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부란 무엇인가
워낙 출간 전부터 화재가 되었던 책이고, 이웃님 서재에서 관심을 끄는 피드가 자주 올라와서 구입해 읽는다. 공부란 무엇인가. 이 땅의 모든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싫어할 제목이며, 이 땅의 모든 학부모들이 좋아할 제목이다. 늦은 오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추천했던 이름 모르는 어떤 교수는 부모님들이 읽으시라고, 부모님들이 읽으시면 좋은 책이라고 말했다. 부모님으로서 읽는다. 해야할 공부를 진작에나 마쳤지만, 한국에서 요구하는 공부를 내 아이가 잘 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으로. 실제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공부는 다른 것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듣기 위해, 공부는 생각보다 어렵고 지루한 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숨죽여 책에 집중해 있노라면, 세상이 고요해지고, 독서가는 참평화를 얻는다. 미국의 작가 수전 손택은 말했다. “독서는 제게 유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139쪽)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좀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조금 남는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여러 장 나오는데, 특히 몇몇 사진은 인쇄면을 보는 것이지만 오랫동안 쳐다보게 되었다. 오래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2. 철의 시대
학교에서 『포』를 읽었을 때는 작품이 주는 특별함이 좋았다. 다니엘 드포의 『로빈슨 크루소』 다시 쓰기 작품이라서, 로빈슨 크루소와 다니엘 드포 욕하다가 끝나는 소설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존 쿳시는 다른 느낌이다. 교수직을 은퇴한 커런 부인은 미국으로 이주해 가끔 소식을 전하는 딸에게 편지를 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평생을 가해자의 입자에서 살아왔던 그녀가 진통제 없이는 살 수 없는 암 환자가 된 지금, 흑백 갈등의 현장에서 흑인 아이의 상처를 여며주며 아스팔트 위를 적시는 그 아이의 피를 보며 딸에게 말한다. 네 피나 내 피와 똑같은 피였다(82쪽).
만약 거짓말과 애원과 핑계가 말들 사이에 짜여 들어가 있다면, 그걸 유심히 들어보렴. 그걸 그냥 넘기지 마라. 그걸 쉽게 용서하지 마라. 모든 것을, 이 간청마저도, 차가운 눈으로 읽어라. (134쪽)
커런 부인은 반복해서 자신을, 백인을 쉽게 용서하지 말라고 말한다. 백인으로서의 참회조차 사치스러워 보일까 봐 그녀는 반복해서 말한다. 차가운 눈으로 읽어라. 미안하다는 말조차 쉽게 하지 마라. 쉽게 용서받으려 하지 마라.
같은 여성이었던 가정부 플로렌스가 커런 부인의 친구가 될 수 없었던 이유와 커런 부인의 최후를 함께 한 사람이 흑인 남성 퍼케일이라는 점은 화자인 커런 부인이 백인 여성이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성, 계층, 인종을 가로지르는 편견과 차별, 그 모든 혐오의 벽을 넘어서는 화해와 포옹. 우리 사이에서도 진정한 화해가 가능할까.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3. 기억전달자, 더 기버,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는 차이로 인한 차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성욕이 억제되며, 고통이 제거된 유토피아 사회를 보여준다. 출산, 양육, 결혼, 사망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그 곳에서 열 두 살이 된 아이들은 각자의 적성과 특기에 따라 직위를 부여 받는다. 다양한 여러 직위 중에 ‘산모 직위’(Birthmother)를 부여받은 여자 아이들은 적정한 시기에 공동체의 아이를 ‘임신’한다. 임신 기간 동안에는 최고의 음식을 공급받고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아이 세 명을 낳은 후에는 노인의 집에 들어갈 때까지 평생 육체 노동자로 살아야 한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낳은 아이를 볼 수 없다. 아이를 신청한 가정들 중, 위원회가 배정한 가정에서 아이들은 그들의 아이로 양육된다.
임신의 과정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에 가까운 형태로 통제되고 있다. 정자를 자궁 안에 직접 넣어주는 인공수정은 물론이고, 배란유도제를 투입한 후 난자를 채취하고, 남성의 정액을 채취해 배양관에서 배양한 후, 여성의 자궁으로 이식해 임신이 되게 하는 시험관 아기 시술도 이제는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이전에 한 명의 여성에게서 가능했던 세 가지 과정, 유전자를 제공하고, 아이를 임신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점차 분화되어갈 때,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말처럼 체외에서 결합된 난자와 정자가 여성의 몸 밖에서 자라게 될 때, 여성들은 성 계급에서 탈출해 자유로워질 것인가. 그의 주장대로 출산의 기쁨에 대한 ‘가부장적 신화’가 붕괴되고, ‘야만적인’ 임신이 흔치 않은 일이 될 때, 출산 과정에서 탈출한 여성은 정말 자유로워질 것인가.
아니면, 창조 과정의 일부분만을 담당하는 부품의 지위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과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주인공으로 등장한 남성들이 출산 현장에서 산파들을 쫓아냈던 역사를 기억할 때, 미래 또한 낙관할 수만은 없다.
가부장제 사회는 임신에 의한 관계를 중요하지 않은, 특별히 부모 됨의 의미를 갖지 않는 단지 생물학적인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스트들은 서술했다. 그러나 사실상 임신에 의한 연결은 극도로 중요한 일이라고 그들은 강조했다. … 임신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가지는 그러한 종류의 경험적인 헌신(lived commitment)은 유전학적인 또는 의도적인 부모가 아이에게 가지는 그러한 종류의 사색된 헌신(contemplated commitment)과 적절하게 비교될 수 없다.(110쪽)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와의 10개월의 동거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환희의 순간인 것 또한 사실이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인간 경험으로, 인간만의 경험으로 볼 것인가. 자연적이라고 혹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요즘, 여성 고유의 능력이었던 출산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Birthmother, 혹은 산모 그리고 또는 어머니. 셋이 하나였던 시대에서 각각으로, 각각의 작업을 담당하는 부품의 하나로 '어머니'가 분화되고 있다.
4.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사람은 당장 내일 일을 알 수 없듯이, 펴보지 않은 책의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책은 펴 보아야 한다. 펴서 한 쪽, 두 쪽, 적어도 세 쪽은 읽어봐야 계속 읽을 책인지 포기할 책인지 알 수 있다.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꼭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던 이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는데, 첫 쪽을 펴고 나서 똑바로 다시 앉았다. <들어가며 : 문턱 너머 저편> 에이드리언 리치다. 맨 뒤를 펼쳐본다. 1판 1쇄 발행, 2017년 9월 8일. 1판 7쇄 발행, 2019년 8월 5일. 인문학서적이, 그것도 여성 철학자들을 다룬 이 작고 예쁜 책이 7쇄를 찍었다. 독자들이 알아본 진정한 베스트셀러 아닌가, 하고 작가를 찾아보니 이미 여러 권 책을 출간했던 작가다. 눈 어두운 독자는 또 다시 감탄하며 절망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다루는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가 독일 학술구제협회의 지원을 받아 착수한 라헬 파른하겐의 전기 집필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라헬 파른하겐에 대한 전기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유대인,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 있듯,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이중의 굴레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동시에 유대인이 아닌 자리에서 비판적 거리를 갖고 성찰하면서, ‘유대인’을 정치 사회적 문제로 심화한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문제는 개인적으로는 결코 해결 불가능하며, 입장과 상황이 야기한 절망은 우울한 감정만을 불러일으킨다. (24쪽)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고, 독일어를 자신의 모국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녀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학 강단에 설 수 없었을 때, 본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이 이유가 자신의 삶을 제약하고 구속할 때, 그 때서야 비로소 아렌트는 자신을 유대인으로 분명하게 정체화한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프리모 레비는 사람들의 질문, 왜 유대인들은 더 빨리 독일의 세력이 확장되어 가는 유럽에서 탈출하지 않았느냐,는 어이없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번잡스럽고 고통스러운 일, 이사 혹은 이주, 또는 이민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도 힘든 일이었다. 독일 유대인들 거의 모두가 중산층으로서 삶의 기반이 축적되어 있는 독일을 떠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독일을 그들의 ‘조국’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유대인이기도 하지만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인이라고 믿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의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이 책에서 다루는 두 번째 철학자인데, 그의 주장만큼이나 그의 삶도 역동적이다. 40대 후반의 스피박이 델리의 길거리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 인도의 관습을 파괴하는 그녀에게 나이 든 남자, 상류계급 사람들이 다가와 침을 뱉는다. 그녀는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함께 침을 뱉었다.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허겁지겁 ‘달아나버렸다’. 반면 콜카타에서는 침을 뱉지 않고 말을 한다. 그래서, 스피박 역시 그들을 향해 아주 우아하면서 음탕한 벵골 말로 응수한다.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어서 벵골과 콜카타를 달리는 철학자. 욕하고 침을 뱉는 남자들에게 똑같이 욕하고 침 뱉는 철학자. 나는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헉헉거리고, 찰진 욕도 잘 못하고, 거리의 거친 남자들과 욕으로 한바탕 배틀을 벌이기에도 용기가 부족하지만, 일단은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읽고, 그 다음에는 운동화를 신고, 그 다음에는 달리기를 해봐야겠다. 읽고 나서 달리기. 읽기와 달리기. 읽기 다음에는 달리기. 읽고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