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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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에서 미술사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미술사에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있었던가?” 내가 프리다 칼로를 이야기하자 교수님이 말했다. “프리다 칼로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 아류잖아또 다른 사람은 없어?” 나도 다른 학생들도 위대한 여성 미술가를 한 명도 더 말하지 못했다하지만 교수님은 틀렸다프리다 칼로는 결코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아류가 아니다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어야 했다. “왜 미술사에는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을까?”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이것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klin이 던진 질문이다렘브란트루벤스마네모네반 고흐피카소까지 수많은 남성 거장들이 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그런데 이들에 필적하는 여성 거장은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노클린은 미술사에서 여성 거장이 나타나지 않은 원인으로 남성 중심 사회의 성차별을 지목했다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 교육을 받는 데도 작품 활동을 하는 데도 제약을 받았고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육아와 가사 노동을 떠맡았기 때문에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없었다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는 가부장적 사회의 성차별과 싸우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 실린 21명의 여성 미술가들 중 대다수가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남성 미술가의 작품보다 열등한 것아류로 여겨지거나심지어 동시대의 다른 남성 미술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마리에타 로부스티, <자화상>, 1580년.

마리에타 로부스티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딸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수백 년 동안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다.


  그렇게 지워진 여성 미술가 중 한 사람이 마리에타 로부스티Marietta Robusti우리는 마리에타 로부스티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잘 알고 있다본명인 자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보다 별명인 틴토레토Tintoretto’로 잘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화가마리에타는 틴토레토의 자녀들 중 예술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고틴토레토는 평생 동안 딸과 공동 작업을 했다딸이 서른이 될 때까지 결혼조차 허락하지 않고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데릴사위를 들였을 정도로 틴토레토는 딸에게 집착했다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군주들이 마리에타를 궁정화가로 채용하려 했지만틴토레토는 마리에타를 자기 작업장에서만 일하도록 했다.


<소년과 함께 있는 노인의 초상>, 1585년.

틴토레토가 아닌 마리에타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까지 소장처인 빈 미술사박물관에서는 틴토레토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마리에타가 아이를 낳다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후틴토레토의 창작 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페미니스트 미술가 그룹인 게릴라 걸스Guerilla Girls는 사실상 틴토레토 작업장의 핵심이 그녀였기 때문에 그녀가 죽은 뒤로는 틴토레토가 예전만큼의 창작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마리에타가 자신의 서명을 남긴 작품은 단 한 개였기에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아버지나 다른 남성 화가의 작품으로 전해져 왔다최근 르네상스 시기 여성 미술가들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아버지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이 그녀의 그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녀를 떠나지 않았던 아버지의 그늘이 이제야 조금씩 걷히고 있는 셈이다.


  마리에타가 겪었던 가부장제의 억압 외에 여성들이 미술사의 거장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했던 원인이 또 있다회화와 조각은 미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여겨졌는데여성들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가족이 아닌 남성 미술가의 수업을 사적으로 들을 수 없었고회화 기술을 익히는 데 필요한 누드 데생 수업도 받을 수 없었다또한 여성은 육체적인 힘도 지적 능력도 부족해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이 계속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이 할 수 있었던 예술 작업은 공예와 자수였고이것들은 남성들에게만 허락된 회화조각건축보다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골로 뒀던 패션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이 디자인한 드레스

(가운데) 요아나 쿠르턴, <사냥 장면>, 1700. 종이 공예 작품이다. 

(아래) 영국의 정원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이 디자인한 헤스터콤 하우스의 정원.


  그래서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미술사의 범주를 회화조각뿐만 아니라 패션공예디자인 분야까지 확장해 살펴보는 것이다그러면서 가난한 시골 소녀에서 세계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된 로즈 베르탱종이 오리기 공예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던 요아나 쿠르턴시력 손상 때문에 화가의 길을 포기했지만 캔버스 대신 정원 조경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거트루드 지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예술을 펼쳤던 여성들의 삶이 드러난다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 장르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미술사의 거장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그녀들은 분명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많지 않은 분량 안에 21명이나 되는 미술가들을 다루다 보니 한 명당 내용이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이다요아나 쿠르턴의 경우 도판을 제외한 텍스트 설명이 4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이제 막 재조명되기 시작한 미술가들이 대부분이라 관련 연구 자료가 부족해서였겠지만좀 더 깊이 있게 여성 미술가들을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맛보기만 한 기분이다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21명의 여성 미술가 모두가 유럽 출신이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아메리카 지역의 여성 미술가들은 한 명도 다루어지지 않아서양미술사 책이라 하더라도 유럽 쪽에 치우쳐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근현대에 들어선 이후로 서양 미술 분야에서 활약한 아시아아메리카 지역의 여성 미술가들도 많을 텐데화질이 낮은 도판들이 종종 눈에 띄고 크기를 너무 작게 해 놓은 도판들이 많은 것도 미술사 책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판면 구성을 수정해서라도 도판을 더 크게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아쉽지만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 가려져 있던 여성 미술가 21명을 만날 수 있게 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책이다각자 처한 상황과 한계 속에서도 자신이 갈 길을 모색하고 개척해 갔던 그녀들의 삶이아직도 남아 있는 성차별이라는 벽을 허물려고 하는 우리에게 영감과 힘을 준다아직도 전 세계에서 남성 미술가 대 여성 미술가의 전시회 비율이 70 대 30일 정도로 미술계의 성차별은 심각하다그러나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라는 17세기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선언을 마음속에 품고 계속 정진하는 여성 미술가들이 있기에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의 이름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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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의학자 -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해부하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박광혁 지음 / 어바웃어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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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접목한 책을 읽을 때 우려되는 것이 있다두 분야의 균형과 전문성이다두 분야의 전문가가 함께 만든 책이라면 두 분야가 균형을 이룰 수 있고 각 분야의 전문성도 갖출 수 있다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분야와 다른 분야를 접목해서 책을 쓰면다른 분야는 그냥 곁들이는 수준이 되거나 다른 분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현직 의사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의학과 미술사를 접목한 책미술관에 간 의학자를 읽으려 할 때도 이런 우려가 들었었다.


  다행히 미술사와 의학의 비중은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다페스트디프테리아수면장애도박 중독 같은 의학적 주제를 미술 작품과 엮어서 설명하는데하나하나가 그 주제에 대한 처방전과 같은 느낌이다의학에 있어서는 전문 지식을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미술사에 있어서는 교양 수준의 배경지식을 충실하게 전달한다미술 작품을 그저 의학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삽화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과 이력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시대적 배경기법의 특징그 당시의 미술 사조까지 미술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피터르 브뤼헐, <맹인을 이끄는 맹인>, 1568. 저자는 이 그림 속 시각장애인들을 관찰해 누가 어떤 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는지 분석한다.


  단순히 배경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눈으로 그림을 분석하고 있어 흥미롭다저자는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맹인을 이끄는 맹인속에서 묘사된 시각장애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그들이 각각 어떤 병으로 시각을 잃었는지 분석해낸다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디프테리아>에는 호흡 곤란을 겪는 아이를 돕기 위해 손가락으로 아이의 목구멍을 벌리려고 하는 남자가 그려져 있다이렇게 하면 목구멍의 기도 점막을 자극해 림프가 더욱 부어올라서 아이는 숨을 더 쉬기 힘들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초의 의료 기술을 생각해 보면 그림 속 아이는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의학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의학적 해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압생트 중독으로 인한 황시증으로 별 주위의 노란 별무리가 보였을 것이라는 통설이 있지만, 저자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 통설을 반박한다. 


  인문 교양서 중에는 그저 대중 독자들이 흔히 알고 있는 통설만 정리하는 경우가 많은데그런 통설에만 기대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별이 빛나는 밤>을 비롯한 반 고흐의 작품들에는 노란색별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빛무리가 많이 나타나는데반 고흐가 즐겨 마셨던 술 압생트 때문에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통설이 있다하지만 별 주위에서 빛무리가 보일 정도가 되려면 182리터 이상의 압생트를 한꺼번에 마셔야 한다는 1997년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면서그가 복용하던 간질약의 부작용일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한다스탕달에게 스탕달 신드롬(미술 작품과 교감한 관람객이 흥분과 자아 상실을 경험하는 현상)’을 일으킨 작품이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클레오파트라가 독사가 자기 가슴을 물게 해 자살했다는 것도 동양에 대한 서양의 환상이 반영된 가설일 뿐이다라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런 미술 작품과 의학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을 경어체로 서술하고 있어 더욱 더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그림을 보며주면서 그림과 관련된 병이 어떤 것인지그 병은 어떻게 예방하면 되는지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치료하고 몸 관리를 하면 되는지 처방하는 것 같다그래서 독자들은 더욱 친근감을 느끼고 이야기를 듣듯 편안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다만 고유명사 표기가 정확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프랑스인이기 때문에 귀스타브Gustave’로 표기해야 하는 이름을 자꾸 독일식 표기인 구스타프로 표기하고 알렉상드르Alexandre’를 알렉상드로로 표기하며 마네트 살로몽의 원어 표기를 ‘Manette Salomon’으로 제대로 적어놓고도 계속 마네트 랄르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스페인인인데 영어식으로 프랜시스 고야라고 표기한다동성애자라고 분명히 밝혀진 사람은 20세기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인데 17세기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을 동성애자라고 적어 놓는 오류도 보인다모차르트의 사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모차르트가 매독 치료를 위해 수은을 치료제로 사용하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즐겁게 읽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것도 많은 인문 교양서이다미술 작품에서도 의학적인 사실들의학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고 미술사 지식과 의학 지식들을 함께 쌓아가는 것이 즐겁다미술관과 병원의 행복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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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미술 Art & Ideas 11
조너선 블룸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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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멀고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담긴 책, 예쁜 이미지가 많이 실린 책을 읽고 싶어진다. 도서관에서 그런 책을 찾다 문득 몇 년 전에 읽었던 『이슬람 미술』이 떠올랐다. 이슬람교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근대까지 이슬람 미술사 전체를 훑어보는, 두껍고 사진이 많았던 책. 그때는 호기심에 읽었다가 생각보다 지루해 꾸역꾸역 읽었는데, 그때보다 공부 양이 많이 쌓였고 딱딱한 책에 대한 인내심도 더 많아진 지금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확실히 몇 년 전보다는 재미있게 읽혔다. 더 이상 역사와 미술사를 전공 과목으로 공부하지 않게 된 이후로 역사와 미술사 공부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깨달았으니까. 이 책은 미술사와 그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되는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술이 딱딱하다는 평에는 공감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부분처럼("햇살이 볼트 천장의 드럼에 설치된 창문으로 스며들 때 생기는 그림자의 움직임은 별이 총총한 하늘이 회전하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서정적인 문장들도 종종 보이지만, 대부분은 사실 그 자체만 나열하는 서술이라 종종 지루하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정보량이 많다. 이슬람 미술에 대해 이렇게 풍부한 내용을 담은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으니 정보량이 많은 건 분명히 장점이다.


13세기의 서예가 야쿠트 알 무스타심이 필사한 쿠란. 16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에서 이 쿠란을 복원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donttakepictures.com/dtp-blog/2016/3/7/bookmarks-islamic-arts-museum-of-malaysias-quran-collection


딱딱한 서술에 지루해지다가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아름다운 이슬람 미술 작품들에 마음을 사로잡힌다.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은 책을 신의 계시가 담긴 것, 문화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책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각지게 쓰거나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흘려쓰거나, 굵기를 일정하게 하거나 강약을 주는 등, 글의 목적과 성격에 맞추어 다양하게 써내려간 아랍 문자들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거기에 각 장의 제목, 본문의 첫머리,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나는 곳, 모음 부호까지 금박과 은박, 화려한 색색의 물감들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비흐자드, <유수프의 유혹>, 1488. 유수프(요셉의 이슬람식 발음)가 이집트 노예로 지내던 시절,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 오자 도망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책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건 삽화로 실린 세밀화들이다. 옷과 머리 모양만 바꾸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전형적으로 그려진 인물들과 달리, 그들이 입은 옷과 그들을 둘러싼 배경은 더 없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스크린톤 없이 어떻게 저렇게 자잘한 무늬를 다 그려냈을까, 어떻게 저런 색감을 만들어냈을까 신기하다. 각각의 색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아르다빌의 카펫, 이란, 1539~1540. 가로 10m, 세로 5m에 달하며 장식매듭이 수천만 개나 되는 정교한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https://ardabilcarpetanalysis.wordpress.com/2017/11/16/formal-and-contextual-analysis-of-the-ardabil-carpet/ 이슬람 문화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펫. 수 세기 동안 직물은 이슬람 경제의 근간이었고 경제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중시되었다. 이 책에도 이슬람 직물들의 도판이 많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카펫은 다른 문화권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화려하다. 길이가 10m가 넘는데다 장식매듭이 수천만 개나 된다니 얼마나 정교한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샤 자한의 백옥으로 만든 포도주잔, 인도, 1656~1657. 조롱박 형태는 중국에서, 염소 머리 모양 손잡이는 유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굴 제국은 실크로드 도시인 호탄이나 중국에서 옥을 수입해 정교한 옥 공예품을 만들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pinterest.co.kr/pin/335940453438363473/ 우아한 공예품들도 눈길을 끈다. 대부분 여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공예품들이지만, 샤 자한의 백옥 포도주잔은 간결하면서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많지 않은 선으로도 잔의 우아한 형태를 만들어냈고, 티 없는 하얀색이 깨끗한 느낌을 더한다. 꼭 필요한 형태와 선만으로 우아함을 만들어낸 장인의 솜씨가 감탄스럽다.


이스파한의 샤 모스크, 이란, 1611~1616.

이미지 출처: https://www.anciens-stmarc-lyon.fr/vie-de-lassociation/photos-iran/ispahan-la-mosquee-du-shah/image_view_fullscreen 

예배를 드리는 모스크와 군주들이 생활하고 정무를 보는 궁전, 군주와 그의 가족들이 묻힌 영묘는 처음에는 단순한 모습이었지만, 필요에 따라,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독특한 건축 양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성당에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장식들이 이슬람교의 모스크와 궁전, 영묘에서는 주된 요소로 사용된다. 돔과 주변의 미나레트(첨탑), 뽀족 아치가 만들어내는 우아한 선과 건물 표면을 뒤덮고 있는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가 어우러져 이슬람 문화권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다시 읽는 책인데도 새삼 느꼈다.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 것은 많구나. 그리고 내가 잘 모르는 역사와 미술사가 너무 많구나. 고등학생 때 공부한 세계사에서도 이슬람권의 역사가 나왔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와 가까운 중국, 일본사나 근대에 들어 세계사를 주도한 서구의 역사보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비중도 훨씬 적었고, 고등학생 때 이후로 접할 일도 거의 없었으니까. 대학교에서도 이슬람 역사만 따로 공부하는 과목은 없었고. 또한 서양미술사를 다룬 책은 정말 많은데 이슬람 미술만을 다룬 한국어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이 책이 출간되고 17년이 지났는데도 같은 주제를 다루었거나 최근의 연구 동향을 반영해서 업데이트한 책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우리가 책을 통해 접하는 세상도 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 책에 실린 작품 사진들은 저작권 때문에 사용하기 어려워 책에 실린 작품들을 검색해 찾은 이미지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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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한국 현대미술
윤난지 외 지음, 현대미술포럼 기획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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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전공자지만 나는 놀랄 만큼 한국 현대미술에 무지하다. 미술사를 공부할 때 내게는 이름도 낯선 한국 현대 미술가들을 선후배, 동기들이 잘 알고 있을 때 내 식견이 얼마나 부족한지 느꼈다. 민중미술을 제외하면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도, 지금의 한국 미술도 잘 알지 못한다. ‘경계’, “여성”, “현실”, “매체”, “제도”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로 한국 현대미술을 살펴본『키워드로 읽는 한국 현대미술』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키워드 1. 경계

‘한국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한국적인 미술’은 어떤 미술일까? 이 책은 한국 현대미술의 ‘한국적인’ 특성이 어떤 외래의 것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것,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위) 김환기, <호월>, 1954, (아래) 박상옥, <한일閑日>, 1954.

화가들은 서양 미술의 기법과 한국적인 소재, 한국적인 미감을 접목시키기 위해, 추상화에 달항아리 같은 전통적인 물건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를 그려넣거나(김환기, <호월>)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그렸다.(박상옥, 한일)


민족 미술을 수립해야 한다는 막중한 과제를 실현하는 장이었던 국전에는 동양화 부문과 서양화 부문이 모두 있고, 추상 미술과 구상 미술이 서로 경쟁하면서 양대 축을 이루었다. 화가들은 추상화에 달항아리 같은 전통적인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를 그려넣거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번지기 기법을 사용하고, 도자기, 곰방대 같은 전통 공예품을 서양의 사실주의 구상화 기법으로 그리는 등 서양 미술에서 들여온 기법과 한국적인 소재, 한국적인 미감을 접목시켰다. 이렇게 한국 현대미술은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서양,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만들어진 문화적 혼종이었다. 


키워드 2. 여성

여성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성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학습된 것, 허구라고 주장했다. 버틀러의 이론은 1990년대 말 한국의 여성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누드 상태에서 남성처럼 서서 소변을 보는 포즈를 취하는 행위예술, 남성 배역을 연기하는 국극의 여성 배우들을 다룬 작업 등 흔히 생각하는 여성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위) 김도희, <만월의 환영>, 2012. 임신한 작가 자신의 배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비디오 아트이다. 

(아래) 김가람, <더섹시비키니닷컴>, 2011. 관객들이 마음에 드는 비키니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게 한다.


반면 1980년대에 태어난 지금의 젊은 여성 미술가들은 여성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일상에서 겪는 여성의 몸과 여성성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임신한 자신의 배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김도희의 비디오 아트 <만월의 환영>(2012)이나 관객들이 마음에 드는 비키니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게 하는 김가람의 <더섹시비키니닷컴>(2011)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변화가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여성성에 다시 얽매이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이론이 아닌 실제 여성의 삶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키워드 3. 현실

한국 현대미술은 전쟁과 반공 이데올로기, 군사 독재 등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과 무관할 수 없었다. 한국의 미술가들은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도 작품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냈다. 


(위) 최병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년 6월 항쟁에서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담은 걸개그림이다.

(아래) 최병수, <너의 몸은 꽃이 되어>,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손녀의 시신을 안고 있는 이라크 노인의 모습을 그린 걸개그림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의지를 담고 있다. 


그 중 인상 깊었던 인물은 민중미술 화가 최병수였다. 그는 원래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목수였다. 그런데 1986년 벽화를 그리는 미대 학생들을 도와 꽃 몇 송이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경찰에게 연행되어 자신이 화가라고 자백하는 조서를 써야 했다.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겪으면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6월 항쟁에서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담은 걸개그림과 판화, 영정 그림을 제작하는 등 민주화 현장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2003년 이라크에서 반전 운동을 위한 걸개그림을 그리고 2016년 촛불 시위에서 ‘하야’라는 글씨 모양의 솟대를 들고 나오는 등, 지금도 그는 투쟁의 현장에서 작품으로 투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시대의 현실 때문에 미술가가 된 그가 지금까지도 현실을 비판하고 작품으로 현실에 맞서는 미술가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키워드 4. 매체

김홍석, <걸레질>, <닦기>, <빗자루질>, <젓기>, 2012. 작가가 캔버스에 밑칠을 한 다음 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그들에게 걸레질, 닦기, 빗자루질, 젓기를 시켜 완성한 작품이다. 이 노동자들에게 일한 시간만큼의 임금만 지불하고 저작권을 나누지 않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현대 미술에서는 물감, 목재, 석재 같은 전통적인 매체뿐만 아니라 비디오, 기계, 텍스트 같은 매체까지 쓰이며, 매체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 책에서 TV와 라디오, 로봇을 매체로 사용했던 백남준의 예술도 소개되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은 김홍석의 협업 미술이었다. 김홍석은 캔버스에 밑칠을 한 후 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는 단순노동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 노동자들에게는 일한 시간만큼의 적절한 임금만 주고, 작품에 대한 저작권과 지적 재산권은 작가인 김홍석 혼자 갖는다. 이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이런 작품 활동을 통해 김홍석은 협업 미술에서 생길 수 있는 저작권 문제,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들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으로 인한 담론까지 만들어낸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재료를 활용하는 것 못지않게 미술의 매체의 범위를 넓힌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키워드 5. 제도

한 나라의 미술이 발전하려면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5장 ‘제도를 생각하다’에 나온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불행히도 한국 현대미술을 제도가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시의 창작공간 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예술공간들의 위치도. 

이미지 출처: http://m.fnnews.com/news/201507011757155298


한 가지 사례는 서울시의 창작공간 정책이다. 유럽에서 폐교를 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으로 제공해 지역 문화 활성화까지 이룬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 서울시에서는 2009년부터 서울 내의 공간들을 미술가들에게 제공하는 창작공간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재정상의 문제 때문에 미술가들은 단 1년 동안만 공간을 제공받을 수 있으니, 이들이 해당 지역에 뿌리내리기는 어렵다. 게다가 창작공간을 활용하는 미술가들에게 지역 연계 문화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까지 지워놓으니, 미술가들은 미술가들대로 창작을 방해받고 서울시는 서울시대로 지역 문화 활성화를 이루지 못한다. 서울시의 창작공간 정책을 고찰한 저자는, 작가들에 대한 창작 지원과 지역 재생 정책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천경자 화백 자신은 위작이라고 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과 검찰에서는 진품으로 주장해 논란이 일어났던 작품 <미인도>.


또 하나의 사례는 제도가 한국 현대미술을 뒷받침하기는커녕 억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인도>는 화가 본인이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진품 감정을 통해 해당 작품이 진품이라고 주장했고, 검찰까지 나서서 수사한 끝에 미인도를 진품으로 판단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미술관의 제도적 권위와 국가 권력으로 인해 정작 원작자인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인지 아닌지 판정할 권리조차 빼앗긴 것이다. <미인도>의 사례뿐만 아니라 국가가 공공의 안녕과 미풍양속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작품에 불온하다는 딱지를 붙인 사례,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사례를 통해 우리는 제도가 미술에게 얼마나 큰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제도가 미술을 통제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주체가 아닌 든든한 후원자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 책이 연구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미술과 그 역사를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이런 시도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학술적 관심이 커지고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가 활발히 일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저자들의 말처럼 이 책은 미술사 전공자가 아닌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논문집 형식이라 일반 독자들에게는 좀 딱딱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러면서도 한국 현대미술에서 일어났던 주요 쟁점들을 고찰해 보면서 일반 독자들과 전공자들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런 점에서 일반 독자들과 연구자들 모두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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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 사회와 인간에 지속하는 건축의 가치
김광현 지음 / 공간서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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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서 있는 스님. 저자는 새벽의 부석사를 바라보면서 모두가 그곳에서 느끼는 경건함, 경외감, 성스러움이 부석사의 공동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진 출처: http://www.outdoor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616


  이 책의 제목에서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공동성’이란 대체 뭘까? 공동성은 어떤 장소와 공간에 대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 장소만의 가치, 그 장소를 그 장소답게 만드는 본질이다. ‘공동’이라는 말 때문에 공동성이 공동체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공동성은 어느 한 공동체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공동체를 넘어 서로 다른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까지 이어준다. 예를 들자면, 새벽의 부석사에서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부터 신도들, 답사하러 온 학생들, 여행 온 관광객들까지 모두가 느끼는 경외감, 성스러움, 경건함이 부석사만이 지니는 공동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공동성이 저자인 건축가 김광현 교수가 생각하는 건축의 본질이자 우리가 지켜가야 할 가치이다. 이 책에 실린 김광현 교수의 글들에서 일관성 있게 이야기되는 것은 ‘공동성의 건축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 유럽 어느 도시에 가도 있는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려는 시민 공동의 의지가 담겨 있다. 사진 출처: https://www.pps.org/places/piazza-san-marco


  그가 생각하는 ‘공동성의 건축’은 어느 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동의 의지, 질서, 감각이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탐구하는 건축이다.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는 곳을 건축하려고 하는 시민 공동의 의지가 담겨 있다. 직장 어린이집은 직원의 아이들이 회사 모두의 아이들이라는 근본적인 가치에 회사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공감했기에 건축된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이들에게 속해 있는 인간의 본성, 가치에 대해 묻고, 그것을 건축으로 실천하는 것이 건축가의 임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  건축에서 인간 모두에게 속한 가치와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현학적이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 그는 어떤 현학적인 수사나 허세도 거부하면서, ‘팩트 폭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지금 우리 건축이 품고 있는 문제들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건축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하나 같이 “저는 어렸을 때부터 건축을 사랑했거든요.”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런 태도는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건축은 현실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실천적 학문이다. 이런 본질을 ‘인문학’이나 ‘미학’이라는 포장지로 가려도 건축이 현실의 온갖 문제와 제약들과 부딪치며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나치게 낮은 설계대가, 건축 경기는 점점 나빠지는데 지금도 지나치게 많이 배출되고 있는 건축가들, 단결하지 못하고 각자의 이익이나 입장 차이 때문에 사분오열되는 건축협회, 시민들이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가장 싼 값으로 공공건물을 만들려고 하는 공공기관들까지 건축가가 부딪쳐야 하는 현실은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저자는 공동성의 건축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건축가로서 앞으로 자신이 겪을 어려움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학생에게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제 학교에 들어오게 되면 먼 훗날 내가 건축 작품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그 작품을 넘어 이렇게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그들의 생활에 바짝 다가서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더 풍부해지도록 하는 것에 최종 목표를 두어라.” 그는 건축 안에 사회에 공간과 장소를 제공하고 사회 구성원들을 묶어주며 사회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믿는다. 건축을 사랑하고 가꾸며 건축을 설계하고 짓는 이들의 노력을 알면 나 자신의 삶이 풍부해지기에, 건축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 국민들에게도 건축에 대한 기초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공동성의 건축으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그의 꿈을,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건축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이유다.


* P. S. 이 책에 실린 글들 중에는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들도 많지만, 슬프게도 그 당시의 문제점들이 2010년대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그 문제점들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저자는 글을 쓴 시점을 명시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생각을 원래 글 뒤에 덧붙여, 책의 시의성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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