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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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나오려다 신착 도서 서가를 한 번 더 돌아봤다. 맨 위 칸에 눈에 띄는 그림책이 있었다. 눈 덮인 벌판 위에서 빨간색의 무언가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는 할머니와 검은 형체. 도대체 저 검은 형체의 정체는 무엇이고, 둘은 추운 겨울에 밖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제목으로 책의 내용을 짐작해 보려고 해도 '팡도르'라는 단어에서 막힌다. 무슨 책인지 잠깐 앉아서 읽다 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 한 권을 다 읽는 데 길어야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테니까.


크리스마스에 먹는 이탈리아의 전통 빵, 팡도르

이미지 출처: https://www.insidetherustickitchen.com/pandoro-christmas-cake/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단어 '팡도르'는 정확히 발음하자면 '판도로(pandoro)'이고, 크리스마스에 먹는 이탈리아의 전통 빵의 이름이라고 한다. 강가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 외딴 집에 살고 있던 할머니는 '죽음도 나를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오랜 세월 혼자 외롭게 살아왔다. 직접 빵을 만들어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할머니의 낙이다.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둔 어느 겨울, 할머니를 잊어버린 줄 알았던 사신(死神)이 할머니를 데리러 찾아왔다.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때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줄 팡도르를 만들어야 하는데, 빵 반죽을 숙성시키고 빵 안에 들어갈 소를 준비하려면 일주일이 걸리니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단칼에 거절하려던 사신의 입에 할머니는 빵에 들어갈 달콤한 과일 소를 쏙 넣어주고, 처음 보는 달콤한 맛에 당황한 사신은 할머니를 데려가지 못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줄 팡도르를 준비해야 한다며 몇 번이나 죽음을 미룬다. 사신은 과연 할머니를 저승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기지를 발휘해서 저승에 끌려가는 것을 피한 사람은 우리 옛 이야기에도 나온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할머니는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사람들에게 나눌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다. 할머니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웃뿐만 아니라 사신에게까지 달콤한 빵을 나누어준다. 외딴 집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의 처지와 추운 겨울날은 마음을 쓸쓸하게 하지만, 그 속에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림은 오직 하얀색, 검은색, 빨간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하얀 눈밭과 대비되는 검은 사신, 빨간 불빛. 잘 구워져 황금빛이 된 빵과 상큼한 귤 소, 달콤한 밤 절임은 빨간색 동그라미로만 표현되지만, 이 동화 속 따뜻함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하다. 글에서 사신은 검은 망토 대신 할머니가 준 숄을 둘렀더니 우아한 인간 여성처럼 보였다고 묘사되지만, 그림에서는 커다란 검은 자루로 보인다. 그래서 사신이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고, 그런 존재와도 소통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할머니의 따뜻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림책이지만 아이보다는 어른, 그것도 인생의 황혼을 맞고 있는 어른이 더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어린 시절이었으면 할머니의 쓸쓸함과 그 속에서도 따뜻한 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 할머니만큼 나이가 들면 할머니에게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이 '어른을 위한 그림책'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보다는 인생의 쓴 맛 단 맛을 다 겪고 조용히 삶을 관조할 줄 알게 된 어른에게 더 맞는 책이다. 


눈 오는 겨울날에 읽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한여름에 읽게 되었다. 한여름에 하얀 눈밭과 그 위에서 빛을 발하는 빨간색 빵들과 불빛을 보면서 잠시 겨울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겨울에 다시 읽으면 난로에 손을 쬐듯이 마음에 온기가 퍼져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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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가 웃는 순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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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추리 작가 찬호께이의 소설을 읽는 건 이번이 네 번째다첫 번째로 읽은『13·67』은 한 경찰의 46년을 돌아보면서 그의 삶과 홍콩 현대사를 엮어서 거대한 서사로 만들어가는 솜씨가 감탄스러웠다두 번째로 읽은 『망내인』은 주인공이 지나치게 전지전능하다는 감이 있었지만 주인공이 사용하는 IT 기술의 디테일에 압도당했다세 번째로 읽은 『기억나지 않음형사』는 앞의 두 책보다 가벼운 느낌이었지만 예상을 몇 번이나 뒤엎는 전개 덕분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이렇게 작품마다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작가이기에 이번에 읽은 『염소가 웃는 순간』도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염소가 웃는 순간』은 앞서 읽은 세 권의 소설과 달리 공포소설이다추리 작가가 쓴 소설답게 과학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도그 진상을 알고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 같았다다른 공포소설들처럼 원인을 모르니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공포를 다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공포물을 무서워하는 편인데도 긴장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공포라면 해결할 방법도 있을 테니 덜 무섭다.

내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그런데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전까지 공포감은 팽팽하게 유지된다대학 신입생인 주인공들이 그냥 재미로 들었던 기숙사 7대 괴담은 주인공들의 눈앞에 그대로 재현되어한 명 한 명을 희생시켜 간다잔혹한 부분이 꽤 많지만 공포감은 잔혹함만으로 생기지 않는다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희망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 희망이 헛된 것임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우정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의 갈등모든 게 해결됐다 싶었는데 더 참혹한 일이 생길 때의 경악스러움하나하나 뜯어보면 공포물의 클리셰이지만 작가는 이런 클리셰들을 영리하게 활용해독자들까지 공포에 압도당하게 만든다.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 한 캐릭터가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면서 공포감은 사라져버린다사실 이 모든 끔찍한 일들이 누군가의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환상이기 때문이다이 환상을 깨기만 하면 모두가 무사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친구들이 눈앞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갔는데도 살아남기 위해남은 사람들이나마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그게 다 환상이었다니 허탈하기까지 하다공포감이 결말까지결말 이후에도 이어지길 바라는 사람들로서는 이런 전개가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인물 설정이나 사건 전개에서 일본 라이트노블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자기 입으로는 평범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평범하지 않은 남주인공(그는 이 모든 상황이 실제라고 생각했을 때도 놀라운 희생정신과 용기로 친구들을 지켜내고결국 사건을 해결해낸다.)과 꾸미면 예쁜 여주인공은 일본 라이트노블만화의 클리셰이고 나머지 친구 캐릭터들도 일본 만화에서 자주 보았던 전형적인 캐릭터 유형들이다주인공이 실수로 여자 가슴을 만지는 장면에서는 일본 만화에서 독자들을 끌기 위해 일부러 넣는 선정적인 장면들이 떠오른다한 캐릭터가 닌자술을 활용해 친구를 구하는 장면에서는 내가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사건의 배경과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처음 100여 페이지를 읽고 나면 나머지 400여 페이지는 순식간에 읽힌다공포 영화에서 많이 보던 소재들과 공포물의 클리셰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요소들을 잘 엮어내고긴장감과 공포감을 낮추었다 다시 끌어올리는 솜씨도 뛰어나다사건의 참상 묘사도 생생해마치 등장인물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모든 일들을 겪고 있는 것 같다모든 게 너무 쉽게 해결되는 감이 있지만아무도 죽지 않아 다 읽고 나서 기분이 찝찝하지 않다덥고 이런저런 걱정도 많아 잠 못 드는 여름밤에 읽기 좋은 소설이다읽는 내내 등골이 서늘해지게 하고걱정거리를 잊어버리게 할 만큼 재미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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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요리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스탠리 엘린 지음, 김민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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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요리』를 처음 알게 된 건 러시아 문학 속 음식들을 분석한 책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를 통해서였다. 러시아 문학 중 미식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소설을 다룬 부분에서, 미국의 추리 작가 스탠리 엘린의 단편소설 「특별 요리」의 내용이 소개되었다. 이 소설은 러시아 문학은 아니지만 미식에 집착하느라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소개되었다. 전체 줄거리가 다 소개되는 바람에 읽어보지도 않은 소설의 스포일러를 당했지만, 그래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특별 요리」가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집을 찾아읽게 되었다.

직접 찾아 읽어보니, 장르 문학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순수문학 못지않게 문장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다엘린의 문장력이 뛰어나서인지 번역가의 감각이 젊은 것인지 70여 년 전이 배경인데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번역문의 문장도 자연스럽고 깔끔하다간결한 문장만으로도 소설의 분위기를 섬세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특히 「성탄 전야의 죽음과 「체스의 고수」, 「브로커 특급의 마지막 문장은 그 문장 하나만으로 반전을 제시하며 전율을 일으킨다.

엘린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난처한 상황더 심하게는 파국으로 치닫는데안됐다 싶다가도 따져보면 거의 전부가 자업자득인 경우다또 다른 소설이나 영화를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중간 중간에 보이는데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생각하면 엘린의 소설들이 원조가 아닐까 싶다. 엘린의 소설들이 이후에 나온 수많은 스릴러 소설, 영화들의 원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단편에 대한 단상은 이렇다.


특별요리

등장인물들은 식도락에 미학이니 예술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다 끌어들이지만 정작 이 작품의 결론은 인간들아적당히 미식에 탐닉해라.’코스테인은 식당의 비밀과 래플러의 운명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방관한 건 아니었는지 미심쩍다이미 스포일러를 당하고 읽었고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았어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의 반전은 뻔하다그런데도 맛의 섬세한 묘사와 인물들 사이의 묘한 긴장감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읽었다.


손발의 몫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로 일한 경험이 꽤 많아서 갑자기 낯선 곳에서 사무 보조 일을 하게 된 주인공에게 공감하면서 읽었다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어떻게 계속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생계를 생각하면 일을 그만두기는 쉽지 않다그리고 나쁜 짓을 하고도 인간은 생각보다 더 쉽게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이라는 소재는 내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에 대한 죄책감과 양심도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비유이지만, 그저 비유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서,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기 두려워서 외면해 버릴 때가 많으니.


성탄 전야의 죽음

이 단편의 반전은 최근에 일어난 줄 알았던 의문사 사건이 무려 20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20년 동안 찰리와 실리아변호사는 같은 지옥 안에 있었던 셈이다하지만 누구 하나 빠져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인간의 집착은 생각보다 더 집요하고 지독하다. 매일 다른 사람에게서 받았던 상처를 곱씹어 보고, 10년도 넘은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는 내 자신을 보니 남의 얘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애플비 씨의 죽음

체호프의 단편 「아내들」을 떠올리게 한 작품「아내들」의 주인공 라울 시냐보르다가 뻔뻔스럽게 사소한 이유로 아내들을 죽여온 자신의 살인 행각을 이야기하는 반면, 애플비는 이제껏 만난 적이 없던 강적을 만나 고전한다하지만 그 강적도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목숨을 잃는다하지만 동시에 애플비를 지옥으로 보내버렸다. 짧은 마지막 부분만으로 효과적으로 반전을 묘사한, 깔끔한 블랙코미디.


체스의 고수

조지 허니커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체스에 집착한 것보다도 아내와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애초에 아내가 조지의 취미 생활을 존중해 줬더라면 그는 가상의 체스 상대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조지가 아내를 회피해 가짜 상대를 만드는 대신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라면 파국은 없었을 것이고소통과 존중이 없는 결혼생활이 이렇게 무섭다조지가 화이트에게 완전히 잠식당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문장은 소름끼친다.


최상의 것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떠올리게 했던 단편. 불행히도 이 단편의 배경인 1940년대 미국과 2020년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빈부 격차가 또 다른 계급 사회를 만들어냈다따져 보면 상류층들도 그렇게 대단한 인간은 아니고그들 사이의 규칙과 유행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하다엘린은 이 사실을 70여 년 전에 이미 간파했었다. 2020년대인 지금도 상류층에 대한 선망열등감증오상승 욕구로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그러니 아서 같은 사람들의 비극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배반자들

주인공이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추적하다 마침내 그 여자와 마주치지만그 여자가 비참한 최후를 선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 <화차>를 연상시킨다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좀 더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다면남편이 에이미를 학대하지 않았다면그리고 에이미 자신도 친구 제니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비극을 막지 않을 수 있었을까로버트의 말대로 그들 모두가 배반자들이었다아니면 로버트가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로버트도 배반자들까지는 아니어도 방관자였다로버트가 마지막에 의자를 부순 것은 그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우스 파티

이 모든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오고 있다는 반전은 밝혀지지만왜 모든 일이 반복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이 모든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마일스는 더더욱 진저리를 치고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새 연인과 도망치는 대신아내와 자신의 배역에 충실하기로 선택한다면 반복의 수렁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가 매번 도망치기로 선택했기에 아내에게 총을 맞고 다시 정신을 차리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브로커 특급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당들은 항상 자기 사정 다 말하다가 망한다이 단편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아내는 어차피 다 눈치 채고 끝까지 주인공까지 지옥으로 끌고 갔겠지만그나저나 아내는 어차피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남편과 결혼한 거면서 남편한테 왜 그리 당당한 건지 모르겠다.


결단의 순간

정말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 사람을 잡을 때가 있다이 단편에서는 그런 사소한 자존심 싸움과 그에 따른 미묘한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한다이 자존심 싸움의 끝이 어떻게 될지 작가는 열린 결말로 남겨뒀지만나는 휴가 레이먼드가 갇힌 방문을 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오지 않는다는 자신의 의견이 이미 깨졌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를 얽매고 있던 감정이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 한 번은 꼭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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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정영목 옮김 / 까치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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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으면 이 세상에는 아직도 아담과 이브 두 사람만이 살고 있지 않을까이브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는 벌을 받았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그렇다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게 우리에게는 다행인 건데아주 단순한 이야기여서 군데군데 빈 곳이 많으니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의 나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놓고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아담과 이브 이야기 자체에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듯하다. “세계 역사에 이렇게 오래 지속되고이렇게 널리 퍼지고이렇게 집요하게 뇌리를 사로잡을 만큼 현실감이 있었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야기 이상의 권력을 가질 정도로 흥했다가 다시 이야기의 위치로 내려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그 과정 자체가 고대의 메소포타미아부터 현대의 우간다까지 수천 년의 세월과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넘나드는 거대한 이야기이다.


아시리아의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모습.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몇 가지 면에서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저자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맞서는 일종의 저항 서사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담긴 창세기는 모세가 썼다고 전해지는 모세 5’ 중 첫 번째 책이고, ‘모세 5은 기원전 5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때는 바빌로니아에게 점령당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던 유대인 포로들이바빌로니아를 점령한 새로운 정복자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 덕분에 유대 땅으로 돌아가던 시기였다바빌로니아에서 수십 년 동안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신화에 노출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줄 이야기가 필요했다그래서인지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메소포타미아 신화와는 몇 가지 차별점을 갖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서사시 <길가메시 이야기> 속 등장인물 엔키두처럼 아담과 이브는 신이 진흙으로 만든 존재이고, 길가메시와 엔키두처럼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한 쌍의 파트너가 된다. 엔키두도, 아담과 이브도 아무것도 모르는 야생의 존재에서 이성과 문명을 접하면서 변화되고, 죽음을 피해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엔키두에게 문명인으로 변화하는 것이 축복이었던 반면, 아담과 이브에게는 그것이 저주였고, 엔키두에게 죽음이 정해진 운명이었던 반면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와는 차별점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의 서사를 완성시켰다. 

(위)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아담과 이브>(1504)

(아래) 얀과 후베르트 반 에이크 형제의 <헨트 제단화>(1432) 중 아담과 이브 부분.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뛰어난 기술을 토대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 냈다.


이 이야기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유대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였다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기독교가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수천 년 뒤 유럽의 고고학자들이 쐐기 문자 기록들을 다시 발견할 때까지 잊혀 있었다.) 기독교 신학의 기틀을 다진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교리를 확립한 이후기독교인들에게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자 삶의 지침이 되었다뒤러나 반에이크 같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완벽하고 생생한 육체를 갖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17세기 영국의 작가 밀턴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부부관계와 현실에서 보아온 정쟁을 반영해사탄과 하나님의 갈등아담과 이브의 복잡 미묘한 애정 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낸 대서사시실낙원을 완성했다이렇게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문학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생생한 현실성을 갖추게 되었다.

 

문제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이야기 이상의 권력을 갖춘 교리이자 역사적 사실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남들을 배척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5세기에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견해를 주장했던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공격받고 추방당한 것에서부터 배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신의 명령을 어겨서 에덴으로 쫓겨난 데는 아담의 책임도 있는데도많은 남성들은 이브에게만 책임을 돌리며 여성들의 악덕이 이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여성 혐오적인 편견을 드러냈다근대에 들어서도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허점을 지적하거나 허구라는 암시를 한 사람들은 자객의 습격을 받거나 화형당하기까지 했다한때 외세에게 점령당해 고통 받던 유대 민족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아담과 이브그들의 자식밖에 없었다면 맏아들 가인은 왜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벌할까 두려워했을까가인이 고향을 떠나 결혼했다는 여자는 누구고가인이 만든 도시의 주민들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어떤 억압도 이런 의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성경에서 언급한 세상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지층이 발견되고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인간이 단 한 번의 창조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절대성을 잃게 되었다


이제 아무도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허점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생명을 위협받지 않는다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오히려 이야기의 위치로 돌아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다시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그 이야기는 여전히 인간의 연약함과 책임의 문제인간의 성과 노동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한 이야기가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굳어버리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게 된다그렇게 되면 그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까지 막혀 버리면서 이야기 자체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단순히 이야기의 매력과 생명력을 잃을 뿐만 아니라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억압하고 해치는 데 이용되기까지 한다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 즐길 수 있는 것 자체도 많은 사람들이 탄압당하는 것을 무릅쓰고 의문을 제기해서 얻어낸 축복이다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이야기의 힘과 위험성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P. S. 이 책의 모든 도판은 책 한가운데 몰려 있다도판이 있는 페이지는 텍스트만 있는 나머지 페이지와 재질이 다른데도판이 있는 페이지들만 도판을 찍어내는 데 최적화된 재질의 종이로 해서 비용을 절감하려던 게 아닌가 싶다하지만 텍스트가 설명하는 도판이 그 텍스트 바로 옆에 있었다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이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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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선택 - 생사의 순간,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법
사브리나 코헨-해턴 지음, 김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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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선택은 영국의 현직 소방관이자 심리학자인 저자가 20년간의 현장 경험과 연구 결과를 토대로, 생사를 가르는 위급한 순간에 소방관들이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책이다. 소방관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저자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소방관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어느 때보다도 삶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지금,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책이 필요했다. “이 방법은 어떤 분야에서든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이 책의 띠지에 적힌 문구처럼 내 삶, 내 분야에서도 저자의 방법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작은 힌트 하나라도 얻고 싶었다.


 한 터널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15분 후에 두 번째 폭발물이 터져 터널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중상을 입을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터널 안에는 소방관 20명과 구급대원 6, 최소 30명의 구조 대상이 있다. 이 정보를 믿고 구조대원들을 철수시킬 것인가, 아직 터널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끝까지 구조하게 둘 것인가. 이건 가상의 시나리오지만, 소방관들은 언제라도 이렇게 어느 쪽도 쉽사리 택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네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 나는 언제든 네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경고하는 사람, 자신의 뜻에 조금만 어긋나도 소리를 지르고 윽박지르면서 내가 창조적인 의견을 내지 못하게 하는 사람과 일하고 있다. 내가 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비난을 받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불손하고 불성실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해고당하지 않을까, 자꾸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소방관의 의사결정에 비하면 내 의사결정은 아주 가벼운 문제다. 그러나 나와 내 가족의 생계가 달렸다는 점에서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거운 문제다.


 저자가 소방관들에게 제시한 방법은 결정 제어 프로세스. 사람들은 소방대 지휘관이 보고받은 정보들을 치밀하게 분석한 뒤 의사결정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연구를 통해 소방대 지휘관들이 내리는 결정의 80퍼센트가 직관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빠른 대응이 필요한 상황에서 분석적인 결정을 내리면 시간을 낭비하게 되지만, 직관적인 결정을 하다 보면 큰 그림을 보지 못할 수 있다. ‘결정 제어 프로세스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 결정으로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결정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이라 예측하는가?’, ‘이 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이 일로 초래될 수 있는 위험을 얼마나 능가하는가라는 질문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검토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의사결정의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상황을 더 분석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내 분야의 업무를 할 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에 내게는 더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팁 하나 더. 우려를 내려놓고 행동하되, 큰 그림을 생각할 것. 잘못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걱정하다 보면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마비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결정을 아예 내리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떠넘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막연한 걱정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기보다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생각이 너무 많고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는 내게 특히 유용한 팁이다.


 일이 잘못될 수 있다는 걱정은 스트레스를 불러오는데, 저자는 스트레스가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악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소방관들에 견주는 것 자체가 죄송한 일이지만, 나 또한 나 자신을 계속 의심하고 검열하게 만드는 곳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저자가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삶을 정말 행복하게 하는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 부분을 읽자마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쁜 것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다. 내가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느껴질 때마다 이 방법을 사용해야겠다.


 이렇게 내게 필요한 팁들을 얻는 것에 더 정신이 쏠린 것이 저자를 비롯한 소방관분들에게 죄송스럽다. 소방관들이 몸과 마음을 다치거나 심지어 죽는 것도 각오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더 나은 방법들을 찾아내고 익히는 데 온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심지어 이 글에서도 마지막에 짧게만 언급해 버렸다. 위급한 상황에서 내가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길, 내 분야의 일이나 사소한 친절로라도 그분들에게 보탬이 되길 바란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을 써서 삶의 지혜를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있는 저자와 그녀의 수많은 동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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