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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평점 :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발생 직후, 미처 예상치 못한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한 가지는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었고, 또 한 가지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현실을 규탄하기 위한 젊은 여성들의 집단적 움직임이었다.
체포 직후 용의자가 ‘평소 여성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왔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는 점, 범행 전에 용의자가 화장실을 출입한 6명의 남성들을 그냥 보내고 화장실에 들어온 첫번째 여성을 살해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찰은 수차례 이 사건이 ‘여성혐오’와 상관 없는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견해를 밝혔는데,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천석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페이스북 갈무리]
강남역 살인 사건. 범죄자에게 정신병이 있으니 여성 혐오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장에 대해서...
어제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이 번화가의 화장실에서 한 남성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났고’ 그래서 죽였다는 말을 했다. 그 남자는 오랜 조현병의 치료력을 갖고 있고 현재는 치료를 중단한 상태다.
그가 지금 정신병적 급성 상태에 있는지는 나로서는 정보가 없어서 모르겠다. 그가 현실적인 판단력을 잃고 심각한 공격적인 행동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그 행위가 모두 정신병 때문인 것은 아니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의 범죄율이 정신병이 없는 사람에 비해 낮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여기에 일부 정신병적 증상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으로 범죄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정신병적 증상을 갖고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신병을 가진 한 사람이지, 정신병 그 자체가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그들은 다양한 기질과 성격, 성장배경, 문화, 생활 조건이 다르며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도 다양하다.
문제는 그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고 그것은 ‘여성혐오’다. 이것이 그의 망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망상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다. 만약 우리 사회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고,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 남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에 비해서 특별히 남자들에게 더 기분나쁜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병을 갖고 있으며, 범죄를 저지른 그는 아마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소외감과 분노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소외감의 원인을 여성들의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찾고, 분노의 초점을 여성들에게 맞춘 것은 분명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우리 사회 내에서 최근 들어 뚜렷하게 늘어난 심리적 현상인 여성 혐오가 (만약 그에게 정신병적 망상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의 망상 속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여성 혐오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런 망상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망상을 가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병적 증상은 맥락이 있다.
결국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할 근거일 수 없다. 오히려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 범죄의 이유로 ‘여자들의 무시’ 운운하는 상황이 여성 혐오 이슈를 우리가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은 분명한 여성 혐오 범죄다.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닌 것이 아니라 그가 정신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여성혐오 범죄인 것이다.
이 책 『말이 칼이 될 때』의 저자 역시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적’ 범죄, 여성 혐오를 ‘배경에 둔’ 범죄라고 규정한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성들의 ‘반응’을 근거 중의 하나로 제시한다.
이것은 혐오범죄가 발생했을 때의 일반적인 후폭풍과 거의 유사하다. 미국에서 흑인 범죄가 발생하면 흑인들이 집단적으로 반응한다. 강남역 사건에는 한국 여성들이 집단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공포를 느꼈고 분노했고 집단적으로 항의에 나섰다. 이걸 두고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문제를 읽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어떤 말로 이 사건을 규정하건 수많은 여성들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공포와 분노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102쪽)
무엇이 혐오인가. 무엇이 혐오표현인가.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 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인데, 여기에서 혐오란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뜻한다. (24쪽)
혐오표현은 구체적으로 입증 가능한 고통과 사회적 배제를 낳고, 혐오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졌던 역사적 경험이 존재한다.(84쪽) 혐오의 피라미드를 살펴보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존재하는 ‘편견’이 ‘혐오표현’를 통해 가시화될 때, 차별행위와 증오범죄, 집단학살로도 확대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혐오표현에 대한 가장 강경한 대응은 혐오표현을 ‘범죄화’하는 것이지만, 그럴 경우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위험이 존재한다. 저자는 한국처럼 표현의 자유의 보장 수준이 낮은 경우라면 혐오표현금지법의 도입이 양날의 칼이 될 공산이 크다고 말한다.(159쪽) 저자는 형사처벌, 손해배상, 차별구제, 방송심의등을 통해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규제’와 공무원 인권교육과 시민 인권교육, 국가차원의 홍보, 캠페인, 공공기관에서의 반차별 정책 시행, 소수자(집단)에 대한 각종 지원등을 통한 ‘형성적 규제(지지하는 규제)’ 및 사기업, 대학에서의 자율 규제등을 비롯한 ‘자율적 규제’가 고루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1쪽)
혐오표현의 대상은 소수자 집단일 수도 있고 소수자 집단의 개별구성원들일 수도 있다. 여기서 소수자 minorities 또는 소수자 집단minority group이란 실질적인 정치, 사회적 권력이 열세이면서 공통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뜻한다. 각국의 차별금지법은 성, 인종, 민족, 성적 지향, 장애 등의 속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데, 이러한 속성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소수자에 해당된다. 즉 여성, 소수인종, 소수민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 소수자에 해당된다. (29쪽)
현재 우리의 상황이라면 여성, 조선족, 탈북자, 동남아 출신의 노동자, 외국인 신부,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 소수자에 해당된다.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즈음하여, 남북이 통일이 되었을 때 난민이 아니면서도 난민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는 ‘북한 동포들’도 소수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긴다. 지독한 지역 차별의 경험, 전라도 혐오증의 역사가 있는 나라에서 ‘출신 지역’으로 인한 배제와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차별 행위와 증오범죄 이전에 조롱, 위협적, 모욕적, 폭력적 말이나 행동, 집단따돌림 등의 혐오표현이 나타난다. 혐오표현은 전염성이 매우 높아, 마음 속에 숨겨두었던 편견의 조각들이 바로 옆 사람의 입을 통해 표현될 때,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며 멸시와 조롱의 언어가 유통될 때, 소수자,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과 증오 역시 눈덩이처럼 부풀려진다.
단체 카톡방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신체(몸매)에 대한 조롱, 외국인에 대해 “너 냄새 나!”라는 모욕적 언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멸시의 언어, “**도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야.”,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언사들은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당연시하고, 증오범죄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토양이다.
혐오 표현이다.
혐오표현이라는 과격한 용어의 사용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반차별운동’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된장녀가 왜 혐오표현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왜 된장녀’도’ 혐오표현일 수 있는지 설득하는 과정 자체가 운동이라는 것이다. 된장녀 신상털기와 데이트 폭력, 성폭력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다양한 수위의 차별, 적대, 배제, 폭력의 말들을 ‘혐오표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 이 문제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포괄적이고 전략적인 저항을 위해서 혐오표현이라는 전략적 거점을 만들자는 것이다.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