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을 반 이상 보낸 바로 지금, 아직 많이 읽지 못했지만, 현재 상황으로서는 2021년 강력한 올해의 책 후보다.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일간이 뭐건, 사주팔자가 어떤 격과 형식을 가졌던 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취해야 하는, 또 취할 수 있는 보편적 용신이 있다. 약속과 청소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시공간과 몸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또 말과 행을 일치시킨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 … 청소가 중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유불도를 막론하고 동양의 공부법은 청소를 ‘쿵푸’이 기초로 삼았다. 쓸고 닦고 정돈하고… 요컨대, 약속과 청소,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인생역전은 어느 정도 가능한다. (255-6쪽)
약속과 청소라니. 언뜻 들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말이지만, 운명과 사주에 관한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은 시점에, 운명과 사주를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아가고 있는 찰나에, 이런 문단을 읽게 된다면, ‘약속과 청소’를 절로 외치게 된다. 보편적 용신, 약속과 청소.
자기 계발과 관련된 내용의 영상에서는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다면, 자주 가는 장소와 활동하는 시간, 그리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라고 충고한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 나의 친구들은 나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만들어’ 간다. 그들로 인해 내 존재가 ‘형성’된다.
어떤 종류의 친구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 중 누가 사랑하는 이들의 인정을 염두에 두지 않을 채 말하고 행동하는가? 다른 사람의 동의는 일종의 두 번째 양심이 아닌가? …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도록 태어났고 우리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다. 우리라는 인물의 형태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주조되며, 색을 부여한다. 우리의 감정이 부모의 영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94-5쪽)
자고로 사람에게는 친구가 중요하고,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우리 속담에는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 이런 말이 있는가 보다. 친구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님의 연설이 기억난다. 노무현은 대통령감이 안 된다는 당내의 반발과 언론의 괴롭힘이 한참이던 시절, 문재인의 순수하고 밋밋한(?) 지지 연설 후에 노무현이 연단에 오른다.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가 경선 장소를 완벽하게 채운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나이는 저보다 적은 아주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이를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 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불멸성에 대한 부분은 가슴이 떨린다. ‘죽음’에 대한 고민을 담은 최근 페이퍼의 응답 같은 글이다. 이 문단만 보자면, 저자가 불멸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녀의 주인공 마거릿 풀러는 불멸을 허구의 개념으로 이해한 듯하다. 이는 종교의 발명, 신에 대한 갈구가 인간의 나약함 때문이라는 인문학적 전제와 일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불멸에 대한 믿음은 우리 조상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반응기제였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때 이른 죽음과 노화에 대한 날카로운 자각에서 유일하게 붙잡고 버틸 한 줄기 삶의 지푸라기였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삶의 근본적인 사실과 대면하기 시작한 마거릿 풀러는 불멸이라는 허구의 개념을 인정할 수 없었다. (176쪽)
읽는 즐거움에 대해 생각한다. 불가리아의 어느 작가,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12년에 걸쳐 책 한 권을 써냈고, 그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그녀가 매달렸던 고민을 같이했고, 그녀가 역사 속 인물 간의 연관성을 찾아낼 때의 기쁨을 함께 누렸으며, 더듬더듬 해답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때의 두려움을 함께 경험하고 있다.
이런 책을 읽을 때, 살아있다고 느낀다. 더 오래 살고 싶다. 더 많이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