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꾸 눈이 침침하다. 이불 속에서 유튜브 많이 봐서 그렇다. 아롱이한테 여러 번 걸려서 잔소리 대마왕의 속사포 공격과 압수 공격을 당했는데도 그런다. 안 그러려고, 다시는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그런다. 이불 속에서 유튜브 보다가 잠들면 아침에도 개운하지가 않다. 고쳐야 할 텐데, 그만 봐야 할 텐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성경은 1권이지만, 원래는 상하처럼 구약과 신약이 있고, 각각은 39권과 27권으로 총 66권이다. 성경 66권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로마서’이다. 로마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로 알려져 있는데, 여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가졌다는 단점이 있지만, 로마서 그 자체로는 상당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흔히 이런 비유를 쓴다. 성경 전체를 다이아몬드 반지라 했을 때(다이아몬드 싫으면 다른 보석도 된다. 다만, 알반지이어야 한다. 보석이 박힌 반지), 로마서는 그 보석, 다이아몬드에 해당한다. 그만큼 기독교의 정수를 밝혀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로마서 7장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두개의 존재가 내 안에 공존한다. 하나는 선을 행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악을 행하려고 한다. 두 개의 세력 가운데 이기는 쪽이 나를 다스린다. 유튜브를 보고 싶은 마음과 책을 더 읽고 싶은 마음 중 하나의 마음이 나를 지배할 터인데, 유튜브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이긴다면 나는 유튜브를 보게 될 것이고,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이긴다면 나는 책을 읽게 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 즉 책을 보는 일을 하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것, 유튜브를 보는 악을 행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왜 선을 원한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는가.
그제는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 시몬 보부아르 책을 이번에도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고,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은 130쪽까지밖에 읽지 못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도 끝부분을 읽지 못했고, 『A little princess』은 두 쪽 읽고 반납했다. 반납하러 갔던 도서관은 조명과 바닥에 신경 쓴 예전의 그 도서관이 아니고, 집에서 더 가까운 평범한(?) 도서관이다. 아파트 숲 사이에 파묻혀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곳인지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 편이다.
책을 반납하고 책장 사이를 거니는데, 구석구석 빈 자리가 보였다. 작은 공간이라 이제 어디쯤에 어느 작가가 있는지 정도는 파악했는데, 인기 많은 몇몇 작가의 책들은 이미 꽤 해진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실망했다. 나는 책을 많이 읽고 싶지는 않다. 빨리 읽지 못하는 편이고 금방 잊어버리는 편이라서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독서를 한다. ‘놀이’로서의 독서가 내게는 가장 친숙하다. 그런데 책장을 돌아보다가 실망한 내 마음속에, 여기 작은 도서관, 사람들이 찾지 않은 이 작은 도서관의 2층, 여기 몇 개의 책장의 책들은 다 읽어볼까 하는 계획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겐 그럴 생각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간만에 둘러본 책장의 책들이 조금씩 해져 있었다. 책들이 나처럼 늙고 있었다. 나는 실망했다. 눈은 침침한데 책들은 늙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친애하는 알라딘 이웃의 서재에서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에 대한 글을 읽었다. 나는 천문학자는 아니지만 이런 의문을 자주 갖는다. 나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존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이 넓은 우주에 하나님께서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환경 파괴를 일삼는 인간만을 만드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조우할지도 모를 지구 외부의 존재에 대해 항상 궁금하다.
또 내가 궁금한 것은 흑인들이 억압자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어쩌면 그렇게 철저하게 내면화시켰는가, 이고(관련 도서 추천받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명백한 악행보다 위선을 더 미워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 막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상처 주는 말도 서슴치 않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아니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그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솔직하게’ 나쁜 말을 하며, 그리고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사람이다.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심한 말을 하거나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자리에서 나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한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을 내 앞에서 시원시원하게 하는 사람과 내 앞에서는 별말 없다가 안 보는 곳에서 나를 욕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더 싫은가. 나는 첫 번째 부류가 더 싫다. 아무리 나를 욕하더라도 내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쁜 사람과 위선적인 사람 중에 나는, 나쁜 사람이 더 싫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위선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기호나 취향이 아니라 판단이 필요한 문제에서 내 생각에 명확히 ‘아닌’ 경우에도 ‘아니다’ 라고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게 행동하는 나 자신이 싫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음… 그건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에서 더 강하게 말하지 못한다. 저건 아니다, 저건 경우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경우에도 그렇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겪으면서 나는, 자주 그렇게 생각했다. 절 별로 안 좋아해도 되니 제 앞에서만은 모진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냥 겉으로라도 평범하게 지내봐요, 우리.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은 위선적인 사람을 더 싫어하는 것 같다.
특히 최근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그랬다. 위선적이야, 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에 대해서, 그 무게와 엄중함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동의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내면과 행동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인간을 찾고 있다는 건지, 완벽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와 미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건지, 그딴 소리 할 거면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으라는 건지, 난 그걸 잘 모르겠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란 결국 가면이고, 가면이란 곧 위선인데. 그 모든 가면을 벗고 생얼을 까라는 건지, 생얼 깔 자신이 없으면 입 다물라는 건지. 나는 그걸 아직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궁금하다.
어젯밤에는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읽었다. 70쪽까지 읽었는데 완벽한 아버지와 완벽한 딸이 등장하면서, 곧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이어서 읽어봐도 별일 안 일어나면 확. 그냥 확, 빨리 읽어 버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