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구에 대한 강간과 여성에 대한 강간은 밀접하게 연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왔다. (17쪽)
읽었는데 리뷰를 쓰지 못한 책 중에 기억에 남는 걸 고르자면 이렇게 3권이다.
읽었던 책이 별로라면 리뷰를 쓸 필요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건 아니다, 할 정도로 이상한 책이 아니라면 역시 리뷰를 쓸 필요가 없다. 당연하다. 나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리뷰를 써야 하고, 꼭 쓰고 싶은데도, 쓰지 못한 책이 있다. 쓰지 못할 정도의 충격을 주는 책들이 그렇다.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그런 책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고민과 갈등을 단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적이고 불안정한 핵을, 우리는 머리에 이고 산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철저한 무지와 대안 부재에 난 며칠 동안이나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지구를 떠나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전문가가 말했다. 일본은 탈핵이 아니라, 탈출을 말할 때이다. 핵의 위험이 이렇게 상존하고 있는데도 우리의 평화는 너무 조용하다. 지옥이 바로 문 앞에 있는데도. 월성과 고리, 그리고 한빛.
체르노빌의 참사는 특히 이러한 전쟁기술과 전반적인 산업의 전사(warrior)체제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와 저항을 자연스레 불러일으켰다. 핵기술이 폭탄으로 사용될 때는 나쁜 것이지만 북(반구)의 가정의 가전제품을 작동할 전기를 발생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좋은 것이라는 허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70쪽)
저자는 지구에 대한 인간의 침략과 침탈을 강간이라고 규정한다. 자연의 것을 빼앗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해 버리는 행위의 잔혹함을 ‘강간’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서구에서 여성과 자연을 등치시키고, 동양과 자연을 등치시키는 과정을 통해 여성에 대한 지배와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해왔던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모두 정희진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도 있으니 아주 간단하게만 덧붙이자면.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모두 정희진처럼 스마트폰 없이, 자동차 없이, 한겨울에도 스킨로션 하나 없이, 새 옷을 사지 않고, 오직 일용할 양식만을 구입하고 소비하는 삶을 살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페미니스트가 그런 정도의 실천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페미니스트라고 모두 채식주의자인것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라고 모두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것도 아니다. 맞다. 나는, ‘페미니스트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의 비겁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읽기에 많이 부담스러운 책이지만, 지구 파괴와 인류 공영, 에코 페미니즘의 실현과 가능성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내 삶의 작은 영역에서만이라도 가능한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겠다는 결심 정도는 가지고 간다. 이를테면, 일회용품 덜 사용하기나 건조기 덜 사용하기 같은 것.
나는 아직도, 두 자리수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