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바오가 갔다. 푸바오를 낳아준 아이바오와 아빠 러바오, 자식처럼 푸바오를 돌봐준 사육사님들을 두고 갔다. 푸바오의 원래 소유권자인 중국으로 돌아갔다. 판다 마케팅이 이처럼 거대한 산업인지 나는 몰랐다. 우리나라가 유난한 게 아니라, 전 세계 판다 사랑이 유난한 거 같다.
푸바오가 떠나는 날에는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운데, 푸바오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푸바오가 타게 될 특수차량 앞을 서성였다. 유튜브를 열었더니 그날 푸바오가 떠나는 장면을 생중계하는 방송이 6개였다. 내 화면에서는 그랬다. 가히 전 국민적 관심사였다. 푸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푸바오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고, 푸바오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날 그곳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넘어 슬픔과 억울함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했다. 화면 밖으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가 그랬다. 나는 그 소리가 조금 불편했는데, 나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가려진 채로 푸바오가 나오고, 그리고 푸바오를 태운 케이지가 특수 차량에 실렸다. 중국까지 푸바오와 동행하는 강바오(강사육사님의 애칭)가 차량 앞쪽에 승차하고, 그리고 그 찰나. 송바오(송사육사님의 애칭)가, 우산도 쓰고 있지 않던 송바오가 몸을 돌려 차량에 기대어 한 손으로 차량 면을 쓰다듬다가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송바오에게는 이 자리가 푸바오와의 마지막 순간이고, 그렇게 송바오는 푸바오와 이별을 한다. 감정이 요동친 건 그 순간이었다. 푸바오의 차량을 쓰다듬는 송바오를 본 그 2-3초, 마음이 널을 뛰고,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맺혔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푸바오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고, 푸바오 동영상을 제일 많이 본 사람이지만, 사실 나는 푸바오를 안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푸바오와 아이바오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힘들었던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푸바오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푸바오가 탄 차량을 송바오가 쓰다듬을 때, 내 마음이 움직였던 건 송바오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내내 사랑으로 키웠던 자식을 멀리 보내는 마음.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애인과 영영 헤어지는 마음. 내 마음을 주었던 애인에게 이제 더는 내 마음을 줄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릴 때의 마음.
아이바오는 그날 푸바오가 떠나는 걸 알지 못한다. 독립 훈련의 힘든 시간을 보낸 후, 이제 아이바오와 푸바오는 떨어져 생활한다. 둘 다 그 생활에 익숙해졌다. 아이바오는 푸바오의 쌍둥이 동생들을 돌보느라 적잖이 피곤하고, 푸바오는 푸바오대로 새로운 판생을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아이바오에게 이입하지 않는다. 아이바오는 모를 것이다. 아이바오는 푸바오를 낳았고 키워주고 사랑해 주었지만, 이제 푸바오를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바오는 푸바오와의 영영한 이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이입하는 건, 송바오이고, 그의 마음이고, 그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나는 송바오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강신주의 문장처럼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어려운 문제는 타자로 하여금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에게는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혹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에 있습니다. (『망각과 자유), 21쪽)
사랑할 때 나는 내 마음이 그에게 가 닿기를 바랐다. 그를 원하는 내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바랐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인가. 그게 전부인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내 마음이 그에게 닿고, 그가 같은 마음으로 내게 응답해 주는 것이다. 그도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다. 그도, 내가 그를 아끼는 그 마음으로, 나를 아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랑의 맹세는 시간의 흐름 속에 퇴색해지고, 열정은 권태로 쉽게 변색되어 버린다.
내가 그를 더 사랑했던 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내 사랑을 거두어들였다. 그가 나를 더 사랑했던 게 무슨 소용인가. 그는 더 이상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끝난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 오직 완성된 사랑만이, 해피엔딩만이 중요한 걸까.
열 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결국 중요한 건, 내 마음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내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가 떠나도,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내게 그대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본인 스스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이성애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고 했던 임경선은 정희진쌤의 오디오 매거진에서 말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거죠.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각자, 상대를 사랑하는 거죠.”
송바오의 마음이 푸바오에게 가 닿을까. 어쩌면 잠깐 푸바오는 송바오를, 강바오를, 아이바오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서 없어져 버린, 내 앞에서 사라진 그 사람들을/엄마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푸바오는 푸바오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영영한 이별 앞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귀엽게 꾸려 나갈 것이다.
남은 건,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다. 가질 수 없었던, 혹은 영영히 내 것이 될 수 없는 마음에 대한 아쉬움이 내게 남는다. 그리움이 남는다. 내가 가진 건 이것뿐이다. 그를 사랑했던 내 마음.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그것, 오직 그것뿐이다. 내 마음, 그를 사랑했던 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