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보고싶다는 시어머니 연락에 아이들과 함께 현대백화점에 갔다. 1층에서 시어머니를 만났다. 딸롱이가 '알밥정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 9층으로 가자.
9층으로 올라가 우리가 자주 가는 '현대우동'으로 향했다. 알밥정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왔다. 알밥정식을 먹었다. 목요일인데도 왼쪽, 오른쪽, 앞쪽, 뒤쪽으로 사람들이 많았다. 테이블이 꽉 찼다. 알밥정식 두 개에 18000원. 하나에 9500원이었다. 밥 한 끼에 9500원이라니.
전날 저녁에 읽은 '흑산'이 떠올랐다.
정조 대왕 이후, 조세 제도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지방 수령들은 말 그대로 '본전'을 뽑아야 하겠기에 수탈에 적극적이었고, 지방 토호세력들은 그들을 도우며 한 몫 챙기기에 바빴다. 급기야는 집과 땅을 버리고 (버리는 집은 무너지기 직전, 버리는 땅은 힘써 농사지어도 배불리기 불가능한 땅이었다.), 전국을 떠돌기에 이르렀고, 유민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조정에서도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의 고기를 먹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 왜 아이들을 죽여서 먹고 있냐 물으면, 아이를 죽여서 먹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죽어서 가져다가 불에 구워 먹었노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말해준다.
먹을 것이 없어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집을 떠나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이 먹을 만큼의 양식을 구하지 못해 마냥 굶고 있는 사람들, 열심히 일했는데도 그 대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아주 멀고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머나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100년, 150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 그랬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이 땅의 사람들은 굶주림과 싸워야했다. 굶주림이 가장 큰 적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한끼 밥값 9500원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백화점 9층에 가보면, 한끼 밥값 9500원에 놀라지 않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나도 조금 놀라기는 하지만, 그래도 9500원 한끼쯤 사먹을 여력은 있으니 감사해야 하나...) 아직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을 청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극심한 기아에 처한 사람들의 수는 과거 그 때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이 좋은 시대라 해야하나.
굶주림에 대한 이야기만큼 내 가슴을 울린건 '사람',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약전, 순교자 정약종, 정약종과 다른 길을 간 정약용, 평안도 정주 역참의 마부 마노리, 흑산도와 뭍을 오가는 사공 문풍세, 16세에 임금을 대면하고, 나중에는 천주교에 귀의한 순교자 황사영, 황사영의 장인 정약현, 황사영의 처 명련, 포도청의 간자 박차돌, 흑산도 별장 오칠구, 중국인 신부 주문모, 아리, 아리의 어미, 젓갈장수 강사녀, 박차돌의 동생 박한녀, 황사영에게 면천된 육손이, 흑산도 조풍헌, 조풍헌의 조카 순매, 흑산도 청년 창대, 창대의 아버지 장팔수, 궁녀였으나 수유리에 터를 잡은 길갈녀, 형문 집장사령 오호세, 남대문 밖 옹기장수 노인 최가람, 등짐장수 오동희, 강사녀의 딸.
배고픔을 이겨내야할 때, 사람들은 비굴함을 참아낸다. 살아야 하겠기에, 살아남아야 하겠기에 사람들은 비굴함을 견뎌낸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람됨을 포기할 때, 동물적 본능과 탐심에 누런 이빨을 드러낼 때, 동물보다 못한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며, 그들에게 짓밟힌 사람들 또한 '인간성'을 훼손당하니, 그 곳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을, 정확히는 가문이 다른 이들을 사사하고, 유배에 처하고, 천주교라는 다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능지처참을 명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어미 잃은 아리에게 미음을 먹이라 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아리 어미에게서 계속 젖을 뽑아내는 그들은 누구인가. 아리를 짓밟은 이들은 누구인가. 마노리를, 김개동을, 육손이를 평생 그 주인에게 묶어두는 이는 누구인가. 누가 그들에게 이런 힘을 주었는가.
마노리도, 육손이도, 강사녀도, 박한녀도, 흑사도의 사람들도 모두 원하는 바가 있는 '인간'인데도, 그들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한다는 생각조차 어려웠다. 어두움의 고리는 그렇게 단단했다.
강물을 피로 적신 순교의 이야기는 이제 이 땅에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소리일 수 있겠으나, 그 당시를 괴로워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주여, 매 맞아 죽은 우리 아비의 육신을 우리 아들이 거두옵니다.
주여,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당신의 주검을 거두신 모친의 마음이 어떠했으리까.
하오니 주여, 우리를 매 맞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 죄를 묻지 마옵시고 다만 사하여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리처럼, 이 기도문이 바로 '나'를 위한 기도문이라 느껴지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우린 아직도 진행중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