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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평점 :
대학원에서 미술사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미술사에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있었던가?” 내가 프리다 칼로를 이야기하자 교수님이 말했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 아류잖아? 또 다른 사람은 없어?” 나도 다른 학생들도 위대한 여성 미술가를 한 명도 더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틀렸다. 프리다 칼로는 결코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아류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어야 했다. “왜 미술사에는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을까?”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 이것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klin이 던진 질문이다. 렘브란트, 루벤스, 마네, 모네, 반 고흐, 피카소까지 수많은 남성 거장들이 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런데 이들에 필적하는 여성 거장은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노클린은 미술사에서 여성 거장이 나타나지 않은 원인으로 남성 중심 사회의 성차별을 지목했다.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 교육을 받는 데도 작품 활동을 하는 데도 제약을 받았고,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육아와 가사 노동을 떠맡았기 때문에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는 가부장적 사회의 성차별과 싸우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 실린 21명의 여성 미술가들 중 대다수가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남성 미술가의 작품보다 열등한 것, 아류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동시대의 다른 남성 미술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마리에타 로부스티, <자화상>, 1580년.
마리에타 로부스티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딸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수백 년 동안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다.
그렇게 지워진 여성 미술가 중 한 사람이 마리에타 로부스티Marietta Robusti다. 우리는 마리에타 로부스티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잘 알고 있다. 본명인 자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보다 별명인 ‘틴토레토Tintoretto’로 잘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화가. 마리에타는 틴토레토의 자녀들 중 예술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고, 틴토레토는 평생 동안 딸과 공동 작업을 했다. 딸이 서른이 될 때까지 결혼조차 허락하지 않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데릴사위를 들였을 정도로 틴토레토는 딸에게 집착했다.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군주들이 마리에타를 궁정화가로 채용하려 했지만, 틴토레토는 마리에타를 자기 작업장에서만 일하도록 했다.
<소년과 함께 있는 노인의 초상>, 1585년.
틴토레토가 아닌 마리에타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까지 소장처인 빈 미술사박물관에서는 틴토레토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마리에타가 아이를 낳다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후, 틴토레토의 창작 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페미니스트 미술가 그룹인 게릴라 걸스Guerilla Girls는 사실상 틴토레토 작업장의 핵심이 그녀였기 때문에 그녀가 죽은 뒤로는 틴토레토가 예전만큼의 창작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마리에타가 자신의 서명을 남긴 작품은 단 한 개였기에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아버지나 다른 남성 화가의 작품으로 전해져 왔다. 최근 르네상스 시기 여성 미술가들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아버지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이 그녀의 그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녀를 떠나지 않았던 아버지의 그늘이 이제야 조금씩 걷히고 있는 셈이다.
마리에타가 겪었던 가부장제의 억압 외에 여성들이 미술사의 거장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했던 원인이 또 있다. 회화와 조각은 미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여겨졌는데, 여성들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가족이 아닌 남성 미술가의 수업을 사적으로 들을 수 없었고, 회화 기술을 익히는 데 필요한 누드 데생 수업도 받을 수 없었다. 또한 여성은 육체적인 힘도 지적 능력도 부족해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이 할 수 있었던 예술 작업은 공예와 자수였고, 이것들은 남성들에게만 허락된 회화, 조각, 건축보다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골로 뒀던 패션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이 디자인한 드레스
(가운데) 요아나 쿠르턴, <사냥 장면>, 1700. 종이 공예 작품이다.
(아래) 영국의 정원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이 디자인한 헤스터콤 하우스의 정원.
그래서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미술사의 범주를 회화, 조각뿐만 아니라 패션, 공예, 디자인 분야까지 확장해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난한 시골 소녀에서 세계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된 로즈 베르탱, 종이 오리기 공예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던 요아나 쿠르턴, 시력 손상 때문에 화가의 길을 포기했지만 캔버스 대신 정원 조경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거트루드 지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예술을 펼쳤던 여성들의 삶이 드러난다. 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 장르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미술사의 거장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은 분명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많지 않은 분량 안에 21명이나 되는 미술가들을 다루다 보니 한 명당 내용이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이다. 요아나 쿠르턴의 경우 도판을 제외한 텍스트 설명이 4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막 재조명되기 시작한 미술가들이 대부분이라 관련 연구 자료가 부족해서였겠지만, 좀 더 깊이 있게 여성 미술가들을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맛보기만 한 기분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21명의 여성 미술가 모두가 유럽 출신이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아메리카 지역의 여성 미술가들은 한 명도 다루어지지 않아, 서양미술사 책이라 하더라도 유럽 쪽에 치우쳐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근현대에 들어선 이후로 서양 미술 분야에서 활약한 아시아, 아메리카 지역의 여성 미술가들도 많을 텐데. 화질이 낮은 도판들이 종종 눈에 띄고 크기를 너무 작게 해 놓은 도판들이 많은 것도 미술사 책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 판면 구성을 수정해서라도 도판을 더 크게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아쉽지만,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 가려져 있던 여성 미술가 21명을 만날 수 있게 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책이다. 각자 처한 상황과 한계 속에서도 자신이 갈 길을 모색하고 개척해 갔던 그녀들의 삶이, 아직도 남아 있는 성차별이라는 벽을 허물려고 하는 우리에게 영감과 힘을 준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 남성 미술가 대 여성 미술가의 전시회 비율이 70 대 30일 정도로 미술계의 성차별은 심각하다. 그러나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라는 17세기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선언을 마음속에 품고 계속 정진하는 여성 미술가들이 있기에,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의 이름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