는 말이, '여성을 볼 때, 가능한 성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보려고 노력하는 고등학생'이었다. 강의를 듣는 사람 대부분은 여성, 그 중에서도 미혼 여성이 대다수이고, 강신주 박사가 강의 중에 그 고등학생을 찾을 때, 웃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물론, 그 고등학생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투의 웃음 소리가 아니었다. 

남자라는 생물학적 성을 가지고 있는 혈기왕성한 나이의 남자 고등학생이,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을 볼 때, 가능한 '성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이유에서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런 시도를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귀엽고 가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도 알고, 그 고등학생도 알고 있듯이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성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사람을 보다니. 남자를, 여자를. 여자를, 남자를.

이건 내 소설 읽기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소설을 읽을 때, '성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성적인 요소'을 배제하며 읽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소설 속에서 '성적인 요소'를 배제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하루키를 읽어보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다자키 쓰쿠루는 인생을 순조롭게 별문제 없이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명문 공대를 졸업하고 전철 회사에 취직하여 전문직으로 일한다. 능력에 대해 회사에서는 안정적으로 평가한다. 상사에게도 신뢰받는다. 경제적으로도 불안하지 않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꽤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도심에 가까운 편리하고 좋은 주택지에 원룸 아파트를 가졌다. 대출도 없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돈이 드는 취미도 없다. (275쪽) 

아무것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사람 다자키 쓰쿠루. 그는 색채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개성이 없는 사람이다. 쓰쿠루는 스스로를 그렇게 보았다. 나는 개성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색채가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그건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색채가 없고, 개성이 없는 듯한 쓰쿠루는 인간 생활에서 또는 현대 생활에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 대부분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필요도,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닐까. 이건 16년만에 핀란드에서 만난 구로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넌 다정하고 쿨하고 조용하고, 그 때부터 자기 삶의 방식을 가졌어. 그리고 잘 생기기도 했고." (371쪽) 

다섯 명의 친구 모두 대도시 교외의 '중상류'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그 중에서도 쓰쿠루의 집이 제일 유복했다.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경제적인 압박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정하고, 쿨하고, 조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갖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친구로 두고 싶어하는 사람의 품성이다. 게다가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의 몇 마디에 훅하는 철없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가능한 어느 정도 성숙했다고 느껴지는 모습을 십대 시절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잘 생기기'까지 했다.

 
나는 남자가 아니고, 그리고 '예쁜' 여자도 아니기에, 솔직히 '잘 생겼다'는 그 특별한 혜택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처지는 못 되지만, 굳히 사회학 책을 열고 닫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잘 생겼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인생은 참 편안하게, 흘러간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몇 살의 나이로 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잘 생겼다'는 것, 그것은 그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대부분, 플러스로 작용한다. 

부잣집의 다정하고, 쿨하고, 조용한 성격의 남자 고등학생이라니.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돈이 드는 취미도 없는 성인 남자로 성장한 것이 당연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의 '타락하지 않음'이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부족함 없이 누리며 살았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괴로워한 경험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말로 원하는 것을 고생해서 손에 넣는 기쁨을 맛본 적도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없었다. ... 사라는 드물게 그가 갈구하는 존재 가운데 하나이다. ... 그리고 지금 와서는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여러 가지를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강렬하고 생생한 감정을 품는다는 건 그에게 드문 일이었다. (276쪽) 

그런 쓰쿠루가 진심으로 갈구하는 대상이 나타난다. 사려깊은 사라는 쓰쿠루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애쓴다. 다자키는 그녀의 마음에 감동한다.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을 좋아한다.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진심으로 당신을 원해." 쓰쿠루는 그 말을 반복했다. 
"그게 새벽 4시에 나한테 전화해서 전하고 싶은 말인거네?"
"응."
"술 마셨어?"
"아니, 맨 정신이야." 
"그렇구나. 이공계 사람치고는 아주 열정적이네." (406쪽)
 
내겐 '아니면 말고'의 철학으로 기억되는 하루키가 이렇게 말해서, 새벽 4시에 전화해서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진심으로 당신을 원해.'라고 말해서 나는 좀 놀랐다. (아니면 말고~) 

물론, 이게 내가 원하는 바다. 실제로 하루키가 어쩐지는 잘 모르겠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난 쓰쿠루가 사라에게 전화하기를 바랬다. 좀 더 적극적이기를 바랬다. 좀 더 열정적이기를 바랬다. 그리고, 저 문장을 읽게 됐을 때, 내심 기뻤다. 난 사라가 아닌데. (사라는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시간이 새벽 4시여서라고 생각하고 싶다.) 

순례의 해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 쓰쿠루,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를 알게 된 쓰쿠루, 자신에게 매정했던 친구들을 용서한 쓰쿠루, 상처를 직시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쓰쿠루 옆에, 사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는 둘의 결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 놓고 푹 자."라는 그녀의 말에서 행복한 결말을 상상해 본다. 한 번쯤은, 적어도 인생에 한 번쯤은, 쓰쿠루가 간절히 원했던 것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하루키의 다른 책도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적인 요소'에 집착하지도, '성적인 요소'를 배제하지도 않는 독서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것 같다. 일단 <빨간 책방>에서 내 진정 사랑하는~ 김중혁 작가가 제일 좋아한다는 하루키의 단편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 도전해 봐야겠다. 읽을 책은 많고, 시간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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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9-3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단발머리님 글 디게 잘써요! 읽기 시작하면서 한번에 좌르륵 읽히네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저는 무척 좋아했는데, 그 책을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야하다' 라고 얘기하는 걸 많이 들었어요. 자위에 대한것까지 언급할 필요가 있나, 하는 얘기들을 하더라고요. 그럴때마다 저는 대꾸했죠. '늬들은 친구들하고 야한얘기 얼마든지 하지 않냐,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진 않다해도 친한 친구들과는 얼마든지 야하고 변태같은 얘기들을 주고받을텐데, 그렇게 주고받는 둘사이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소설로 옮겨놓은 것 뿐이다. 하루키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야한게 아니다' 라고 말이지요.

가장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하루키에게 푹 빠진게 그의 단편 [일곱번째 남자] 때문이었어요. 『렉싱턴의 유령』이란 단편집에 실린 단편인데 그 단편을 읽는데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건지, 주인공의 감정 변화가 너무 잘 느껴지는거에요. 소설과 제가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그 때부터 하루키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었죠.

단발머리님이 앞으로 읽게 되실 하루키가 궁금해요. 아, 저는 [댄스 댄스 댄스]도 엄청 좋아하는데!!

단발머리 2013-09-30 13:15   좋아요 0 | URL
아하리요~ 다락방님께 칭찬들으니, 점심 안 먹었는데, 완전 배부른데요.

다락방님은 하루키 책을 많이 읽으셨군요. 저는 그 놈의 '성적인 요소'가 많이 걸려서, 여러번 포기했더랬죠. 그러게요, 진짜 친한 친구들하고는 야한 애기 많이 하지요. 사실, 제 친구들, 약간 순~한 구석이 많은데도, 야한 얘기가 솔솔솔 나온대죠. 제일 신나서 이야기하는 애가 말하길, "엄마한테 물어볼 수가 없어. 너희들한테밖에."

다락방님 말씀이 맞는거 같아요. 하루키가 특별히 더 야한건 아니지요. 제가 그 고등학생처럼, 자꾸 '성적인 요소'를 배제하고서 소설을 읽으려고 하니까, 부담스럽고, 불편하고, ㅋㅎㅎ 하는 거겠죠.

하루키 단편 <일곱번째 남자>는 처음 들어봐요. (전, 뭐든 처음이네요.^^) 요 위에,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다음에 <렉싱턴의 유령>을 찜~~해야겠어요. 그 다음은 <댄스 댄스 댄스>

다락방님은 하루키에, 빅토르 위고에, 이응준에, 이승우에, 토머스 H. 쿡에, 그 뭐죠, 싱가폴에서 사왔던 원서, 줌파 라히리에, 종횡무진하시느라, 점심 드실 시간이라도 있으시겠어요?

얼른 점심 드세요~ 저는 추석 때 남은 송편 찌고 있어요. 밥 차리기 싫어서.............

도갤러67 2013-09-3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루키 책 망하지 않았나요? 열풍이라고 하기에는.. 인터공원에서 1만원 적립금 줘도 하루 1위하고 말던걸요. 그 비싼 선인세에 이 정도라면.. 이제는 왜 하루키가 안 통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