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연보 Happy Ending
꼭 작가의 생애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작가의 삶과 그의 작품이 맺을 수밖에 없는 관계를 고려할 때, 작가의 삶은 작품을 읽어갈 때 주요한 나침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2개월 특별 프로젝트인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어가면서 아쉬운 점은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긴 그 책만 그런 건 아니고, 실패를 인정하고 오늘 반납해버린 『실낙원』 2권이 그렇고, 65%에 머물러 있는 『교수』가 그렇고, 다시 읽기 예정 중(?)인 『제인 에어』와 『빌레뜨』가 그렇다.
예전에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나서 메리 셸리의 반해서 이렇게 적어두었더랬다.
메리 셸리의 삶이 행복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테고, 새엄마도 메리를 예뻐했다면 좋았을 테다. 새엄마가 메리와 윌리엄 부녀 사이를 질투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테고, 메리도 기숙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처의 딸이자 눈엣가시 같은 메리가 미워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집에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메리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방문하는 서재 한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곁으로 들으면서 방대한 서재에서 읽고 쓰는 삶. 그런 삶이 실현되었다. 최고의 교육 과정이 열렸다. 한 사람, 메리 셸리만을 위해.
다양한 경험을 얻는 수단의 하나로 여행이 이야기 될때 나는 좀 회의적인 편이었다. 물론 독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독서와 여행의 경험이 강렬할 것과는 별도로 우리 삶을 구성하는 순간들은 훨씬 더 단순하고 건조하다는 생각에서다. 느낌, 감각, 열정이 얼마나 지속되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여행을 많이 하지 못하면서 자랐고, 책도 다양하게 읽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많은 여행 경험이 없는데, 다방면의 독서 경험이 부족한데, 그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쉽게 긍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못한 것을, 쉽게 욕망할 수 없지 않은가.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를 이어 읽어가면서는, ‘한정된’ 경험 속에서 만들어낸 그녀들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마음대로 여행할 수 없는 여성들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들이, 평생을 가족과 적은 수의 친구들과 교류했던 여성들이 이룩해낸 작품에, 그 깊이와 넓이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메리 셸리에게는 지혜의 창고가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의 글 그리고 아버지의 서재였던 것 같다.
고아가 된 이 문학적 상속인에게 여성성과 문학성의 고조된 관계는 틀림없이 초기, 특히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른 메리의 죽은 어머니와 관련해서 수립되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은 자랄 때 어머니의 글을 반복해서 읽었다. 무엇보다 메리가 어머니의 유작을 다룬 논평을 대부분 (이들 논평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철학적인 바람둥이'와 괴물이라고 공격했으며, 그녀의 『여성의 권리 옹호) (1792)를 '[매춘부] 선전하기 위해 교활하게 날조한 성경'이라고 했다) 읽었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416쪽)
메리 셸리의 유명한 일기가 주로 자신과 퍼시 셸리의 독서 목록 일람표라는 사실이 그녀의 이례적인 과묵함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일화는 메리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이, 대다수 작가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지적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빈번하게 감정적인 행위였음을 강조한다. 특히 메리 자신은 어머니를 전혀 몰랐고, 사랑하는 남자와 가출한 뒤 아버지가 자신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메리가 자신을 정의하는 주요한 방식은 (그녀가 『프랑켄슈타인을 썼던 시기, 그리고 셸리와 함께한 초창기 때는 확실하게) 일차적으로는 독서, 그다음으로는 쓰기였다. (417쪽)
그녀의 삶 속에서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 활동이었는지를 밝히는 부분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일기의 주요한 부분이 독서 기록이라니.
이런 경우 메리는 일기를 ‘다이어리’ 형태로 기록한 듯하다. 전부는 아니고 살짝만 들여다본 바로는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를 ‘저널’의 형태로 기록했다. 그날 있었던 사건의 내용과 추이를 기록하는 다이어리와 그날 일어난 사건에 대한 생각, 느낌 등을 기록하는 저널 중에, 창작 활동과 관련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건 당연히 저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밝혔듯이, 메리의 일기가 곧 독서 기록이었다는 사실은 메리에게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 활동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겠다.
회사를 그만두고 ‘공식’ 일정이라는 게 없어진 사람이 되고 나서 일기를 쓰지 않은 날들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종이 일기, 저널에 다시 습관을 들이는 게 힘들었고, 올해는 복잡한 마음에 더더욱 일기 쓰기를 멀리했던 듯 싶다. 그래도 다이어리는 쓰다 멈추다 이어지다를 반복했는데,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사적’ 영역으로의 쏠림 현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코로나 시절’에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크린토피아/한살림/GS 프레시마트/반찬가게/메가커피로 이어지는 장보기 일정과 오늘의 메뉴만 덩그러니 남기는 했다. ‘장보기’와 ‘오늘의 메뉴’ 사이에 읽고 있는 영어책의 쪽수를 기록하고, 찾아볼 책을 체크하고, 페이퍼 쓸 책의 제목을 적어두었다. 이건 뭘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기는 하지만, 아무튼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다이어리는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책이 잘 들어오지 않기도 하고, 좋은 책을 읽었는데도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보내는 요즘이다. 그래도 밤 9시 반쯤 되면 아, 오늘 그래도 조금은 읽어야지, 하고 김치냉장고 위를 쳐다보는데, 그때마다 나를 기다리는 책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책은 두껍기가 여간하지 않아서, 읽어도 읽어도 또 읽어도 좀처럼 반을 넘어가지 않는다. 참고 도서 같이 읽기의 원대한 계획이 모두 스러지는 찰나, 그래도 어찌하리. 읽어보자, 조금만 더 읽어보자.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소설 속에서 빅토르가 스스로 아담이 아니라 이브고, 사탄이 아니라 ‘죄‘이며,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은 정확히 이 지점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와 같은 『프랑켄슈타인』의 핵심적인 부분이 실제로 재연하는 것은 바로 이브의 이야기가 단순히 이브가 타락했다는 이야기라기보다 이브가 여성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락하고 말았다는, 즉 여성성과 타락이 본질적으로 동의어라는 사실의 발견이다. - P435
사실상 타락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무구한 아담이 아니라 타락한 이브라는 사실을 여자들이 발견하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처럼 자신이 여자이고, 따라서 타락했고 부적절하다는 여자아이의 무서운 발견은 프로이트의 개념, 즉 잔인하지만 은유적으로는 정확한 남근 선망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리라. 분명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그리고 메리 셸리가) 이브, 아담, ‘죄‘, 사탄과 맺는 다양한 관계에 거의 기이할 만큼 불안한 자아 분석이 함축되어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남근 선망을 암시할 것이다.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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