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시즌제 드라마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에서 앤은 길버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앤이 갈길 몰라 헤맬 때, 여러 번 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줬던 길버트는 크게 실망하고 다른 여성과 잠시 교제한다. 다른 여성과 팔짱을 끼고 자신 앞에 나타난 길버트를 본 후에, 앤은 길버트를 그 여성에게 밀어버린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제 막 자신이 길버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데, 이젠 길버트가 여기 없다. 사실 길버트는 한결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시선은 오직 앤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앤을 사랑한다. 자신의 사랑이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항상 너였고, 앞으로도 너일 거라고, 그렇게 말한다.
앤과 길버트의 사랑은 너무 예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임을 고려한다 해도, 문화 특히 대중 문화를 통해 이성애의 옳음, 정당함, 자연스러움이 강요되는 사회임을 인정한다 해도, 앤과 길버트의 사랑은 너무 예쁘다. 오해는 풀려야 하고, 진심은 확인되어야 하고,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 하지만.
『가부장 무너뜨리기』의 저자들은 가부장제가 소년에게는 앎을, 소녀에게는 돌봄을 배당하는 젠더 이분법의 내면화를 강요함으로써, 소년에게는 거리두기와 소외를, 소녀에게는 절망과 침묵을 강제한다(68쪽)고 주장한다. 가부장제가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소년을 밀어내고, 소녀를 넘어뜨린다는 점을 강조한다. 『페이드 포』에서 레이첼 모랜은 정착하고 싶어하는 인간적 욕구가 여성에게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377쪽)고 말한다.
『종의 기원을 읽다』에서 양자오는 진화 과정에서 여성이 발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임신 여부도 한시적으로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 해서 남성이 큰 충격을 받고, 유전에서 우세를 확보하기 위해 자기 여성을 관리하는 또 다른 행위를 발전시켰다(443/518)고 말한다. 남성은 생식 기회를 빼앗기지 않고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 양육 과정에 더 많이 개입하고, 여성은 남성의 양육 투자로 인해 자신과 자식의 생존을 보전받았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부일처제를 도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남성의 생식 우세로 따져 볼 때 남성이 가장 바라는 일은 모든 여성이 자기와만 교배하는 것으로, 남성은 자기 여성과 교배한 후에는 몰래 다른 남성의 여성을 빼앗고 싶어 한다. 이렇게 해야 자기 자손을 가능한 한 많이 낳고, 또 다른 남성이 그 아이들을 키우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이 자신의 여성을 떠나 다른 남성의 여성을 노릴 때, 자신의 관리에서 벗어난 자신의 여성을 다른 남성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은 인간이 일대일 관계를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이 관계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373/430)
정말 그런가.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건 ‘여자’ 뿐인가. 남자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가.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여러 명의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는 것만이 그들의 지상 과제인가. 진실하고 친밀한, 굳건하고 영속적인 일대일 관계를 원하는 건 정말 ‘여자’뿐인가. 길버트는 예외적인 남자인가.
벨 훅스는 『올 어바웃 러브』에서 말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커플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해보고 내린 결론은, 진정한 사랑의 가장 공통된 특징은 ‘무조건적’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에 대해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는다. 서로가 상대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건설적으로 투쟁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 꽃피는 것이다. (234쪽)
하지만, 벨 훅스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시하는 그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벨 훅스의 사랑은 열정적 감정과 낭만적 분위기, 강렬한 애정을 뜻하는 사랑과는 다른 ‘사랑’일 수 있다. 만약 다른 질문이라면 답은 좀 더 간단할 수 있다. 낭만적 사랑의 감정과 태도가 지속가능한가.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지속가능한가.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답은 불가능하다,에 가깝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의 저자 최연지가 말했던 것처럼.
근데 그 사랑하는 사람과 나흘 이상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비비고 똥 교대로 싸고 하면
이 몰아, 접신의 경지가 매우 훼손되는 것이다.
한계점은 3일 정도다. 생선도 손님도 사흘 지나면 냄새가 난다. (Fish and guest go bad in three days.)
한 사람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은 절대 불가능하다. 결혼 축사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 운운도 평균수명 49세 때 얘기다. (56쪽)
그녀의 말대로라면, 낭만적 사랑의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3일이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아주 길어야 1년이다. 길어야 1년이라는 의미는 짧으면 6개월이고, 3개월일 수도 있으며, 한 달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낭만적 사랑의 시효는 최대 길어야 1년이다. 원래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낭만적 사랑이 끝난 후에도, 그러한 사랑이 사라진 후에도, 애정이 우정과 신뢰로 변한 후에도,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는 이어질 수 있는가. 그것을 원하는 건 ‘여자’ 뿐인가. 아니, 남자 뿐인가. 그런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건 남자 뿐인가. 길버트 뿐인가.
참다한홍삼 광고 카피는 이렇다.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아내와 남편은 굳게 맹세했다. 형제가 되기로. 의리로 살아가는 모든 부부에게. 다시남자. 다시여자”. 결혼한지 3-4년 됐을 때 친한 친구가 말했다. 남편이 오빠 같다고. 친구에게는 실제로 오빠가 있고, 남편은 오빠처럼 2살 위다. 오빠 같은 남편. 남편은 이제 가족이 되었다. 이 세상 하나 뿐인 진정한 사랑이 의리로 살아가는, 우정으로 살아가는, 동료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그림 중 많은 장면이 문화적으로 주입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정상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혼과 가정은 가장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왔다. 이미 그 토대는 흔들리고 있고, 사회는 다른 형태의 가정을 용인하는, 용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의 마리 루티의 주장처럼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생기 있고, 활력이 넘치고, 자신을 탈바꿈시키는 경험이라 해도 그 관계가 지속되지 않았을 때, 그 관계는 실패(250쪽)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혼 이외에 사랑의 관계를 영위하는 더 나은 방법이 존재할 수도(251쪽)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래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진짜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 시작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아무튼 엔딩이라는 엔딩은 모두 해피엔딩이다. 피할 수 없는 시선과 주위를 다 울리도록 나대는 심장. 이 모든 유혹과 손길은 유전자의 속임이고, 생존을 위한 거짓말이고, 그리고 그런 몰아와 접신의 황홀경은 3일 밖에 이어지지 않는데.
그럼에도 사랑,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지치지 않는 갈망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 사람이 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브라질 남자 펠리페의 속삭임을 듣고 싶고, 또 그에게 똑같이 답하고 싶은 마음.
당신이 아직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날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거 알아. 하지만 솔직히 난 그게 별로 신경쓰이지 않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에 대한 사랑은 마치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해. 날 사랑하는 건 그 애들의 의무가 아니지만, 그 애들을 사랑하는 건 내 의무인 것처럼. 당신은 날 원하는 만큼만 좋아하면 돼.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고, 앞으로도 언제나 사랑할 거야. 설사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당신은 이미 내 인생을 돌려줬어. (465쪽)
아니면, 길버트의 편지. 길버트가 앤에게 썼던 편지처럼 고백하고 싶은 마음. 그 고백을 듣고 싶은 마음. 네가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게서 같은 말을 들을 거라 기대하진 않아. 하지만 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난 약혼하지 않았어,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고. 그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말이야. 앤, My Anne with an e. 나에겐 항상 너였고, 앞으로도 너 뿐이야.
열병처럼 찾아오는 이 모든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질 테고, 결국에는 모두 사라지는 그 무엇이라면 그 감정은, 그 열정은 왜 찾아오는가. 왜 이렇게나 한 사람을 무참하게 감싸는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휘몰아치는가. 끝없이 절망하게 하는가. 또한 기쁨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