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랄만한 말들이 무수히도 쏟아지는 귀중한 책을, 읽고 있다.

책이라는 물성을 통해 만났다는 점에 방점을 찍으면 아니, 그러니깐 그게 그쪽으로 가는 건가요? 이게 논리적으로? 어떻게?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라고 묻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이 책의 주장이 비논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커피 한 잔 마주하고 앉아 나보다 나이가 00살 많은 여성주의 운동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면 훨씬 술술 읽힌다.

여성주의 책 어디 한 권 쉽거나 만만할까. 각기 제각각 통쾌함과 무거움, 그리고 통찰을 가득 안고 있음이 분명한데, 아무튼 내 읽기 역사에서 제일 충격적인 문장은 바로 실비아 페데리치의 그것. 그러니깐 이런 문장.











우리는 하녀이자 매춘부이고 간호사이자 정신과 의사이다. (45쪽)

읽다 책을 덮어버리게 만드는, 책을 들고 있는 손을 덜덜 떨게 만드는, 더 읽어야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문장이라 하겠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단이 눈에 들어온다.

즉 궁극적으로 권력자는 우리의 에로스를 성기 에로스로 추락시킬 목표를 갖고 있다고 봐도 좋다. 여자에게서 경제적 자립을 빼앗고, 가족을 바탕으로 수컷 암컷이 한 쌍이 되어야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낸 권력의 목적은 바로 우리의 에로스를 성기 중심 에로스로 뭉개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제적 억압은 그 수단에 불과하다. 성기 중심 에로스란 여자와 남자를 암컷 수컷으로 삼아 성기로 결합시키는 것이며, 그런 결합에서 뭔가 의미를 찾고 기쁨을 느끼게 하려는 획책이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성기 에로스로 떨어뜨리는 사회가 포르노그래피로 성립한 사회이다.(62쪽)

상상력의 극치인 에로스를 성기로만 묶어두려는 권력자의 획책을 저자는 통렬히 비판하는데, 나는 그의 생각에 대부분 동의하기는 하지만, 결혼한 여성 대부분의 삶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에로스라기 보다는 '자식' 혹은 '자식에 대한 상념'이 아닌가 싶다.

섹슈얼리티를 섹스로만 한정해서 볼 수 없겠지. 그러면 안 될테고. 물론 이건 나만의 생각,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내 또래의 여성, 기혼 여성들의 가장 큰 화두는 <1. 자식 2. 자식 3. 자식>이어서, 이 세상 무슨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던지 모든 이야기는 '자식' 이야기로 수렴되고. 나라걱정, 살림살이 걱정을 넘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자식 걱정'이 제니의 만트라처럼 후렴구로 반복, 또 반복된다.


진정한 해방은 성 해방이 아니라, 출산 거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자식 걱정'의 소용돌이.

파고와 돌풍과 소용돌이를 헤치고 조금 더 읽어보자.

아내는 돈을 벌고 남자는 혁명을 하는 분업 체제가 지금 세상에서남녀가 존재하는 방식과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남자가 자신의 아픔을 찾으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자에게는 항상암컷으로, 혁명을 향한 남자의 대의를 내조하는 일로 공을 세우는 데 진력을 다하는 길만이 허용된다. 여자가 각목을 들고 싸워도, 설령 폭탄을 갖고 체제와 싸운다 한들 그렇다. 자기 아픔을 가지지 못한 남자조직에서는 암컷을 어떻게 사용하는 게 가장 효율이 좋은지 그 방식을더할 수 없이 크게 보여 준다. 그래서 여자 (혁명) 병사의 출현을 허락하는 것일 뿐이다. - P58

여자에게 결혼이란, 또 결혼식이란, 아내로 엄마로 암컷의 생을 살아 내기 위한 결의를 세상에 알리는 창구이다. 생각건대 공인된 포르노인 결혼은 거리에서 남녀 간 성행위 퍼포먼스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더욱 우스운 것은 거리를 지나며 그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이 누구도 성행위를 보지 않았다고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와 비슷하게 입모아 거짓말을 하는 꼴이다. 이렇게 결혼 포르노가 상연되어 왔다. 그러니까 모두가 결혼이 포르노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포르노라고 외친다면 이 세상의 중심 뼈대에 금이 갈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 공인된 포르노 ‘결혼‘이 계속 상영될 수 있다는 소리이다. 이런 속임수를 숨기려고 ‘예술이냐 외설이냐‘ 왈가왈부한다. 마치 결혼 이상으로 외설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고서 체제를 정비한다. - P63

그러나 ‘여자라는 것‘으로 입게 된 고통인 이상, 그 아픔을 부조리하다고 보는 것은 내가 ‘여자라는 것‘으로 살아가는 일의 부조리함을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그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도 스스로가 ‘여자라는 것‘ 때문에 머리로 외워서 아는 것도 아니라서, ‘여자라는것‘으로 입은 고통을 잊어버릴 방도가 없었다. 도망칠 곳이 없는데 도망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여자라는 것‘에서 계속 도망치려 해도 언제나 나는 ‘여자라는 것‘으로 돌아와야 했다. - P115

오르가슴 속에서 내 죄가 녹으면 나는 우주와 융합이 될 것이고한없이 자유로이 비상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생명이 있는 한 불타오르는 그 이미지는 죽음의 이미지를 뒤집은 것이었다. 살아가겠다는 것은 천국과 지옥을 간직한 그런 순간을 맛보는 것이며,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좋겠다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에로스를 갈구한 것이었다. - P139

생각해 보면 여자는 신좌익운동 내부에서 암컷으로 살았다. 등사판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혁명가를 자처하는 남자들의 활동 자금을 모으려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고, 가사 육아 빨래 등 수면 아래에 있는 거대한 빙산처럼 많은 일들을 했다. 일상을 꾸리기 위해 하는이 무겁고도 부담스런 일들을 암묵의 폭력으로 강요당한 것이다. 폭력은 금세 알 수 있는 물리적인 폭력만이 다가 아니다. 자 이제부터는 트로츠키 Leon Trotsky 28 식으로 한번 논리 전개를 해 봐." 하거나 "프롤레타리아로서 의식이 낮다"든가 하는 말로 위협하고… - P145

여자의 체면이란 애완견 수준이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엄마여야 하는 여자의 삶이란 애완견 수준이다. 그래서 주인이언젠가는 애완견에게 손을 물리듯, 여자한테 모성애를 요구하는 남자는 언젠가 여자한테 뒤통수를 맞게 된다. - P154

문제는 기리시마 씨가 말한 그 충실한 생활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충실한 생활을 이미지로 그려 보면, 그 나름대로 사회에서인정받고 그것으로 수입을 얻어서 고급 옷을 사 입고 아파트에 살면서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불러 즐겁게 지내는 것, 그것이 더없이 충실한 생활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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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0 1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아 님도 그렇고 단발머리 님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이 책 좋게 읽고 계시는데, 저는 왜이렇게 툭툭 걸리는지. 또 짜증나는 부분이 나와서 말이지요. 제가 곧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저는 이 책 읽기 좀 힘드네요. 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24-11-20 11:33   좋아요 2 | URL
엥? 하는 순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거 같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저는 이 분 나이를 고려하면서 읽으니 그나마 쪼금 이해 가는 면도 있더라구요. 다락방님 글 기다릴게요!

수이 2024-11-20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읽을수록 강하게 공감되는 구절들이라니 🤪

단발머리 2024-11-20 11:47   좋아요 2 | URL
그 메롱이 제가 생각한 그 메롱인지에 대해서 심도깊게 논의해볼게요. 메-롱!

얄라알라 2025-01-19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불되지 않는 사회] 읽다가 [혁명의 영점] 인용되었길래.검색하며 따라와보니 반갑게도 바로바로 단발머리님의 서재!!!와우

단발머리 2025-01-20 10:48   좋아요 1 | URL
우아~~~ 그렇게 연결되서 아는 사람 만나면 엄청 반갑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얄라알라님!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