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휴가책 후보 3번은 ‘여성주의책 같이 읽기’ 8월의 도서 중 하나인 『허랜드』이다.
표제작 <허랜드>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처녀 생식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하는 미지의 여인국에 대한 이야기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의 효시로 회자되는데, 『이갈리아의 딸들』, 도리스 레싱과 어슐러 르 귄의 작품 등 ‘여자들만의 세상’을 그린 수많은 소설들의 모델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알라딘 책소개)
여자들만 사는 미지의 세상, 그녀들의 외모는 어떨까. 그녀들은 단발.
모자를 쓰지 않은 그녀들의 단발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녀들은 가벼우면서도 견고해 보이는 소재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튜닉에 반바지를 입고서 행전을 동여맨 복장과 흡사했다. (33쪽)
그녀들이 마련해 준 잠자리는 어땠나. 견고하고 푹신함.
가장 강하게 든 느낌은 몸이 아주 편안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길고 널찍하고 평평한 그 침대는 견고하면서도 푹신했다. 이불은 최고급 리넨 섬유로 만든 포근하고 가벼운 누비이불 또는 담요로 보였고, 침대 시트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했다. (49쪽)
여성이 지배하는 세계, 여성만 존재하는 허랜드에서 ‘여성성’은 어떻게 발현될까. 여성성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이므로 허랜드 여성에게는 ‘여성스러움’이 필요 없다.
그녀들이 본질적으로 지닌 모성애가 문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여성스러움’이 현저히 부족했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이내 우리가 너무도 좋아하는 ‘여성스러운 매력들’은 사실 전혀 여성스럽지 않으며 남성성이 반영된 결과물일 뿐임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즉 여자들은 남자들을 즐겁게 해줄 의무가 있어 그런 특징들이 발달된 것이고 이러한 특징들은 여성 스스로 자아실현을 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105쪽)
처녀생식과 공동육아를 통해 허랜드가 존립할 수 있다면, 허랜드에서 섹스란 어떤 의미일까. 어머니가 되기 위한 과정 혹은 사무, 일.
“미국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이 어머니가 되는 것, 그러니까 부모가 되는 것과 관계 없이 표출된다는 말인가요?”
“물론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둘 사이의 깊고 달콤한 사랑이에요. 물론 아이를 원하고 언젠가 아이를 갖게 되겠죠.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 그렇지만 너무나도 자연을 거스르는 일인걸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떠한 생명체도 그러지 않아요. 미국에서는 다른 동물들도 그런가요?” (235쪽)
긴긴 방학, 시간은 많고 날은 더웠다. 안방 에어컨을 켜고 온 가족이 침대에 눕는 밤이면 안방은 ‘명화극장’이 되었다. 알라딘의 지니를 따라 윌 스미스의 영화 몇 편을 보았고,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아바타>를 보았다. 인간이 도달한 최고의 기술력을 이용해 나비족에게 접근해 자신들이 원하는 자원을 얻으려는 지구인. 예상대로 주인공은 나비족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나비족이 신성시하는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는 장면에서 나비족이 느꼈을 두려움과 절망이 작은 화면으로도 그대로 전해져 마음이 좋지 않았다. 새로운 문명이 내 삶을 압박해 들어올 때, 그 문명이 강력하고 폭력적일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어란 말인가. 쓰러지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란 말인가. 꼬박 이틀을, 나는 나비족이었다.
여자만 사는 세상 ‘허랜드’는 단정하고, 조화로우며, 아름답고, 깨끗하다. 태곳적 자연의 모습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기에 ‘여성=자연’ 이라는 도식이 조금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1915년에, 무려 1915년에 자애롭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여성만의 세계, 여성만의 세상을 꿈꿨던 샬롯 퍼킨스 길먼의 식견에는 감복할 수 밖에 없다.
2019년 올해의 휴가책 후보 3번은 『허랜드』이다.
그녀가 집요하게 물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뭘 하나요?"
"집과 아이들을 돌보죠."
엘라도어가 물었다. "동시에 두 가지를요?" ….
알리마가 승리를 거둔 듯 말했다. "거 봐요! 그럼 아이가 한 두 명이거나 전혀 없는데도 서너 명의 하인을 둔 여자들은 뭘 하나요?" 우리는 가능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정직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사회적 의무’를 우리와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님 접대, 파티 준비, 여가 생활 등을 사회적 의무로 둔갑시켜 들먹이는 것으로 그녀들의 질문에 답했던 것이다. (169-170쪽)
이곳에는 남자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삶의 큰 부분인 남자들의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우리는 그건 이 곳 여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은연 중에 생각했다. 그들에게 남자는 거의 무의미한 존재란 사실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는데, 테리만이 그 사실을 영영 깨닫지 못했다. 남자들, 남자, 남자다운, 남자다움 등 남자란 말에서 파생된 여러 단어들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세상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거대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남자로 성장’하고 ‘남자답게 행동’한다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 방대하다. 이 말의 거대한 배후에는 열을 맞추고 줄을 바꾸며 행진하는 남자들, 새로운 바다로 배를 몰아 항해하는 남자들, 미지의 산을 탐험하고, 말을 길들이고, 소를 몰고, 땅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며, 대장간과 용광로에서 노동하고, 광산을 파고, 도로, 다리, 높은 성당을 건축하며,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온 대학에서 가르치고
온 교회에서 설교하는 남자들, 즉 온 세상에서 온갖 일을 하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 즉 세상 자체가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여자란 말을 들으면 한 성별로서만의 여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지난 2천 년 동안 전혀 방해받지 않고 여성의 문명을 구축해온 이곳의 여자들은 여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들이 이루어낸 사회 발전만큼 거대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남자라는 단어는 단지 한 성별로서의 남성을 의미할 뿐이었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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