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좀 떨어진 도서관. 구석에 선다. 이른바 ‘페미니즘 코너’.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부터 시작해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까지 읽을 사람을 기다린다. 자리가 부족해 겹쳐져 있는 책들 가운데서 익숙한 제목의 이 책을 꺼내 든다.
한참 알라딘서재에서 ‘페미니즘 공부’ 열풍이 불었던 2015년 초여름. 나도 여기저기 알라딘 이웃님들 서재에 가서는 댓글로 줄을 섰는데, 그 때 처음 읽었던 책이 이 책이다. 2015년 6월이니까, 딱 3년이 지났다. 중학교 통째. 고등학교 통째의 시간. 고개도 못 가누고 누워만 있던 아이가 만지고 뛰어다니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시작하는데 필요한 시간 36개월. 3년의 시간이 너무 멀게 느껴져 이 책을 다시 읽는다.
어느 비 오는 오후, 반스앤드노블에서 저자가 『여성의 신비』를 다시 읽게 되면서 이 책은 시작된다. 제2세대 여성주의를 촉발시킨 책이지만 1963년에 출간되어 이미 고전 중의 고전으로 인식되던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녀는 놀라운 기분에 사로잡힌다. 결혼하기 위해 열아홉 살에 대학을 그만두고 네 아이를 키우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 대학생 때에는 다른 나라 사람 이야기로만 여겼던 여성의 사연이 바로 지금의 자신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바너드 여대의 ‘페미니즘 고전 연구’ 수업 청강을 허가 받은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아침 기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해 수업을 듣고 바로 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시작한다. 이 책은 그녀의 페미니즘 고전 ‘다시 읽기’다.
추천 도서 중에서 아직 읽지 못한 책 & 관심이 가는 책 몇 권을 추려본다.
책 속에 소개된 페미니즘 고전을 해석함에 있어 저자는 자신이 비평가나 학자로서가 아니라 ‘일반 독자’로서 접근했음을 강조한다. ‘매우 개인적 소회’ 이상의 무엇인가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강의를 들은 2년 동안 훌륭한 책을 많이 만났지만, 여기에 소개된 페미니즘 고전들은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도 밝혔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저자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워킹맘이다.
어머니는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분자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 내가 생후 1개월 무렵일 때 어머니는 일터로 다시 돌아갔다. 그때부터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지내는 내 삶이 시작된 셈이다. (237쪽)
나는 나를 낯선 이의 손에 맡겨야 했던 부모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남의 손에 자란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는 말할 수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 한 분이 출장을 떠날 때마다 나는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 학교가 파한 후 빈집에 들어갈 때 귓가에 울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왠지 서글펐던 기억, 초등학교 학예회 때 꽉 찬 관중석 어디에도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주여 오소서>를 부를 때 느낀 외로움 등이 내가 치러야 했던 대가였다. 나는 연극이 끝난 후 무대 뒤에서 한 이웃 아주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주려고 가져온 꽃다발에서 뽑아 낸 꽃 한 송이를 건네받은 적도 있었다. (238쪽)
생후 1개월된 아이를 두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엄마. 현관문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니는 아이.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 일을 하면서 아이를 돌볼 수 있게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기대에 찬 눈빛에 매번 녹아 내리고 마는 엄마였다. 해야 할 일들을 옆으로 밀어 놓은 채 책을 읽어 주거나 실비아가 만들었다는 노래를 들어주기 일쑤였다. 나는 아이들이 세상을 원색으로만 본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주지시켰다. 정규직을 버리고 프리랜서를 선택한 데는 다른 이성적 동기도 영향을 주었지만 사실 감정적 동기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시간을 유동적으로 쓸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실비아가 필요로 할 때마다 옆에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부모님의 부재로 인한 결핍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242쪽)
그녀는 한결같이 자신이 어머니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말한다. 하지만, 엄마를 그리워했던 자신의 마음, 어린 시절의 자신을 애도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직업적 성공을 위해 밤새워 글을 쓰고, 혹 새로운 일거리가 있나 거듭 출판사에 전화하는 그녀가 선택한다. 아이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주는 엄마가 되기로 말이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에서 카트리네 마르살은 아이가 14명 정도 되고, 식기세척기가 없고, 천기저귀를 날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솥에서 삶아야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정 내의 엄격한 분업을 유지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했다. 동의한다. 나는 ‘700만 전업 주부 시대’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이들이 스테파니와 같지 않더라도, 스테파니처럼 외로움과 고독을 마음 속에 숨긴 채 자랄 수 있음을 말하고 싶다. 유아 시절의 특정한 결핍이 이후의 성장 과정에서 오히려 그녀/그를 다른 방식으로 이끌 수 있다는 걸 안다. 다만, 나는 엄마를, 아빠를, 외할머니를, 혹은 의지할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또한 어른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여성에게 모성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며 행복하다고 느끼는 감정, 아이를 위한 선택, 함께 있기로 하는 결정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성과 여성,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일을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쇠를 목에 건 아이들이 엄마와 아빠를 계속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정서적으로 충만함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위의 엄마들 중에 ‘공무원, 교사’등 국가에 직접 고용된 엄마들은 비교적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일반 직장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연속해서 육아휴직3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아이들이 어릴 때 2년을 사용하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시점에 육아휴직을 신청해 아이의 학교 생활을 가까이에서 돕기도 한다. 초반에는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육아휴직 3년 ‘강제’, 아빠 육아 휴직 1년 ‘강제’등의 방식으로 시작해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여성에게만 육아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어린아이를 키우는 일에 엄마와 아빠, 사회와 국가가 협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여성들과 남성들이 반세기 전에 그랬듯이 함께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새로운 전국적 운동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주 40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은 이제 30시간이 돼야 할 테고, 합쳐서 주 80시간을 노동하면 안 되는, 아이를 키우는 남성과 여성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노동하는 부모들에게는 하루 6시간 노동이 알맞고, 젊은 남성과 여성은 교육과 심화 훈련의 기회를 노동과 결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60세가 넘는 사람들은 집안일만 돌보기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계속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좀더 많은 일자리가, 그리고 여성과 남성에게 새로운 성공의 기준이 주어져야 한다. (<여성의 신비>, 16쪽)
결국,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며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들을 함께 하고, 먹고 마시며, 웃고 뛰며 이야기하는 일들을, 사회적 성공이나 물질적 성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런 사회가 된다면, 그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더 많은 엄마,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통해 아이, 아직은 엄마와 아빠를 그리워하는 어린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다 커버려 엄마를 찾지 않는 두 아이의 엄마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