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특별하고 독특해서 과거에 존재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존재하지 않을 유일한 배열로서의 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11쪽)’ 그리고 ‘마찬가지로 유일한 조건으로서의 너’ 같은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위인들의 개인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는 보부아르의 처녀 시절, 내가 아는 체슬러의 반항적 10대 시기, 내가 아는 아렌트가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두고 고민했던 시간에 대해 듣는 것은, 내게 그런 일이다.
도나 J. 해러웨이의 <종과 종이 만날 때>에서 아마도, 거의 확실히 가장 쉬울 것이라 예상되는 챕터 <6장 : 유능한 신체와 반려종>를 읽었다. 해러웨이는 아버지 프랭크 해러웨이의 삶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한다.
원서 읽기 친구들과 같이 읽는 <Me before You>는 이제 두 주 정도의 분량이 남았다. 미리 읽어두자, 하는 마음에 이번 주 분량을 어제 읽었는데 마음이 아팠다. 왜, 이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마음을 울리는 책을 원서 읽기 책으로 선정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약간의 원망이 차오르는데, 그런데도 주인공 윌을 미워할 수 없어서 더욱 속상했다. 교통사고로 하체가 마비되고, 얼굴과 목, 그리고 손가락 몇 개만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윌은 스위스에서의 안락사를 선택한다. 윌의 부모는 새 간병인 루이자에게 마지막 희망을 건다.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자기 집, 자신이 살았던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루이자에게 윌은 새로운 가능성, 삶의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준다. 루이자는 윌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되고, 그 길에 윌과 함께하기를 원하지만, 윌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 루이자는 자신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스위스행을 고집하는 윌을 원망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하고 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다. 소설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윌을 이해하게 됐다. 그가 자신을, 자신의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게 됐다. “I can make you happy.“라고 루이자가 말할 때, 그녀의 그 모든 말들은 100% 진심일 테지만, 그녀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루이자조차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윌은 그걸 알고 있었다.
윌은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의 몸을 사랑했다. 운동을 좋아했고, 수영을 좋아했고, 그리고 섹스를 좋아했다. 휠체어에 갇힌 삶,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해러웨이의 아버지는 생후 16개월 때 넘어져서 엉덩이를 다치고 그때쯤 앓게 된 결핵으로 8살에서 11살 때까지 가슴에서 무릎까지 단단하게 깁스로 고정된 상태로 침대 위에서 생활했다. (208쪽) 휠체어와 목발이 그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그는 휠체어에 탄 채로 농구 경기에 나갔고, 탁구 경기에 나가 3회 연속 우승을 했다. 목발을 짚고 스포츠 현장에 나가 경기를 기록했다. 스포츠 기자가 되었고, 그 일로 돈을 벌었다. 해러웨이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그의 호기심과 열정, 그의 생명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고통과 고난, 절망과 좌절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작동하는 건 아니지만, 이처럼 명확한 ‘불행’ 속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삶에 ‘직면’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이 문장이 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1930년대의 콜로라도주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3회 연속 우승을 했다. 상대가 되받아치기 불가능한 서브 - 그 서브들은 몇 년 후에 규칙 위반이 되었다 - 를 구사했고, 운 좋게 타이밍도 겹쳐서다. 한 번이라도 탁구를 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다리로 테이블 주위를 움직이는 것이 이 스포츠에서 필수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아버지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손과 눈의 동조, 균형, 근성, 상체의 강인함, 마음과 신체의 창의성, 그리고 욕망 때문이었고, 또한 자신의 신체와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단 1분이라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동의 상태(즉, 신체 바깥에서 사는 것)를 실행 가능한 선택지로 상정한 적이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213쪽)
그런 삶을 예상치 못했던 윌과 그런 인생이 삶의 기준점이었던 프랭크 해러웨이. 인생은 예상치 못했던 일들로 가득 차 있기에 다른 삶, 다른 가능성에 대해 윌이 받아들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부자의 ‘희망’일 뿐이다. 프랭크 해러웨이가 윌보다 더 강인해서가 아니라, 윌에게는 그런 삶의 ‘조건’으로 자신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주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윌이 강원래처럼 ‘살아남기’를 바라지만, 그리고 루이자는 그의 ‘김송‘이 되어줄 거라 믿지만, 이것 역시 쓸데없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 윌은 윌이고, 루이자는 루이자인 것을.
모두 다 그렇겠지만 나 역시 조용하고 우울한 한 주를 보냈다. 내가 돌아간 일상에는 나 혼자여서 얼마든지 조용할 수 있었는데, 생각 없이 켠 라디오에서 생존자 인터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흐르고. 미안하고 암담한 마음 너머에는 무력감이 자리했다. 세월호 사건 때도 그렇고 이번 사건도, 나는 마흔을 넘긴 모든 사람에게 이 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젊은이들을 지켜주지 못했고, 아이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서울 한 복판, 이태원에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말을, 오래오래 생각했다. 슬픔의 전시라는 말에 대해서도. 이 일로 인해 온 국민이 느끼는 슬픔과 아픔, 그리고 애통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인가. 그렇게 볼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잘 모르겠다. 나의, 잘 모르겠다, 는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의 애도는 무엇인가, 어떤 방식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고통을 이겨내고 슬픔을 잠재우고 그리고 떠나간 이를 애도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잊지 않겠습니다’의 세월호에 대한 마음이 24시간 365일 세월호’만’을 생각하겠다는 다짐은 아닌데. 왜 10.29 참사에 대한 애도가 ‘한정’되어야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입에 밥을 넣은 채로 애도할 수 없단 말인가. 장례식장에서도 그렇게 한다. 조문을 하고 상주에게 안타까운 심정을 전하고, 그리고 밥을 먹는다. 입에 밥을 넣은 채로도 울 수 있고, 밥을 먹으면서도 애도할 수 있다. 애도의 방식이, 애도의 표현이 어떠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다움’의 요구일 수 있다는걸. 모른다는 말인가.
나는, 밥을 먹고 책을 읽었다. 빨래를 널고 물을 마시고 책을 읽었다. 인터뷰를 들으며 한 번 울고, 진공청소기를 돌렸다. 설거지를 하면서 한 번 울고, 그리고 수건을 개어 욕실 서랍장에 넣었다. 생각만해도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는 친구들과 톡을 하면서, 힘을 내, 우리 힘을 내자, 말하고, 빨래를 하고 다시 책을 읽었다. 아침에 나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 딸을 마주한 희생자 가족들의 원한, 하늘 끝까지 사무칠 그 억울함. 친구를 잃은, 친구는 죽고 나만 살았다, 고 말하며 우는 젊은이들의 눈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소방대원과 경찰들의 죄책감.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 간 것이 잘못이 아니고, 친구는 죽고 살아남은 것이 잘못이 아니고, 최선을 다했지만 살리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님을. 밝혀줄 사람이 누군가. 누가 이 일을 해야 하나. 우리 어른들은 무얼 해야 하나,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로 이미 세상을 떠난 젊은이들을 살려낼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억울함을, 유가족의 원한을 그리고 온 국민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애도의 시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잊지 않고, 모른체 하지 않고, 이 비극적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일이 거기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10. 29 참사 희생자에게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