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는 개츠비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왜 개츠비가 위대한지를 알아야 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두 번 읽은 것 같은데, 어느 출판사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 번은 『상실의 시대』를 읽은 직후였고, 또 한 번은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닐텐데, 아무튼 나는 그 책을 읽고, 주인공의 이름, ‘개츠비’만을 덜렁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보려 했지만, 시간차 공격이 워낙 빈번한 까닭에 영화를 먼저 봤다.

커다란 스크린 화면 가득,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개츠비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레오나르도는 <타이타닉>, <로미오와 줄리엣>때처럼 싱그럽지는 않았지만, 원숙한 남성미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개츠비에 딱 어울리는 캐스팅이라 생각한다. 데이지를 연기한 캐리 멀리건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개츠비의 지독한 사랑에 호응할 만큼, 여신같은 미모를 보여주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쳤다.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민음사판을 4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해 두었는데,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했다는 문학동네판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는 민음사판도 문학동네판도 5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팔아도 되나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사람은 없었고, 나는 김영하 번역의 문학동네판도 구매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해설>에서 이 책의 번역을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했다.

이 소설은 '선량한' 독자를 절망에 빠뜨리는, 플롯도 캐릭터도 없는 오리무중의 문예소설도 아니고, 정처없이 이름 모를 도시를 떠도는 주인공의 상념을 하염없이 좇는 관념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은 능란하게 짜여진 플롯에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대결하는 흥미진진한 로맨스다. ... 『위대한 개츠비』가 '졸라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원고(대형서점에서 『위대한 개츠비』가 '졸라 재미없다'는 대화를 나누었던 두 고등학생)의 논고에 항변하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원고인 고등학생 독자의 악의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1920년대와 2000년대라는 팔십 년의 격차, 한국어와 영어의 어쩔 수 없는 다름 때문이라고 변론하려 했던 것이다. (228-9쪽)

민음사의 번역도 괜찮지만, 출판사에서 '젊은' 번역이라고 홍보했듯이, 문학동네 김영하의 번역은 읽기에 편했다. 20대 초반, 기껏해야 20대 후반이었을, 닉과 톰, 데이지와 개츠비가 서로 경어를 사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 역시 타당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문학동네/김영하>

"닉, 요즘 뭐 해?"

"증권 쪽에서 일해."

"누구랑?"

나는 동료들의 이름을 댔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인데?"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좀 재수 없었다. (22쪽)

<민음사/김욱동>

"닉, 요즘 자넨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채권 일을 하고 있어."

"어느 회사에서?"

나는 회사 이름을 말해 주었다.

"들어 볼 적 없는 회사인데."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런 말투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28쪽)

"What you doing, Nick?"

"I'm a bond man."

"Who with?" I told him.

"Never heard of them," he remarked decisively.

This annoyed me. (32-3쪽)

가독성면에서 일단 ‘김영하 번역’에 별 하나를 더 준다.

그 장교는 데이지가 말하는 모습을 지그시, 그 또래 여자들이 한 번만 받아봤으면 하는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더라구요. 너무 로맨틱해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예요. 그 사람이 바로 제이 개츠비였어요. (96쪽)

'그 또래 여자들이 한 번만 받아봤으면 하는 그런 시선', 물론 그런 시선이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길,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 그런 눈길이 있다.

가끔 TV에서 그런 눈길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극 중에서, 연기자들은 그것이 '연기', 즉거짓 감정임을 본인도, 상대방도, 시청자들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는 척‘이 아닌 ’진심'으로 무언가를 연기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진심으로 '사랑'을 '연기'할 때, 가끔 그런 눈길이 나온다. 내가 가장 최근에 TV에서 그런 눈길을 봤던 건, 송승헌, 김태희 주연의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에서였다. 송승헌의 눈빛이 그런 눈빛이었다. 달콤하고, 로맨틱한 눈길,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길.

속으로 말했다.

"송승헌, 진짜로 김태희 좋아하는구나. 곧 스캔들 나겠네."

예상은 적중하지 않았고, 스캔들은 없었다. 송승헌이 연기를 잘한건지, 내가 잘못 본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녀는 개츠비를 바라보았다. "저기, 제이."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담배와 불이 붙은 성냥을 카펫 위에 던져버렸다.

"아,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원해!" 그녀가 개츠비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당신을 사랑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지나가버린 일을 어쩌라는 거야......" 그녀는 힘없이 흐느꼈다. "한때는 톰을 사랑한 적도 있었어. 그렇지만 당신 역시 사랑했어."

개츠비가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167쪽)

나는 개츠비가 데이지의 과거에 연연해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그녀의 과거가 문제된다면, 그는 그녀를 찾지도, 만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과거는 그에게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계속해서 요구한다.

즉, 데이지는 그녀의 남편 '톰'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인정하라는 것이다. 데이지는 말한다. 어느 한 순간, 톰을 사랑한 적도 있었노라고. 하지만, 당신도 사랑했다고 말이다. 이건 개츠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자신이 오직 데이지만을 사랑했듯이, 데이지도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면, 개츠비의 '완벽한 사랑'은 무너진다. 역시 그가 사랑한 것은 환상 속의 여인 ‘데이지’가 아니라, 데이지를 사랑하는, 데이지와 사랑을 나눌, 데이지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는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은 완벽해야 한다는 개츠비의 집착은 데이지를 숨막히게 한다. “당신도 사랑했어.”라는 데이지의 말은 개츠비를 만족시키지 못 한다. 데이지는, 반드시 자기 자신만을, 개츠비만을 사랑해야 했다. 5년 전에도, 5년 동안 계속해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개츠비는 ‘사랑에 빠진 남자’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그 여인을 위해 집을 사고, 그 여인을 위해 매일 엄청난 파티를 연다. 오직 사랑하는 여인,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서다.

하지만, 지독한 그의 사랑이 그가 그녀를 얻은 후에도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의 사랑이 그토록 강렬했던 이유는 그녀가 ‘닿을 수 없는 어떤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이 지독한 집착으로, 사랑과는 종이 한 장 차이인 집착으로 점철되어 갈 때, 사랑을 받고 있는 대상도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도 결국엔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결국 가장 위대한 사랑은 ‘짝사랑’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데이지’를 생각하고, ‘데이지’를 상상하고, ‘데이지’를 그리워했던 때, 그 때 ‘개츠비’의 사랑이 가장 완벽했기에 그러하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앞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사랑의 충만한 느낌이 계속될 수 있기에, 가장 위대한 사랑은 어쩌면 짝사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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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2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역시 민음사판 번역이 더 좋으네요. 그러니까 번역투에 더 가까운 문장이라고 해야하나요. '재수없었다'는 편하게 읽히고 익숙하지만 '나는 화가 치밀었다'는 소설 속 문장 같아서요. 저도 문동으로 서점에서 딱 한 페이지를 훑었었는데 '자연스러워서' 저는 좀 내키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얼마전에 쟌 님이 이 영화 리뷰를 쓰셨는데요, 단발머리님이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디카프리오가 이 역을 맡으면서 한 인터뷰에 진짜 완전 쑝갔어요. 개츠비를 '자신의 방식대로 근사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 들면서 말이지요. 제가 혹시 모르니 여기에 가져와 볼게요.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길잃은 캐릭터다. 이 작품은 기존의 러브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를 소유하고 지워버려야만 자신의 가난하고 보잘것 없었던 과거도 깨끗이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디카프리오, 인터뷰에서 발췌

단발머리 2013-06-21 15:14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쟌님 영화 리뷰도 개츠비 인터뷰도 못 봤네요.

제가 진작부터 알아본 대로 (ㅋㅎㅎ), 역시 디카프리오는 멋지네요.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라니요.
너무 너무 멋져요.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네요. 외모도 되고, 캐릭터 분석도 잘 하고, 연기도 잘하고.
우앗, 완전 일등 신랑감, 아니다, 일등 배우네요.*^^*

다락방님, 신나는 금요일 오후네요. 날씨는 너무 좋구요.
오늘 저녁에도 약속 있으신가요?
시원한 맥주 500에 치킨?!? 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