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비교적 순한 맛 정의인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성적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의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가 ‘페미니즘은 이론이고, 레즈비어니즘은 실천이다’라고 말했다(200쪽)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저자 로즈마리 퍼트넘 통은 삶과 사랑에 대한 우머니스트의 견해는 모든 구분되는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우머니스트는 여성이 될 수 있는 페미니스트 중 가장 좋은 유형이라고 말한다.(226쪽)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백소영의 ‘살고 살리는’ 우머니즘에 대한 설명과 비슷하다.
이렇게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우머니스트들은 말해요. “여성을 노새로 응시하는 ‘강한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왕으로 응시하는 ‘부드러운 가부장제’는 아예 경험해 본적도 없다. 이 열악함에도 ‘생존’을 위한 창조적 전략을 상상하고 실천했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힘이 우리를 지켜 내고 살려 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49쪽)
우먼니스트가 페미니즘을 말하면서도 ‘흑인 여성’만이 아니라, ‘흑인 남성’까지를 끌어안을 수 있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1974년 흑인 페미니스트 레즈비언들이 설립한 ‘컴바히강집단’은 여성의 재생산 권리 뿐 아니라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 인종에 따른 학교 분리,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들에 대한 경찰의 잔인성,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건설 일자리 같은 일반 사회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였다(187쪽).
역사적으로 백인 남성과 백인 여성, 그리고 흑인 남성은 흑인 여성의 억압자였다. 흑인 여성들에게 유색인종으로서의 차별과 여성으로서의 억압은 교차되어 나타났다. 여성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지만 인종에서 확연히 구별되어 다른 사회적 지위에 있는 백인 여성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복잡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이는 가정 내 억압자인 흑인 남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동들에 대해 페미니즘 운동은 함께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다. 백인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은 그녀의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동생이자 아들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외모의 단일 민족으로 이제껏 살아온 우리나라에서도 집집마다 문화가 다르다. 아버지와 식사 할 때는 채널 선택권이 아버지에게만 있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퇴근길 아버지에게 떡볶이, 순대, 커피, 화이트, 노트를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심부름 시키)는 가정도 있다. 가정마저 이처럼 문화와 환경, 상황이 제각각인데, 전 세계 인구의 반을 아우르는 여성의 경험이라는 것은 얼마나 넓고 다양할 것인가. 여성 공통의 경험 속에서 억압의 요소를 찾아내고, 이름 붙이고, 싸우자. 억압의 종식과 새로운 세상의 구현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 살리고 살려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