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어떤 특권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우월성의 표식입니다. 타자의 시중을 들기 위해 타자를 돌봐야 하는 혹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직업에 전념해야 하는 사람과 대조적으로 말입니다. 부와 신분 그리고 출생이 주는 특혜는 자기 자신을 돌볼 (배려할-옮긴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로 나타납니다. 로마의 오티움orium (교양 있는 여가)이라는 개념이 이와 아주 가깝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교양 있는 여가'는 특히 자기 자신을 돌보는 (배려하는-옮긴이)데 보내는 시간을 의미합니다.(38쪽)
이런 이야기는 참 필요 없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써 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제목 때문에 구입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 이 부분을 푸코가 프랑스어로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껏 흥미를 일으키는 제목인 데다가 책의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과하게 포장하지 않으면서 색깔로 대결하는. 내용이 어떤지 보지도 않고 구입했는데, 한참 읽고 나서야 전에 읽었던 푸코의 『자기 해석학의 기원』이 포함되는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시리즈 중 4번째 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파란책과 나란히 하는 책이라면 사지 않았을 텐데. 그 파란책은 너무나 어려웠고 어려웠으니,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은 나의 불찰입니다.
푸코는 자기 돌봄과 자기 테크닉을 통해 '자기 수양'을 연구하는데, 여기에서 자기 돌봄은 일정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시골에서의 은둔, 명상, 독서 등이 자기 돌봄의 방책들이다. 38쪽의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특권'이라는 말은 바로 이해 가능하다. 명상과 독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 자신과의 관계를 계속 확인하는 이 00는...................................................................
어제밤에, 여기까지 쓰다 잤다. 왜냐하면, 오늘 아침에 수험생이 모의고사를 보는데, 예정해 두었던 소고기미역국을 끓인다 하니, 수험생과 재작년 수험생이 반대했기 때문에, 다른 메뉴를 찾던 중에 아쉬운 대로 닭가슴살 양파볶음을 해주기로 했고, 밥도 새 밥이어야 하니, 아침 일찍 기상하여야 하기에....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특권이다. 타자의 시중을 들 필요도,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직업에 전념할 필요도 없는 상태. 우리나라는 노인인구 빈곤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인지라 이런 말의 한 쪽 구석이 비어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만약 노년에 경제적인 압박이 덜하다면 나는 이게 실현 가능한 사람은 '남편과 사별한 60대 후반의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남편과 사별한'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한 가지는 남편과 사별했다는 것이고(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노년의 잔소리꾼을 경험한 사람만 알 것이니), 두 번째는 한국에서 '여전히' 정서적, 경제적인 보증이 되는 자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에서다. '60대 후반'은 아직 충분히 젊은 나이이고, 현대의 추세를 고려하건대 이는 80대 초반까지 가능하다. '여성'이라는 건, 남성에게 돌봄, 더욱이 자기 돌봄은 죽음 직전까지도 너무나 어렵고 고차원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중을 들 필요도,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직업에 전념할 필요도 없는 상태. 거기에 더해 나 자신의 존립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는 상태. 자기 돌봄의 최정점. 나의 이런 생각은 128쪽의 문장들로 확인된다. "노년은 인생의 특권적 시기입니다."
그 자기 돌봄 최정점의 한쪽에 '글쓰기'가 있다.
글쓰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하루 동안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바, 자신이 느낀 바, 자신이 경험한 바, 자신이 읽은 책, 자신이 나눈 대화 등을 메모하는 것을 포함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인이 휘포므네마타hupomnémata라 부르는 바, 즉 다시 읽고 기억하기 위한 수첩을 만듭니다. (87쪽)
하루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바, 느낀바, 경험한 바를 적어나가는 일,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말하는 일, 자기 자신과의 대화, 타인과의 대화를 메모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던지. 그 중요한 자기 돌봄에서조차 글쓰기는 이렇게나 중요하다.
나는 19년을 전업주부로 있다가 작년부터 일을 하게 되었다. 사회적인 일, 계약 관계에 의거한 일, 눈에 보이는 일, 돈을 받는 일을 하게 되어 기뻤으나, 이런 기쁨과는 상관없이 내 체력과 시간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가져다드리다 보니 어느새 잃어버린 나의 여가 시간. 내게는 무언가를, 어떻게 할,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희진 선생님은 공부가 필요 없는 계층과 공부할 여력이 없는 계층 사이에 위치한 중산층의 특이성에 대해 설파하시면서, 중립적일 수 없는 지식의 한계, 위치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그러니깐 결국 지식의 생산, 새로운 언어의 창조, 더 넓은 의미에서의 글쓰기는 중산층에게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언제던가, 평일 저녁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러 갔을 때, 선생님은 청중을 가리켜 '지금 이 시간, 여기에 올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가지신 분들'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건 참 맞는 말이다. 그러지 못하는, 그럴 수 없는 조건이 훨씬 더 많다.
진실을 지향하는 자기 수련과 관련해 푸코는 자기화, 체현에 대해 말하는데, 그가 예로 든 '계시'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그건 또 다음 기회를 이용해야겠다. 마침 점심시간이고, 오후에는 바쁠 예정이며, 퇴근 후에는 2부가 펼쳐질 것이고, 쩜쩜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