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책을 읽게 됐다. 복잡한 사거리 한 쪽, 약국과 김치만두집 사이에 서서.
발을 삐어 병원에 가야겠다는 큰아이와의 약속 장소에 나와보니 아직 20분이 남았다. 국지적으로 물폭탄이 쏟아진다더니 하루 종일 비는 안 내려 장우산은 거추장스럽고, 노트북을 넣은 코끼리 에코백은 자꾸만 아래로 처진다. 이제 18분 남았다. 18분이 남았는데 배터리가 4%. 오는 전화를 한 번 받고, 한 번 정도 전화할 수 있으려면 4%는 고수해야 한다. 아직 17분이 남았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붐비는 사거리 한 쪽에 서서 책을 펼친다. 얼마나 읽었을까. 글자를 따라 어디만큼 갔을까. 이런 말이 들리는 듯하다.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 누군가 내 왼팔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 책을 읽고 있어서, 시선이 아직도 책에 가 있어서.
눈을 들어 보니, 내가 좋아하는 집사님이 서 있다. 집사님~~ 어머, 집사님~~ 누가 여기에서 이렇게 책을 읽나 했더니, 집사님이네. 아, 그게, 제가 지금 **이 기다리는데, 원래는 기다릴 때 핸드폰 보고 있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서요. 그래서 어쩌구, 저쩌구. 지금 (집에) 가시는 길이에요? 어쩌구, 저쩌구.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 집사님이 버스 타는 것을 지켜보고 원래 서 있던 자리로 가기 위해 돌아선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거리에 서서 책 읽는 사람이 아닌데, 책을 막, 열심히, 그렇게 읽는 사람이 아닌데. 헤어질 때, 집사님이 잡은 손을 놓으며 했던 말이 자꾸 걸린다.
책을 읽는구나, 책을. 책을, 읽는구나.
생각해보면 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면서 살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 다른 사람의 평가에서 좀 자유로워졌다는 걸 느끼기는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가까운 곳에 나갈 때도 눈썹 없이 나가는게 꺼려지고, 아직도 예쁜 옷을 사는 걸, 입는 걸 좋아라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 다른 사람의 평가에서 벗어나 그냥 나이고 싶은데, 또 한 편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은 내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나는 책을 열심히, 길에 서서 책을 읽고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냥 핸드폰 배터리가 4%라서 그래서 책을 꺼낸 거고, 책을 읽은 거고,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빠져든 거고, 빠져든 뒤에는 옆에 누가 다가와 팔을 잡는데도 책만 보고 있던 거다. 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무래도 나는, 번잡한 사거리 모퉁이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 이건 아닌데…
내가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구절은 여기, 39쪽.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친구 파니가 출산 후 아이와 함께 1785년에 사망했다는 이야기. 의지하는 친구의 죽음에 메리는 크게 실망한다. 함께 열정적으로 운영했던 여학교도 파산하고 만다. 독립적인 삶, 유용한 삶을 꿈꿨던 그녀들의 희망찬 미래가 일순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이를 낳다가 혹은 아이를 낳은 후에. 여자들의 암울한 삶은 아주 오래 전,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 더 읽어보자. 조금 더 나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