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인식의 변화는, 혁명은 언제나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여자는 스스로를 옥죄는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는가. 왜 여자는 ‘타자’라 부르는 남자의 부름에 응답하는가. 왜 여자는 남자의 언설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가. 여자의 이런 복종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런데 왜 남녀 사이에는 이런 상호성이 인정되지 않는가. 어째서 그 중 한쪽만이 자신을 유일한 본질로서 긍정하고, 그 상호관계의 상대에 대해서는 일체의 상대성을 부정하고, 상대를 순수한 타성으로 정해 버리는 것인가? 왜 여자들은 남성의 지배에 항의하지 않는가? 어떤 주체도 자발적으로 단번에 비본질적인 개체로 변화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기를 ‘타자‘로 정하는 ‘타자‘가 ‘주체‘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주체‘에 의하여 ‘타자’가 ‘타자’로서 정의되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가 주체로 변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타자가 상대의 그러한 관점에 복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자의 이런 복종은 어디에서 왔는가? (16)
거다 러너는 그의 책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사회에서의 종속적 위치에 대한 여성의 각성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3500년 이상) 지연된 이유(19쪽)”를 이렇게 답한다.
재생산능력의 차이, 특히 여성이 아기를 젖 먹여 키우는 능력의 차이로 인해 최초의 성별노동분업이 생겨났으며(77쪽), 이러한 생물학적 성차에 근거한 초기의 성별노동분업은 편리하였으며(functional), 그래서 남성들과 여성들이 다같이 받아들일 만했다는 것이다. (78쪽)
생리 중인 여성은 사냥 중에 사냥꾼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불편을 초래했고, 임신 중인 여성은 사냥 활동에 부적합했으며, 출산 후에는 아이에게 젖을 먹여야만 해서 사냥활동이 불가능했다. 수렵, 채집으로 생활하던 당시로서는 생물학적 차이에 의한 역할 분담이 합리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농경 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여성의 위치에 변화가 생긴다. 사유 재산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면서 ‘노동력의 재생산자’에 대한 점유가 각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생존 조건이 된 것이다. 출산은 여성만 할 수 있는 활동이다. 사유재산의 첫번째 전유는 재생산자인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전유로부터 시작되었다.(91쪽)
또 하나의 이유는 여성들에게는 그들만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역시 거다 러너의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다.
근본적으로 생각이 있는 여성들은 방어 논리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만 했다. 결국 여성들은 자신들이 집단 실체임을 깨닫는 데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의 지적 능력은 철저하게 억제되고 왜곡되었다. (25쪽)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인종, 사회, 문화, 종교의 영향 아래 있다. 내 생각이라고 말하는 내 ‘생각’의 상당 부분이 부모를 통해 전달된 전통 가치이거나, 교육기관을 통한 사회 통념, 매스미디어를 통한 프로파간다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 여자들은 가정과 학교, 문화를 통해 이식된 사상과 이념을 문화로서 흡수한다. 여자니까 어떠해야 한다,를 내면화한다. 여자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를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인다. 속으로는 성공한 여자가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공한 여자는 독한 여자라고 같이 욕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 쉽게 동의한다.
시작은 질문이다. 여자의 복종은 어디에서 왔는가. 마지막 또한 질문일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과 사회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여자들은 이러한 복종의 상태를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