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책은 이번이 네번째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침대와 책』 그리고사생활의 천재들』을 읽었는데, 그녀의 책을 읽고 페이퍼를 썼던 게 2013년이었으니까, 그 때에도 이런 식으로 화려하면서도 발랄한 산문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나는 좀 신기하고 의아했다. 저자 소개에 따르면 정혜윤은 마술적 저널리즘의 세계를 개척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마술적 저널리즘.

 


2020년 한 해가 이렇게 다 지나갈 듯 싶어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에 데일리 노트라는 걸 적어봤다. 시간별로 하루 종일 내가 했던 일들을 적어보는 거였는데, 6시 아침기상, 6 30분 아침 식사(1), 8시 아침 식사(2), 9 30분 설거지, 10시 빨래 및 알라딘, 11시 아침독서, 이렇게 적다가 매일 반복되는 식사 준비, 빨래, 설거지, 청소 그리고 간간히 이루어지는 독서를 빼놓고 보니, 마땅히 쓸 말이 없어 결국에는 아침, 점심, 저녁 메뉴만 남아 버려 데일리 노트가 식단표처럼 되고 말았다.

 



사실 우리의 운명은 늘 변화 중이다. 앞으로 다가올 나의 인생이 내 영혼의 어떤 반응일 가능성은 적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과거는 짐스러워하고 미래에는 눈을 감는다. 그러나 메모를 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하고 그 미래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가장 좋은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고 믿는다. (43)

 


정혜윤은 메모함으로써 미래를 생각하고 그 미래를 위해 힘을 모으라고 했는데, 나의 하루는 먹고, 자고, 그리고 꼭 해야만 하되 하지 않으면 티가 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어, 오늘을 어떻게 의미 있는 날로, 역사적인 날로 만들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올 한 해는 개인인 나로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의미 있고, 중요한 한 해였다. 2월에는 가족들과 터키를 다녀왔고, 3월에는 이사를 했다. 상반기에만 아이들 개학이 3번 이상 연기되어 아이들이 계속 집에만 있었고, 여름 휴가도 가지 못했다. 8월에는 부산에 다녀왔고, 추석에도 옴짝달짝 못 했다. 평생을 교회--학교밖에 모르고 살던 내 인생에 처음으로 교회가 빠져버려, 교회 의자에 앉아 예배하던 시간마다 허전한 마음을 흘려 보내야만 했고, 그리고 이렇게 찬 바람이 부는 가을 앞에 섰다.

 

초반에 확진자가 많아 걱정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는 끈질긴 확진자 추적과 국민들의 협조로 도시 봉쇄나 셧다운 없이 우리나라는 코로나에 잘 대응하고 있다. 감히 세계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BTS가 빌보드차트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빅뱅, 엑소, 세븐틴, 아스트로, 슈퍼주니어, 샤이니, 인피니트, 블락비 등등 우리가(아니지,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비슷한 보이그룹을 가진 우리로서는 BTS가 수많은 보이그룹 중의 하나일지 모르지만, 현재 BTS는 전 세계 최고, 최대 음악 시장에서 가장 탐내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우리의 예상보다 BTS는 훨씬 더 유명하고, 훨씬 더 대단하다.  

 

이만큼이 과거의 기록으로서의 메모이다. 사건과 사실의 기술로서의 메모. 하지만 정혜윤이 말하는 꿈의 기록으로서의 메모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꿈은 결심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실패의 기록일 수도 있을 테니까. 꿈만큼 실패도 우리 인생에서는 소중하니까.

 


 

아이와 함께 치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아이는 게임에, 나는 책에 빠져서 내리는 역을 지나쳐 버렸다. 아이에게 한참 잔소리를 하고, 반대방향 열차를 타고 돌아왔다. 세일행사하는 서브웨이 터키 샌드위치 2개를 사고, 빼빼로 3개를 사면서 아이와 화해했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 속상했던 일들을 정혜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해주는 문단을 만나 돌아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나도 메모를 해야겠다. ‘아무튼, 메모의 길로 들어서겠어. 작은 결심을 하기도 했다.

 

 



어제 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을 아프게 했던 박지선씨의 일을 말하고 싶다. 그녀의 죽음이, 그녀와 그녀 어머니의 죽음이 안타깝다. 고통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니까. 죽음이라는 커다란 문 앞에서 당신 마음을 헤아린다는 말, 이해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떠나버린 그녀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 그녀 덕분에 웃을 수 있었던 시간조차 어디로든 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꼭 그녀의 이름을 여기에 남겨두고 싶다. 여기 내 방, 내 서재, 내 페이퍼에

 


 

멋쟁이 희극인 박지선씨, 고마웠어요.

이제 쉬어요. 이제 아프지 말고 편히 쉬세요.



어느 날 정말로 ‘갑자기 결심했다. 달라지기로, 뭔가를 하기로, 그만 초라하게 살기로, 제일 먼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는 일을 그만뒀다. 누가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관찰하는 일도 그만뒀다. 누군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고 "넌 내게 딱걸렸어!" 기뻐하는 일도, 나쁘게 생각한다고 앙심 품는 일도 그만뒀다. 남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그만뒀다. 삶이 간결해져서 좋았다. 그 대신 앞으론 뭘 할까만 생각했다. 세상 어디선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거기 가서 그 일을 잘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이 필요한데 세상이 과연 나를 필요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세상에 관심을 가질 마음이 있는데 세상도 나에게 관심을 가질 마음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나에겐 사랑이 필요한데 누가 나를 사랑해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때 당시 나는 더는 무의미하게 살고 싶지 않았고, 무의미하게 살지 않은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믿었다. - P32

우리는 파도를 견뎌낼 것이다. 우리는 작은 새들이 거친 바닷바람 위로 가볍게 놀듯이 떠오르는 것을 배울 것이다. 우리는 고래처럼 멀리 갈 것이다. 도리가 없지 않은가? 다른 방법이 없다. 하기로 한 일이 있다면 세상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해야 한다. 지금 해야 할 일, 그 일을 잘해내야 한다. 너무 큰 기대는 말고, 거창한 의미 부여 없이. 예측불허를 견디며. 그일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해야 한다고 믿으며, 나는 네루다의 말처럼 이런 "슬픈 눈동자를 보면서 꿈꾸는 법을 배웠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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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4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늘 알라딘이 있지만 단발님과 제가 본격 알라딘을 하는 시간은 다르네요.
많은 것들이 이번 해에 변했지만 여성들의 죽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제만 해도 또 유명 가수의 불법촬영에 한 여성이 자살을 선택했죠. 남자들이 아무리 감성 쳐바른 가사를 써내서 노래한다해도 여성들을 범죄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게 정말 구역질나는데 이게 변하질 않네요.
이번 해가 전체적으로 우울하지만 요 며칠은 특히 더 우울해요.

우리 서로 격려하면서 잘 지내봅시다, 단발머리님. 남은 2020년도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들도요.

단발머리 2020-11-04 09:24   좋아요 0 | URL
기사 읽고 나니 너무 암담하고 답답하더라구요. 그 남자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런 경우가 왜 이렇게 많은지 곰곰히 생각하면 더 우울하구요 ㅠㅠ 연인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니....

우리 서로 격려하면서 잘 지내요, 다락방님. 그래도 정신으로요. 그래도, 다시 힘을 내고, 그래도, 다시 서로를 격려하면서요.

2020-11-04 08: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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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4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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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1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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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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