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나 지금이나 부지런해야 연애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교복 입고 다닐 때부터 그랬다. 부지런해야 연애할 수 있다. 1학년 1학기부터 4학년 2학기까지 남자친구가 있는 친구는 남자친구가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튼 계속 ‘연애중’이다. 부지런해야 연애할 수 있다. 연애한다고 모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니지만, 연애조차 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빠질 확률은 그만큼 더 낮아진다.
가부장제 사회 속 이성애자 기혼여성으로서 이제 연애는 내게서 좀 떨어진 일이다. 세상 사 모두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이 세상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다 아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인생의 재미를 모두 포기한 사람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랑을 찾아보겠다, 결연히 나선다면 그 또한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일이다. 설명이, 아주 길고 세세하며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필요할 테다.
『하버드 사랑학 수업』은 세번째로 읽는 마리 루티의 책이다. 저자는 남녀가 서로 다른 별에 산다는 말이 지긋지긋한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남녀가 서로 다른 별에 산다는 그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나도 당연히 읽어더랬는데, 남자는 문제가 생길 때 동굴에 들어간다,라는 앞부분만 기억나는 걸로 봐서는 끝까지 읽지 않은 듯 하다. 그 책을 펼쳤던 백만년전, 나는 연애를 ‘동경’했으나 막상 연애를 ‘실행’할 의지는 없었기에 그 책을 끝까지 읽을만한 동력이 부족했다. 부지런하지 않았다.
이 책은 사랑에 빠지기 원하는, 하지만 자주 연애에 실패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성들에게 아주 유익한 책이다. 연애의 실패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다음 연애에서는 내가 더 잘해야겠다, 더 양보하겠다, 더 희생하겠다, 이렇게 각오하는 여성이라면 더더욱 이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부분이 좋았다.
사춘기가 될 때쯤 우리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불공평하며 자신이 결코 불굴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뭔가 완전하지 않은 듯한 이 느낌은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고, 알 수 없는 불만감이 일상의 저변을 흐르게 됩니다. … 장 폴 사르트르는 이 공허감을 ‘무nothingness’라고 불렀고 라캉은 ‘결핍lack’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조용한 흐느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부르는 이름은 저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281/530)
우리 존재 안의 커다란 구멍과 그 구멍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공백이 채워지는 특별한 경험이 바로 사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잊게 된다. 하늘은 파스텔톤으로 변하고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존재를 흔들어대던 불안이 갑자기 사라진다. 이 세상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믿게 되고, 가끔은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다. 사랑에 빠진 그 남자를 ‘그것’으로 만들 때의 위기를, 소원 성취형 연애의 위험을 말이다. ‘그것’이 아무리 매혹적이라 해도 연애의 일면일 수 밖에 없음을, ‘그것’이 자신과 남자 사이의 공간을 다 차지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을 말이다.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감정들』에서도 저자는 이렇게 조언한다.
사랑이 부여하는 힘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온전히 살아있다는 느낌, 내 삶을 완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충족감 때문에 연애를 하는 사람도 많다. 지루하고 짜증 나던 인생이 갑자기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쉽게 포기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이 들뜬 상태는 빠르게 희미해진다.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창의적인 활동에서 얻는 만족에 비해서 말이다. (123쪽)
대중매체와 매스미디어,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을 통해 이성애적 사랑에 대한 신화는 끝없이 재생산되고 미화된다. 인생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단번에 해결해줄 구원자로서의 사랑을 갈구하던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이 자신을 구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공백이 채워지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사회적 요구와 기대 때문에 많은 남자들은 그 공백을 직업적 성공과 명예를 통해 채우려 한다. 역시 사회적 요구와 기대 때문에 많은 여자들은 그런 허무함을 스위트홈과 자식을 통해 채우려 한다. 좋은 집과 신형차, 멋진 애인과 안정적인 노후가 그 허전함을 채워줄 수 없듯이,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 든든한 남편과 착하고 예의바른 자식들도 그 허전함을 채워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조용한 흐느낌. 공허함과 허전함. 내면의 공백과 존재의 구멍은 ‘사랑’, 가장 위대한 구원자의 도움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질 수 없다,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