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구 같은 작가, 김애란

지난 주말, 현대백화점에서 딸롱이 청바지를 하나 사고, 8층 영풍문고로 향했다. 김애란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펼쳐져 있었다. 띠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친구 같은 작가,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도 김애란 작가 작품이었지?

2. 너의 여름은 어떠니?

비행운의 첫 번째 단편이다. 대학 선배와의 기억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처음 야구장에 데려가 주고, 홍대 인디 문화가 뭔지, 대학로 소극장의 서늘함이 얼마나 기분 좋은 건지 알려준 사람. 어느 집단에나 있는 친절하고 인기 많은 남자. (11쪽)

어느 집단에나 있는 친절하고 인기 많은 남자, 대학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멋있고, 너무나도 근사하다. 완벽에 가까운 선배의 모습에 주인공은 선배의 파트너가 되기를 소망하기 보다는, 선배의 그녀까지도 사랑해 버린다. 그런데, 그런 선배의 갑작스런 전화라니.

선배를 돕기 위한 그녀의 순수한 마음은 ‘푸드파이터와의 녹화장’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녀가 뚱뚱하다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그녀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외양적 특징을 선배는 몰라 봤으려니, 아니 모르고 있겠거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선배는 그녀의 특징을 모르는 척 해왔던 거다. 간만에 연락해 그녀를 간절히 찾았던, 그렇게 좋아하던 선배가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한 치수 작은 레슬링복 바깥으로 몽실몽실한 살들을 드러내며, 핫도그를 꾸역꾸역 밀어넣는 모습이다. 그녀는 부끄럽다. 그런데, 고개까지 들어야 한다니. “고개 좀 들어라, 이 녀석아.” 

선배가 그녀의 감정을 몰랐을 수도 있다. 원래 친절하고 인기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던가.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고, 친절히 대우받는 것을 당연시 하고. 세상이 편하고, 세상이 즐겁고.

당장 눈 앞에 큰 일이 벌어지니, 선배는 그녀가 생각난 거다. 첫째로는 지금 당장 그녀의 외양적 특징이 필요했던 거고, 둘째로는 그녀라면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한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선배 앞에 선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은 레슬링복 때문에 너무 부끄럽다. 이젠 선배와의 기억이 아름답지 않다. 오늘 참석하지 못한 병만이의 장례식이 떠오르고, 그 옛날 그녀를 잡아주었던 병만이의 손길이 생각나 엉엉 울어 버리고 만다.

3. 다행이다.

나도 그런 적이 없었는지 생각해 봤다.

나에 대한 호의를, 내가 편한 대로 이용한 적은 없었는지.

모르는 척, 무심한 척 하지는 않았는지.

다행이라 해야겠지.

나를, 나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여자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부가설명이 좀 필요하겠다. 나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다. 나도 여자지만 여자들하고만 지낸다는게 짜증 날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중, 여고에서는 보이시한 여자애들이 인기가 많다. 그 애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희고, 머리가 짧다. 한마디로 예쁘장한 남자 애 같다. 책상 위에 음료수도 올려져 있고, 다른 선물들도 많이 받는다. 꼭 외모가 보이시 하지 않아도 인기 있는 애들도 있다. 공부도 잘 하고, 성격도 좋고, 말도 잘 하고. 이런 애들은 인기가 있어서 옆자리에 앉아보려 다들 노력하고 난리다. 내겐 보이시 하진 않지만,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는 인기짱 친구가 있었다. 나는 일학년 때 그 친구랑 친구가 되어, 고등학교 삼년 내내 나름 가까이 지냈는데, 인기짱 친구에 대한 고민, 정확히는 그 친구와 특별한 친구 사이가 되고 싶어하는 여러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나의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다시 돌아와서.

역시나, 나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남자 친구도 없었다. 나를 그렇게나 좋아한 사람이 없었다. 헛. 헛웃음이 나오네.

다행이다.

일단 나는 선배 같은 실수를 할 확률이 매우 낮은 사람이다.

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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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2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씀하신 단편을 [황순원 문학상 작품집]에서 읽었는데, 어우, 막 가슴이 아파가지고. 마치 제가 그런일을 당한것마냥 자존심 상하고...수치스럽고 그렇더라구요. 어휴.. 저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인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단발머리님께서 언급하신 단편만큼은 참 좋았어요.

단발머리 2012-09-21 11:35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이 작품이 [황순원 문학상 작품집]에서도 나왔었군요. 다락방님 얘기 듣고 알았어요. 그러게요, 저도 제가 레슬링복을 입은 것마냥 기분이 별로였어요. 단편 하나에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거, 대단한 거 같아요. 작가들은 진짜 다 천재인가봐~~~~~


비로그인 2012-09-26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저도 생각해보면 저를 그렇게 좋아했던 남자친구/여자친구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게 다행인지는 그렇지만 모르겠어요! 일단 선배 같은 실수는 안 하겠지만 끙... 사랑 받으면서 실수 안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오랜만에 서재 들려서 반가운 애란씨를 만나고 갑니다 ^ㅡ^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