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반격의 수뇌부, 네오콘에서 네오펨까지>에 소개되는 백래시 사절들은 철학자도 있고, 수학 실력을 뽐내는 사회과학자들도 있고, 여성의 제자리에 대한 근거를 원주민에게서 찾는 인류학자도 있었다. 그들은 대중 작가이자 연사였고, 남성 운동과 여성운동의 멘토였다. 수전 팔루디는 반격의 주인공들을 움직인 힘이 그들이 채 인지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건 사적인 갈망과 반감, 자만심 때문(432쪽)이라고 판단했다.
자기가 직접 쌓은 탑에 흠집을 내는 유명 페미니스트는 프리던만이 아니었다. 잘나가는 베스트셀러로 1970년대에 여성해방운동이 유명세를 타는데 도움을 주었던 일부 작가들이 과거의 입장을 철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뉴라이트의 입장에서는 오래된 페미니스트의 이런 회개가 너무 좋아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482쪽)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좌절과 고통을 ‘이름 없는 문제’라 명명하며 『여성성의 신화』 <(구) 『여성의 신비』>로 미국 제2물결 페미니즘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베티 프리던에 대한 의외의 이야기를 처음 접한 건 작년, 아른님의 페이퍼를 통해서였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이다.
나는 여자들끼리는 잘 지낼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부추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직접적이든 글을 통해서든 절대로 응답하지 않았기에, 베티는 나를 겁내지 않았고 더 공격했다. 솔직히 돌이켜보면 나는 갈등을 회피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갈등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생님이 필요했고, 베티는 단연코 선생님이었다. (『길 위의 인생』, 237쪽)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책 『길 위의 인생』 몇 페이지를 읽어가며 나의 소중한 영웅의 추락을 확인하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책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관점에서 쓰여졌기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일을 미뤄두었다. 하지만 수전 팔루디의 이 문단은 내게 더는 판단을 미뤄둘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일반 대중들은 아직도 그녀가 여성운동의 주도적인 ‘어머니’라는 인상을 갖고 있을지 모르는데도, 그녀는 너무 빨리 미디어의 주변으로 밀려났다고, 사진발을 잘 받는 젊은 대표자들 때문에 내동댕이쳐졌다고 느꼈다. 프리던이 페미니즘의 ‘어머니’였을 수도 있지만 미디어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말 그대로 여성운동의 ‘매혹적인 소녀’로 지명했다. 그리고 프리던은 미국에서는 가장 영예로운 경칭이 어느 것인지 너무 잘 알았다. (487쪽)
백래시의 진술과 글로리아의 문장을 통해 예상할 수 있는 경우는 한 가지다. 베티 프리던은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은 여성운동’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녀가 “급진 페미니스트”라 칭한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것이 그들의 실수라고 지적했다(486쪽). 그녀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 집중되는 관심을 싫어했고, 글로리아가 자신을 없애고 싶어 했다고 믿었다(488쪽). 베티는 글로리아를 질투했다.
페미니즘 운동은 일렬 대오로 움직이지 않는다.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는 운동의 실천과 과제의 해결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의견이 대립될 경우 갈등은 불가피하며, 갈등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정될 수 있다. 결국 더 많은 여성이, 더 많은 남성이 성차별적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의 목표다. 그럼에도 이 길고 지난한 과정을 이루어가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기에 인간적 결함 혹은 관계에서 오는 오해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 전체가 후퇴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역사는 보여준다. ‘현대 여성운동의 어머니’로 한 세대 여성운동의 문을 열었던 사람도 오만과 지나친 자기중심성 그리고 질투에 눈이 멀어, 자신이 힘겹게 열어젖힌 그 문을 닫는 일에 노년의 마지막 힘을 쏟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