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 한국 현대미술
윤난지 외 지음, 현대미술포럼 기획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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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전공자지만 나는 놀랄 만큼 한국 현대미술에 무지하다. 미술사를 공부할 때 내게는 이름도 낯선 한국 현대 미술가들을 선후배, 동기들이 잘 알고 있을 때 내 식견이 얼마나 부족한지 느꼈다. 민중미술을 제외하면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도, 지금의 한국 미술도 잘 알지 못한다. ‘경계’, “여성”, “현실”, “매체”, “제도”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로 한국 현대미술을 살펴본『키워드로 읽는 한국 현대미술』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키워드 1. 경계

‘한국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한국적인 미술’은 어떤 미술일까? 이 책은 한국 현대미술의 ‘한국적인’ 특성이 어떤 외래의 것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것,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위) 김환기, <호월>, 1954, (아래) 박상옥, <한일閑日>, 1954.

화가들은 서양 미술의 기법과 한국적인 소재, 한국적인 미감을 접목시키기 위해, 추상화에 달항아리 같은 전통적인 물건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를 그려넣거나(김환기, <호월>)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그렸다.(박상옥, 한일)


민족 미술을 수립해야 한다는 막중한 과제를 실현하는 장이었던 국전에는 동양화 부문과 서양화 부문이 모두 있고, 추상 미술과 구상 미술이 서로 경쟁하면서 양대 축을 이루었다. 화가들은 추상화에 달항아리 같은 전통적인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를 그려넣거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번지기 기법을 사용하고, 도자기, 곰방대 같은 전통 공예품을 서양의 사실주의 구상화 기법으로 그리는 등 서양 미술에서 들여온 기법과 한국적인 소재, 한국적인 미감을 접목시켰다. 이렇게 한국 현대미술은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서양,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만들어진 문화적 혼종이었다. 


키워드 2. 여성

여성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성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학습된 것, 허구라고 주장했다. 버틀러의 이론은 1990년대 말 한국의 여성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누드 상태에서 남성처럼 서서 소변을 보는 포즈를 취하는 행위예술, 남성 배역을 연기하는 국극의 여성 배우들을 다룬 작업 등 흔히 생각하는 여성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위) 김도희, <만월의 환영>, 2012. 임신한 작가 자신의 배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비디오 아트이다. 

(아래) 김가람, <더섹시비키니닷컴>, 2011. 관객들이 마음에 드는 비키니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게 한다.


반면 1980년대에 태어난 지금의 젊은 여성 미술가들은 여성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일상에서 겪는 여성의 몸과 여성성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임신한 자신의 배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김도희의 비디오 아트 <만월의 환영>(2012)이나 관객들이 마음에 드는 비키니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게 하는 김가람의 <더섹시비키니닷컴>(2011)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변화가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여성성에 다시 얽매이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이론이 아닌 실제 여성의 삶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키워드 3. 현실

한국 현대미술은 전쟁과 반공 이데올로기, 군사 독재 등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과 무관할 수 없었다. 한국의 미술가들은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도 작품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냈다. 


(위) 최병수, <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년 6월 항쟁에서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담은 걸개그림이다.

(아래) 최병수, <너의 몸은 꽃이 되어>,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손녀의 시신을 안고 있는 이라크 노인의 모습을 그린 걸개그림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의지를 담고 있다. 


그 중 인상 깊었던 인물은 민중미술 화가 최병수였다. 그는 원래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목수였다. 그런데 1986년 벽화를 그리는 미대 학생들을 도와 꽃 몇 송이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경찰에게 연행되어 자신이 화가라고 자백하는 조서를 써야 했다.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겪으면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6월 항쟁에서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담은 걸개그림과 판화, 영정 그림을 제작하는 등 민주화 현장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2003년 이라크에서 반전 운동을 위한 걸개그림을 그리고 2016년 촛불 시위에서 ‘하야’라는 글씨 모양의 솟대를 들고 나오는 등, 지금도 그는 투쟁의 현장에서 작품으로 투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시대의 현실 때문에 미술가가 된 그가 지금까지도 현실을 비판하고 작품으로 현실에 맞서는 미술가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키워드 4. 매체

김홍석, <걸레질>, <닦기>, <빗자루질>, <젓기>, 2012. 작가가 캔버스에 밑칠을 한 다음 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그들에게 걸레질, 닦기, 빗자루질, 젓기를 시켜 완성한 작품이다. 이 노동자들에게 일한 시간만큼의 임금만 지불하고 저작권을 나누지 않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현대 미술에서는 물감, 목재, 석재 같은 전통적인 매체뿐만 아니라 비디오, 기계, 텍스트 같은 매체까지 쓰이며, 매체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 책에서 TV와 라디오, 로봇을 매체로 사용했던 백남준의 예술도 소개되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은 김홍석의 협업 미술이었다. 김홍석은 캔버스에 밑칠을 한 후 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는 단순노동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 노동자들에게는 일한 시간만큼의 적절한 임금만 주고, 작품에 대한 저작권과 지적 재산권은 작가인 김홍석 혼자 갖는다. 이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이런 작품 활동을 통해 김홍석은 협업 미술에서 생길 수 있는 저작권 문제, 윤리 문제에 대한 논의들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으로 인한 담론까지 만들어낸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재료를 활용하는 것 못지않게 미술의 매체의 범위를 넓힌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키워드 5. 제도

한 나라의 미술이 발전하려면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5장 ‘제도를 생각하다’에 나온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불행히도 한국 현대미술을 제도가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시의 창작공간 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예술공간들의 위치도. 

이미지 출처: http://m.fnnews.com/news/201507011757155298


한 가지 사례는 서울시의 창작공간 정책이다. 유럽에서 폐교를 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으로 제공해 지역 문화 활성화까지 이룬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 서울시에서는 2009년부터 서울 내의 공간들을 미술가들에게 제공하는 창작공간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재정상의 문제 때문에 미술가들은 단 1년 동안만 공간을 제공받을 수 있으니, 이들이 해당 지역에 뿌리내리기는 어렵다. 게다가 창작공간을 활용하는 미술가들에게 지역 연계 문화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까지 지워놓으니, 미술가들은 미술가들대로 창작을 방해받고 서울시는 서울시대로 지역 문화 활성화를 이루지 못한다. 서울시의 창작공간 정책을 고찰한 저자는, 작가들에 대한 창작 지원과 지역 재생 정책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천경자 화백 자신은 위작이라고 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과 검찰에서는 진품으로 주장해 논란이 일어났던 작품 <미인도>.


또 하나의 사례는 제도가 한국 현대미술을 뒷받침하기는커녕 억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인도>는 화가 본인이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진품 감정을 통해 해당 작품이 진품이라고 주장했고, 검찰까지 나서서 수사한 끝에 미인도를 진품으로 판단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미술관의 제도적 권위와 국가 권력으로 인해 정작 원작자인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인지 아닌지 판정할 권리조차 빼앗긴 것이다. <미인도>의 사례뿐만 아니라 국가가 공공의 안녕과 미풍양속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작품에 불온하다는 딱지를 붙인 사례,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사례를 통해 우리는 제도가 미술에게 얼마나 큰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제도가 미술을 통제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주체가 아닌 든든한 후원자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 책이 연구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미술과 그 역사를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이런 시도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학술적 관심이 커지고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가 활발히 일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저자들의 말처럼 이 책은 미술사 전공자가 아닌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논문집 형식이라 일반 독자들에게는 좀 딱딱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러면서도 한국 현대미술에서 일어났던 주요 쟁점들을 고찰해 보면서 일반 독자들과 전공자들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런 점에서 일반 독자들과 연구자들 모두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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