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에 대한 본격 연구서인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읽으면서, 백인 남성의 흑인 노예 여성에 대한 계획적, 조직적 강간이 성적 모험 혹은 성적 취향의 이유로 출발했을지 몰라도 그 궁극의 지점이 ‘돈’이었다는 걸 발견했을 때, 가장 충격을 받았다.
첩과 번식용 여자라는 역할은 노예제의 마지막 10년 동안 노골적인 성매매 형태로 발전했다. 가장 예쁘고 ‘백인에 가까운’ 노예를 뉴올리언스 시장에서 대놓고 성적인 용도로 팔았다. 이때 쓰인 무신경한 용어가 ‘팬시걸’이었다. 포르노 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인-노예 관계의 도착 환상이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258쪽)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힐 콜린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남부의 오래된 노예제 사회에서 점차적으로 백인여성과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길러졌으며) 바로 이 때문에 애첩인 노예로 매우 중시되었던 “아름다운 젊은 혼혈여성’이 (백인 “신사”의 손에서) 가학적으로 다루어졌다는 사실만 보아도 분명하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239쪽)
흑인 노예 여성들은 흑인 노예 남성들과 똑같이 일했다. 같은 시간 일어나, 같은 일터로 향했고, 똑같은 할당량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삶이 더 비극적이었던 이유는 백인 농장주, 백인 농장주의 아들, 백인 관리인 가끔은 흑인 관리인까지 더해 층층이 쌓인 남성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성적 억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번식용 여자’로서 재생산의 억압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삶을 살던 그들에게 해방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흑인 남성이 힘을 합쳐 ‘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백인 남성에 대항했다. 하지만 노예 해방 후에는 백인 여성들이 줄곧 주장해왔던 참정권 확대가 백인 여성이 아닌 흑인 남성에게로 향했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여성 운동’에 함께해왔던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그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여성 투표권 투쟁보다 흑인 투표권 투쟁을 전략적 우위에 놓아야 한다”(131쪽)고 주장했다. 백인 여성들은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동원해 이를 비난했다. 흑인 여성인 앤절라 데이비스는 상황을 이렇게 평가한다.
남부에서 흑인을 상대로 자행되는 광범위한 폭력과 테러를 고려하면 중간계급 백인 여성보다 흑인에게 투표권이 더 절박하다는 주장은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과거 노예였던 이들은 여전히 목숨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더글러스가 보기에는 투표권만이 그들의 승리를 보장해 줄 것이었다. 반면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과 수전 B. 앤서니를 통해 그 이해관계가 대변되는 백인 중간계급 여성들은 목숨이 육체적으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여성, 인종, 계급>, 133쪽)
백인 여성들의 자기 이익에 대한 방어와 남북 전쟁 이후 흑인 평등 운동 사이의 위태롭고 피상적인 관계는 그렇게 파국을 맞았다.
백인 여성들을 비난하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가 속한 현실은 여성 문제와 인종 문제, 그리고 계급 문제가 혼재되어 있다. 갈등의 요인을 하나로만 이해할 수 없다. 젠더는 그 어떤 사회적 억압보다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어 그 실상을 깨닫기가 어렵다. 남녀평등을 목 놓아 외치는 사람도 저녁 차리는 일은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일, 여성적인 일, 여성다움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변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남녀의 구별과 다른 대우가 ‘자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거다 러너가 서술한 바와 같이, 1848년 왕정에 반대하는 혁명에서 여성들은 혁명전과 도시 운동에 참여하고, 임시 정부에 투표권을 청원하는 등 활동적인 역할을 했지만, 남성들의 일반 투표권만 시행되었고 여성들은 끝내 배제되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상황도 비슷해서 여권 운동과 코뮨에 참가한 소수의 급진적 여성 운동은 황폐화되었고, 프랑스 여성들은 1938년이 될 때까지 자신들의 인격과 투표권을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 394쪽) 이는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소련 혁명에서도, 중국 혁명에서도, 남자들 못지않게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했던 위대한 혁명 지도자 여성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혁명군이 진군할 때 여성들은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혁명이 성취된 후에는 뒤쪽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정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요구받았다. 여성 문제는, 언제나 ‘다음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고민과 갈등이 백인 여성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1991년, 오클라호마 대학 교수였던 아니타 힐은 클레런스 토머스 대법원장 후보자의 성희롱 사실을 폭로했다. 그녀의 사건은 성희롱, 인종, 권력의 문제로 이해되었지만, 가장 주요한 지점은 클레런스의 ‘성희롱’이다. 클레런스는 이를 인종차별의 문제라 규정하고, “흑인이라 민주당으로부터 공격당했다”고 내세우며 혐의를 부인했고, 52대 48로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청문회 이후 아니타 힐은 반대 세력으로부터 각종 협박 편지와 소포를 받았으며, 종신 교수직이 보장되어 있던 대학과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녀를 비난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같은 흑인으로서 흑인 대법관 임명에 지장을 주었다는 것이다. (2023년 2월 18일/시사저널,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77756)
흑인 여성들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흑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들과 함께 백인 남성들 그리고 일부 백인 여성들의 억압의 대상이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흑인 남성들은 흑인 여성들을 억압하고 구속했다. 하지만, 백인 남성에 저항하는 위치에서 그들은 동료이자 동지였다. 흑인 여성들은 아버지, 삼촌, 남편, 남동생, 아들, 손자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무차별적 폭력과 린치의 위협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투쟁했고, 자신과 가정,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흑인 남성들과 함께 싸웠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의 저자 백소영이 말했던 흑인 여성들의 페미니즘, ‘살고 살리라’의 실천으로서의 '우머니즘'이다.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아들과 딸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백인들의 폭압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동지이자 동료, 남편이자 애인인 흑인 남성이 그들을 억압할 때, 특별히 백인 남성과 똑같은 형태의 성 착취로 그들을 억압할 때, 흑인 여성이 겪어내야만 하는 배신감과 실망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흑인 여성의 ‘내부’는 누구인가. 인종적으로 이질적이지만 여성의 경험을 공유하는 백인 여성인가. 성적으로 자신을 위협할 때도 있지만 인종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내 가족, 내 남자인 흑인 남성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선택’에 관한 것이다.
참정권 획득을 위해 흑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발언을 내뱉었던 백인 여성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흑인의 정치력 향상을 위해 ‘성 비위’ 문제를 묻어두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흑인 여성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 특정한 어느 시점에는 선택해야 한다. 강제적 이성애와 오천 년 가부장제의 무게는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을 숨 막히게 하고, 서로에 대해 실망하게 만들지만. 연대해야 한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연대해야 한다. 미움을 뒤로 하고,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나,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오래오래 생각해봐야 하고, 그 후에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몫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백인 여성 쪽이다. 내 마음이 아니라 내 위치가 그쪽에 가깝다는 뜻이다. 적어도 나는 생존을 위협받지는 않았고, 노골적인 성 착취의 위협 속에 있지 않았다. 교육받을 기회가 열려 있었고, 결혼 이후 육아를 이유로 ‘일하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 나는 흑인 여성이다. 멀쩡하게 길을 걷다가 끌려가서 무슨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 아들, 애인, 남편을 위해서, 공동체 내에서 벌어졌던 ‘성 착취’ 문제를, 그 문제 제기를 조금만 더 미루면 안 되겠냐고 말하는 흑인 여성이다. 아니타 힐에게 폭탄을 보내고 항의 서신을 보내지는 않지만, 적어도 100에 1 정도로 아니타 힐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는 흑인 여성. 나는 백인 여성이고 또한 흑인 여성이다.
2022년 대한민국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이자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하던 윤석열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최대 의석수를 가지고 있던 여당의 대통령 후보이자 여론조사에서 줄곧 2위를 차지하던 이재명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는 주장은 현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 쏟아부었지만, 보수 편향의 언론 환경과 분단의 현실은 0.73%의 차이로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웃을 수 있게 했다.
기표소 천을 들치고 들어가면 항상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리던 나. 이번 한 번만, 이번 딱 한 번만 더 도와줘야 해. 작년에는 고민도 없이 기표하고 나왔다. 상황이 너무 엄중해서 고민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본 투표 날에는 집에서 6시 개표 방송을 기다렸다. 안타까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1인에게 그 아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아, 그런 방법이 있어요? 얼른 제 방으로 뛰어가 5만 원짜리를 들고 왔다. 그래, 너도 5만원. 나도 5만원.
미안해요, 난 선택을 해야했어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당신에게는 돈을 보냅니다. 표를 주지 못해 미안해서 돈을 보내요.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음에는 돈을 보내지 말고 내 표를 줄 수 있기를, 꼭 그럴 수 있기를 바라요. 꼭이요. 그런 마음으로 송금 버튼을 눌렀다.
각자의 상황은 다르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책임은 각자의 몫이다. 내가 돈을 송금한 사람은 1980년 서울대학교 최초로 총여학생회를 창설하고, 서울대학교 초대 총여학생회장이 된 사람이고, 내가 표를 준 사람은 중학교 대신 공장에서 10대를 보낸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윤석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