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종료] 6기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평소 책을 즐겨 읽는 터라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을 거라 가볍게 생각했던 게 화근이다. 책이라는 게 그렇다. 변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기와 궁합이 맞는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어찌 보면 편식의 달콤함이 몸에 배어 버린 것처럼 그런 지 모르겠다. 그러니 억지로 구겨 넣은 책이 소화가 됐을리가 없다.  책은 느려지고 덮쳐 오는 이야기는 살처럼 박혀와 콕콕 쑤셔댔다. 그 고통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고 왜 이런 짓을 자초했는지 나 자신이 책망스럽고 그랬다.  

삶이란 게 그런가 보다. 어떤 일이든 폭풍처럼 몰아치고 지나가면 그제사 해답이 눈에 보인다. 미련해도 이럴 수는 없다. 의무든 책임이든 지켰어야 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공으로 받는 것에 안 그래도 모자란 판단력이 흐려 졌었나 보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데, 죽이 되었든 밥이 되었든 긴장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하다. 물론 제 때에 맞춤맞게 글을 올리고 생각을 정리했으면 더 좋았게지만 말이다. 그래도 귀가 가려운 건 사실이다. (아마 알라딘지기님의 원망이 하늘에 닿았을 수도.^^) 

돌이켜 보건데, 내가 무모한 짓을 획책한 경위는 아무래도 명분없는 위기감이 컸던 모양이다. 더 다양한 생각거리와 이야기를 접해야 한다는 개념없는 위기감 말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분투했다는 것에는 위안을 삼는다. 앞서 말했듯 내게 맞지 않는 편견의 높은 벽으로 인해 책 한페이지가 마치 콘크리트더미처럼 무겁게 느껴지던 것들을 집어 삼키기는 했으니 말이다. 아직 젊음으로 소화는 잘 한다. 때로 고장도 나고 게워 내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쌩쌩하다. 그러므로 집어 삼킨 이 모든 생각의 집합들이 언제일지 모르겠으나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변화를 거듭해 아주 미진하나마 변신을 하지 않겠는가. 

잡설이 길었다. 남은 숙제라도 깨끗하게 마무리 해야지 면이라도 살지 싶다.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개인적으로 <소현>과 <별궁의 노래>가 좋았다.  비운의 세자 소현세자를 주제로 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내외의 이야기를 다층적인 시각에서 버물렸다는 것이 눈에 쏙쏙 비쳤다. 김인숙 작가의 <소현>은 단어와 문장의 조련이 기가 막혔으며, 김용상 작가의 <별궁의 노래>는 서정적인 가운데 스며드는 아련함이 사뭇쳤다. 무딘 역사의식에 대해 시종일관 의문을 던졌고 고착화되고 경직된 가치관에 신선한 공기를 채운 기분이다. 알게 모르게 지배했던 경쟁의 역사, 미화된 역사에 현기증이 났었던 것도 타성에 길들여진 허약함이 원인이었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몰랐던 진실이 햇빛을 받으면 고스란히 들어나는 것처럼 역사는 균형감이 생명임을 절감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불변의 진리처럼 말이다.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베스트를 뽑는 것만큼 작위적인 행위는 없지 싶다. 호불호에 따라 갈리는 것도 다양성이나 관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의 알량한 주장을 모태로 삼아 태클을 걸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므로 그냥 아주 지극히 주관적인 베스트를 좌에서 우로 나열한다. 선정의 변은 생략..^^ 

 

 

 

 

 

 

 


신간평가단 도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 p.316 소현 중에서 ]
 

끝으로 미흡한 나에게 커다란(?) 중책을 맡겨 주신 알라딘에게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건강까지 상해 가며 고생하신 그분, 문학담담지기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으나 단단히 무장하고 나서야 되겠다. 그 힘든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이렇게 다시 기웃거리는 이유는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분, 읽고 쓰는 것에 자신 있는 분 언제든 도전해 보라. 스펙타클한 긴장이 그대를 유혹하리라.(아..뻘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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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7-0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 평가단 잘 마치신 것 축하드려요...기웃대긴 했었는데 저는 책을 막상 읽어야 한다고 앞에 딱 쌓아 놓으면 부담감이 막^^ 곡우님이 추천해 주신 책들을 보니 꼭 소현을 읽어야 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문학담당자님이 건강까지 상하셨군요. 안타까워요. 책과 관련된 분들은 다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곡우님!

穀雨(곡우) 2010-07-09 16:17   좋아요 0 | URL
민망합니다. 게으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제가 책을 너무 느리게 읽는 것도 있지만 그 기간동안 우째 일이 자꾸 생기던지. 모임도 갑자기 수시로 생기고...ㅋㅋㅋ
블랑카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알라딘신간평가단 2010-07-10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님, 너무 민망해 마십시오. 실은 저도 자신 없는 일, 그저, 건강 걱정해주신 저희 평가단 분들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흑.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뷰만큼이나 맛깔난 변(?) 잘 읽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요.

穀雨(곡우) 2010-07-12 10:15   좋아요 0 | URL
알라딘신간평가단님, 이렇게 직접 댓글 달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혹 다음에 또 도전하더라도 내치시지는
말아 주시기를....^^
 
순수 박물관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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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사랑을 정의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본다. 나고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사랑은 때로는 열병처럼 때로는 아련한 사랑에 빠져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랑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영향력의 범주에는 인류가 진화하고 축적한 세월만큼의 시간에 비례한다는 생각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했기에 인류도 존재의미를 더욱 가능케 한다. 그런데 어느 심리연구에 의하면 사랑의 유효기간을 대개 1년 8개월 정도로 본단다. 그 기간이 지나면 시들시들해 져 이내 무심해진다는 다소 서글픈 연구내용이지만 무시하고 넘길 조사는 아니다.




        사랑에 눈멀고 마음 아파하고 애 태우는 시간이 영겁처럼 채워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에 목말라 한다. 그렇다. 사랑은 인간을 추동하고 움직이는 존재가치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 유효기간이 설득력 있다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러한 공식을 실제에 대입해 보면 사랑에 눈멀고 변함없이 지속 가능한 상태를 평생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보면 사랑은 쉽고도 어려운 행위겠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그러한 노력 뒤에 사랑을 획득하였다할지라도 충만한 기쁨의 상태로 여생을 함께 순항해 간다는 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사랑이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흉내 내는 것과 같아서 마치 물구나무로 서서 외줄을 걷는 것처럼 매우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그 허술한 진심이 드러날 것이며 유효기간 내에 태워 없애 버린 말라버린 감정의 빈약함에 사랑의 밑천은 금세 바닥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정의를 분류 가능한 상태로 묶어 내기 이전에 사라지지 않는 상태, 즉 불멸의 사랑은 존재할까? 영원토록 변치 않는 감정으로 인해 상대방의 모든 것에 애틋한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 정체성을 발견하는 그런 사랑을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는 영원불멸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로 인해 서로의 존재다움을 증명하고 삶을 경건하게 만든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사랑은 인간의 삶에 언제고 존재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위대하다고 우리는 말한다. 영원처럼 순결한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감동받고 삶의 희열감에 벅차올라 오염된 영혼을 정화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다. 모두들 사랑의 시작은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다른 것에- 애증으로 산다든지 - 기대 사는 경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 <순수 박물관>에서 발견한 사랑의 언어는 개념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이전의 우리가 경험한 사랑이 평면적인 상태였다면 오르한 파묵이 추출한 사랑은 입체적이다. 각자의 안목으로 사랑을 재단하더라도 이 보다 치밀하고 농도 짙을 수는 없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책 뒤표지 중에서)




        책 전편을 감싸오는 사랑의 대서사는 순간을 지배하고 시간을 멈춘다. 오르한 파묵은 치밀하고 정교하게 다듬고 닦아 낸 집념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경험한 일처럼 영혼으로부터 불러내 썼다. 그러하기에 이 책의 주인공 케말의 생애 전체를 조망하는 대 파노라마는 삶의 완경을 조밀하게 더듬는다. 아울러 터키의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격변하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상류층 사회의 가식적인 모습을 샅샅이 보여 주는 파묵의 복원력은 이 책의 완성도를 더욱 뛰어나게 이끄는 견인차다. 그러므로 케말의 사랑은 상류사회에서 벌어지는 위선과 허위와는 견줄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논하여야 할 경지에 다다른 것인지 모른다.




        진정한 사랑은 고난을 딛고 자기희생을 전제로 자란다. 그러나 그 대상이 마주보기를 위한 것이 아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기만을 위한 행위는 강박관념의 일환으로 치부되거나 미성숙한 심리가 표출된 행동으로 스토킹으로 조롱당할 수 있다. 그러나 케말의 사랑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관계를 아우르며 통찰한다. 지적이고 교양 있는 약혼녀 시벨을 포기하고 불꽃처럼 찰나에 만나 영겁의 탑을 쌓아 올린 퓌순과의 진정한 합일은 얼핏 불온하고 위험하다. 그렇지만 순수함은 진흙 속 진주처럼 퇴색되는 법이 없다.




        오르한 파묵의 이 작품은 순수의 의미를 되새긴다.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통해 주어진 상황을 몰입하게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힘이 강력하다. 오랜 세월동안 퓌순을 향한 사랑의 시간을 분절하고 다시 포개는 행위를 통해 하나하나의 순간들이 더 이상 나눌 수 없음을 파묵은 케말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케말은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 퓌순을 기억하는 상징적 존재들을 끌어 모으고 훗날 그녀만을 위한 박물관에 전시하며 그가 걸어 온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듬는 과정을 통해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 또한 케말은 퓌순의 상징물들을 통해 비워 진 영혼의 충만함을 채우고 환희와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이처럼 오르한 파묵은 층위를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의 깊이를 다층적으로  창조해 냈다. 감미롭고 로맨틱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순수박물관>은 관념도 환상도 거부한다. 오로지 사랑에 심취한 한 남자의 삶을 다층적인 시각으로 그려냈다. 인간을 바라보는 세밀한 시선은 우리에게 순수의 진정한 의미를 각인하는 신선한 이야기다. 아마 이 책은 오래도록 읽혀질 젊은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나는 예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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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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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어 낸다는 것은,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와 맞설 때가 있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나로서는 대략 가늠하기 힘든 감정과의 낯선 대면에서 연유한다. 소설은 허구라는 외피로 단단히 무장하였음에도 그 치밀한 메트로놈의 정형성을 따라 실재의 경계를 무시로 넘는다. 허구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치 않는다. 그것은 이미 잰 걸음으로 빠르게 온몸으로 전이되고 나의 삶에 올라탄다. 한 치의 오차도 흐트러짐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나를 지배한다. 소설은 서사를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잿빛으로 물든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비집고 솟은 무한한 감정들의 총체이자 가면이 수시로 바뀌는 복마 술인지 모른다. 현실과 상상이 용해될 수 없는 성질임에도 이미 감정을 송두리째 빼앗기기 일쑤다.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일이 아닌 그것은 있었거나 있음을 예정한 일로 흐려진다. 그러므로 나에게 소설은 숨겨둔 감정을 허락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만화경처럼 신기하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엇비슷한 세대의 눈에 비친 이야기라면 연대감은 더욱 공고해 진다.





        2010년 제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타이틀이 거창하다.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신선한 피를 지속적으로 펌프질하겠다는 사뭇 진중한 취지다. 물론 읽는 자의 특권을 오롯이 거머쥔 독자인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나 고답적임은 피할 수 없다. 나에게는 작가를 괴롭히는 쥐어짜는 창작의 고통과 솎아 내야 하는 인생의 카테고리도 필요치 않는다. 읽고 받아들일 최소한의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다. 접속이 고르지 못하면 쉽게 끊기고 아웃당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과 검증의 단계를 거친 묶음 형태의 책을 쥘 때면 선입견이나 가벼움도 동시에 따라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당혹감을 추스르기 위해 경험했던 축적의 관성이 만든 결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잘 빠진 글은, 어수룩한 나로서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데자뷰를 보듯 기시감에 빠지기도 혹은 모종의 동질감에 연민하며 글은 마음껏 나의 마음을 유영한다. 밀고 당기는 사이 울림은 커지고 정서적 유대는 소통으로 번진다. 어느 새 수상작으로 뽑힌 7명의 글이 문장과 문장을 넘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다다르게 한다. 삶에 지쳐 고독의 숲으로 뒤엉켜 음습해진 나의 마음을 청량한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나는 갓 구워 낸 책의 채취가 이와 같다고 믿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반문하는 피할 수 없는 불안한 자아를 위무하기에 소설은 더 없이 적합하다. 고독과 번민은 불안에서 유발되었으나 타자의 이해와 인정을 바라는 사회적 욕망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소설은 범위 내의 현실이 된다.

 




        김중혁 작가의 <1F/B1>은 기발함이 조합한 퍼즐처럼 기묘하다. 어떤 형태나 현상이 상태를 지배한다는 음모이론의 지배적 의사(疑似)의 심리적 표출장치가 신선하다. 숱해 보고 지나치는 층과 층을 나누는 슬래시를 기점으로 표류한 현상은 단락을 지나 우리 사회가 안은 치명적이고 소외된 문제에 정박한다. 실제 집단공동체 생활의 한 형태인 아파트나 주상복합에 거주하는 현대인의 취약함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건물관리자연합, 일명 슬래시메니저(SM)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다. 자본에 매수되고 문명의 이기와 편리에만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부패하기 쉬운 재물처럼 공간은 쉽게 변질되고 오염된다. 매수당한 통제는 이미 제어력을 상실한 무방비 상태다. 하지만 김중혁 작가의 상상력은 무방비에 대처하는 현란한 내러티브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시스템을 구비한 신식건물이라도 관리자의 익숙한 손놀림이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거미줄처럼 꼼꼼히 얽히고 지하통로로 이어진 관리자연합의 탄생은 소멸할 수 없는 몸부림의 표현이다. 그 속에서 관리자인 그는 세상을 꿈꾸고 현실을 다독이는 갈망의 표현인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선과 선이 만나는 소실점 위에서 <1F/B1>은 트위터처럼 너의 일을 실어 나른다. 값비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한 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모두 비합리적이라고.




        구애(求愛)의 사전적 의미는 이성의 마음을 얻는 행위다. 문장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열망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이와는 반대의 대척점에 선 상태는 실연이다. 구애는 위험을 내포한 갈등의 경합상태를 뜻한다. 순조롭거나 험난하다.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불안한 감정이 유발하는 긴장의 순간을 매끄럽게 포착해 냈다. 고립된 상태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은 본성인지 모른다. 이 책에서 등장한 김은 애도와 축하를 전달하는 화환을 배달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편혜영은 그를 통해 죽음을 분해하고 구애를 해체한다. 구애의 완성은 서로의 결핍된 순간이 충만해 진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죽음 또한 누군가로부터 잊히는 상태를 뭉개 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편혜영은 어색한 감정 선이 충돌하는 순간을 긴장의 대립과 표출로 끄집어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미완성의 연속이다. <저녁의 구애>를 덮은 후 나는 갓 우려낸 우동의 개운함보다 통조림의 텁텁함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나를 속이고 살아갈까?

        




        변희봉은 입 언저리 어느 부위에서 맴돌기만 할 뿐 낯설기만 하다. 뱉어 내지 못한 말이 날것처럼 울대를 자극한다. 물론 존재감만으로 묵직한 실존배우다. 윤인호 감독의 <더 게임>에서 변희봉의 연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으며 관객을 장악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변희봉이 이장욱에 노출되어 포위당한 것은 우연일까? 변희봉이 삶에 구속당한 연극배우의 눈에 비치게 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그 상황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변희봉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이장욱은 모험을 감행하였는지 모른다. 이야기 속 배우는 삶의 극단까지 밀려난 위태로운 상태다. 아내는 오사카로 공예를 배운다는 명분으로 이혼을 감행하며 아버지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아들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고달프기만 하다. 삶은 이처럼 지독하고 부조리하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을 꿈꾸듯 아버지로부터의 가냘픈 동조는 삶의 활력으로 작용한다. 고단한 세월을 닦아 내는 보상이다. 희망은 절망에서 핀 우아한 꽃처럼 말이다.




        배명훈 작가의 <안녕, 인공존재>는 외계에서 기록되었다는 신경숙 작가의 표현은 적확하다. 실존하는 물질에 대한 관념을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부드럽게 존재를 녹여 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지가 번득이며 아이디어가 빛난다. 데카르트가 규명한 존재의 근원을 조약이라는 돌멩이에 얹어 이렇게 잘 빚어 낼 수 있다니 그의 상상력이 부럽다. 난해한 소재를 이끈다는 것은 작가의 변辯처럼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다. 작가는 더듬을 수 없는 위치를 감정의 혼합물을 통해 적절하게 배합하고 첨가하여 순도의 완성체로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대폭발처럼 몰입은 한 템포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내가 배명훈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 또한 몰입의 완급이 주는 현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배명훈 작가의 이 글은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다문화 가정과 불법체류문제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감출 수 없는 문제다. 특히 지리적인 거리가 인접해 있는 중국인들의 불법체류는 대립과 갈등이 뒤엉킨 채 웅크린 상태다. 매번 불거 터지는 문제의 출현에 나는 정의(正義)에 의문을 갖는다. 규범과 현실을 매조지는 문제의 대처방법은 살벌하다. 분명 명분을 위시하여 처리되었음에도 나의 눈은 불신으로 물든다. 냉혹한 소외의 그림자는 더욱 맹위를 떨치고 위세는 연민을 쓰러트린다. 김미월 작가의 <중국어 수업>은 심란한 무대를 짧은 단문으로 밀어냈다. 짜임이나 틀이 빈틈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어 “짜이젠(다시 만나요) “의 은유적 비유를 통해 희망을 쏘아 올렸다. 희망은 곧 동기가 될 터이며, 동기는 움직임을 바꾸는 행위가 될 것이다. 눈물샘을 자극하게 만드는 준비되어 분출된 정소현 작가의 글에 설익은 응원, 한 자락을 날려 보낸다.




        가족은 이따금 내게 평안한지를 묻는다. 범주에서 벗어난 위태로움을 토로하기도 하며 맞설 수 없는 아픔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래도 내게 가족은 -유치한 발상인지 모르겠으나- 언제고 내 편이 될 것 같은 그런 존재다. 나는 그 중심에 집을 연상한다. 집은 회귀할 생물적 본능처럼 돌아갈 보루다. 기약 없는 소식이 제비처럼 넘나들기를 소망하며 봄꽃처럼 따뜻하기를 기대한다. 정소현 작가의 <돌아오다>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비록 해체되고 부서진 가족이지만 정상의 기능을 염원하였는지 모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이야기의 실체는 헛것 또는 유령이 되어 방황하다 가슴을 이내 후벼 판다. 하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반전의 순간을 통해 침전된 마음을 위무한다. 단절되고 소외된 가족을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 나가는 이 글은,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인상 깊은 이야기다.


        나는 개그맨을 볼 때면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에 감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직업적으로 웃겨야 하는 강박관념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현실을 떠 올린다면 웃긴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깊이를 당최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을 처음 대한 나의 인상은 진부한 역설보다는 아픔이 먼저 전해져 왔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의 편차만큼 사회는 빠르고 간결한 즉각적인 배출을 요구한다. 웃기지 못하면 철저히 외면당하고 존재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스무 살 젊음이 어우러져 풋풋함 가득한 시절 만나 결합되지 못한 사랑의 궤적을 뒤쫓는다. 다소 실험적인 뉘앙스를 흩뿌리는 김성중 작가의 <개그맨>은 쉽게 산화되어 소멸될 성질이 아니다. 곰삭혀 묵힐수록 풍부해지는 홍어처럼 글맛이 강하다. 보트피플을 희망한다는 이 작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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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특별하지 않은 청춘들의,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박근영 지음, 하덕현 사진 / 나무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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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흔히 삶은 여행에 비유되곤 한다. 여행의 설렘도 삶의 기대도 엇비슷 닮은꼴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삶의 한 가운데에서 변화무쌍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삶의 대부분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순간 속에서 산다. 선택은 곧 틀이 되고, 틀은 곧 내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더 없이 건조하며 멈춘 듯 부유하는 흐름 속에 나는 갇혀 산다. 오히려 나는 그 틀을 깨트리려 노력하지만 실은 부서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벗어난다는 것은 어색한 불안감에 노출되고 여태껏 붙들어 맨 것으로부터의 회귀할 수 없으며 타협할 수 없는 집착에 사로잡힌다. 나는 흔히 이것을 삶의 굴레 혹은 원형이라고 부르고 싶다.




        삶의 굴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고 이어진 상태가 다채로움에서 비켜 난 보편적인 상태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안정은 평범하고 적응은 지루한 법이다. 자유는 수동보다는 능동을 연모한다. 무엇이든 열망하고 얼어붙은 정열마저도 자유를 꿈꾸게 하는 것은 비상하는 자아의 태곳적 본능의 기억이다. 비록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멈추어 섰을 지라도 자유를 향해 닮아 가는 삶을 지향하는 이들을 우연이든 필연이든 마주치게 되면 발끝부터 퍼지는 자유의 향기에 온몸이 자극받고 달아오름을 이내 느낀다.




        스무 살 언저리의 그는 세상에 대한 '순정'이 있었다. 이리저리 돌멩이처럼 차이더라도 삶에 대한 어떤 애틋함 하나만은 잃지 않고 살고 싶었다. 그런 마음마저 없다면 삶은 고통일 뿐이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순진함을 잃은 세상은 그의 순정 또한 허락하지 않는다. 너의 순정도 별거 없고 나의 순정도 별거 없다는 깃털처럼 가벼운 냉소가 사는 데는 한결 편리한 법이다. --- 〈슬픔도 고이면 단단해진다〉 중에서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은 평범하지 않은 자유를 닮은 이야기다. 청춘에게만 허락된 특별함이라서보다 도전하는 젊음의 푸른 영혼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 박근영을 흠모하게 만든 느림의 미학과 예찬이 이 책을 추동하는 모든 키워드다. 삶의 속도감에 비례에 느리게 살아가는 이들을 흠모하고 흔적 하나를 건져 올리는 작업은 보편적 관념으로는 정적이며 단조롭게 다가선다. 하지만 그 단조로움을 뚫고 스며 나온 삶의 열정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세상의 끝을 향해 넘쳐나는 에너지를 토해내고 당당히 맞서는 의연함이 더욱 더 강렬한 열기를 내 뿜는다. 나는 그들을 통해 기억의 저편으로 비켜 난 추억을 자극하게 되고 흔적 없이 사라졌던 조련되지 않은 젊음의 그 시절을 소환하는 기쁨을 만끽한다.




        책은 13명의 젊은 영혼을 따라가며 소탈하게 묻고 답하며 소통하고 공유한 흔적의 결과물이다. 포토그래퍼, 디자이너, 연극배우, 화가, 영화감독, 에디터, 만화가, 뮤지션, 여행 작가, 건축가, 시인 등 책에서 소개된 그들은 스스로 삶을 예속하거나 구속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날선 세상에 상처받고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힘의 원천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는 외부적인 압력도 고통이 될 수 없으며 흘러가는 바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도 세상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현실의 냉혹함에 꺾이기도 하는 모든 순간이 삶의 또 다른 모습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가 만난 그들은 달랐다. 비록 먼 길을 돌아서 갈지언정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가려내고 세파의 굴곡을 삶의 한 조각으로 웃어 넘겼다. 바람이 불어오면 부는 쪽으로 나아가는 긍정의 오롯한 힘을 믿었으며, 소소한 일상을 보다 더 멋들어진 날로 바꿀 줄 아는 마술을 부리기도 한다. 만화가 김풍이 시크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를 향해 던져 오는 그미의 말, “삶은 즐겁게 사는 것이 이기는 거다.”라고.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자, 부러움이다.




누구인들 젊은 날 비상을 꿈꾸어보지 않을까. 그러나 언젠가부터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꿈은 꾸지 않는다. 그런 꿈은 그저 한낱 이상일 뿐이라고 밀어두고 뒤돌아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현실과 꿈 사이에서 타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 〈끝까지 부딪치고 넘어본다〉 중에서




        이처럼 누군가에게 삶은 변하지 않는 상태가 아닌 깨어 움직이는 유기체다. 그들의 열정으로 인해 나는 열병처럼 미소 짓던 젊음의 향연에 절로 도취된다. 권태롭고 무기력한 일상에 꺼져 가는 자유의 불씨를 지펴 줄 불쏘시개처럼 고무되게 만든다. 불가피하게 사람들을 능력에 따라 줄을 세우고 재단하는 숨 막히는 세상에서 가슴 벅차오르는 무엇으로 채워진다. 그 무엇은 바로 자유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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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6-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운 삶!
영혼이 자유롭다면 살만하다고 하는 데
요즘은 영혼과 육체가 모두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네요.
어떻게 사는 삶이 자유로울까요?

穀雨(곡우) 2010-06-29 13:52   좋아요 0 | URL
와우, 어려운 질문이네요. 전호인님 말씀처럼 요즘은 영혼과 육체의 구속된 이유가 자본주의의 공격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물질에 예속되고 모든 성공의 기준이 부의 서열화가 된 세상에서는 자유 또한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지 싶습니다. 전 자유는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유연한 대처에서 오는 게 아닐까하는 이미 구태의 생각으로 사는 지 모르겠습니다.

라로 2010-06-2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리뷰가 더 좋으면 어떻하죠????ㅎㅎㅎ
님의 리뷰보고 이책 찜합니다!!

穀雨(곡우) 2010-06-29 13:53   좋아요 0 | URL
리뷰보고 책 사서 후회하시면 AS해 드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네요.
그래도 칭찬은 듣기 좋은데요.^^
 
<별궁의 노래>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별궁의 노래 - 잊혀진 여걸 강빈 이야기
김용상 지음 / 순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를 들여다보면 왕이 되지 못했거나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인물에 대한 조명은 치열하다. 필요에 따라 압축되거나 혹은 삭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빈약한 약전이나 기록을 바탕으로 주춧돌을 쌓고 보와 기둥을 세운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검은 두건을 쓰고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가는 심정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축약되고 매몰된 기록을 바탕으로 잊힌 영웅들의 복원작업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짜릿함이 녹아들어 있다. 발굴자에 의해 소환되어 생생하게 불타오른 뜨거웠던 현장을 토해내기라도 할 때에는 이것으로 모든 긴장과 오류로 점철된 과거는 일시에 무너진다.




        과거는 이렇게 다시 쓰인다. 무너진 그 자리에 새롭게 생명의 빛을 부여받아 든든한 역사의 도량으로 조밀하게 엮이고 뭉쳐진다. 이것은 시간의 물리적 개념을 확장하는 유연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통념상 알고 있는 역사의 사실적 정의는 이념이나 명분, 권력에 의해 편향되고 왜곡된 해석은 심각한 오류를 유발한다. 이처럼 역사의 진실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로 회귀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을 유지한다면 이 책 <별궁의 노래>는 버려진 역사의 복원작업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대개 파란만장한 역사의 복기는 후대에 가서 빛을 발하곤 한다. 조선조를 통틀어 암울했던 시기나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힌 인물이라면 그 후보로 으뜸으로 꼽히고 회자 되는 이유도 그러하다. 게다가 신분, 남녀의 차별이 심했던 봉건제 사회에서 그들의 활약이 더욱 눈에 띄게 도드라져 보였다는 것도 호기심을 부추기는 주효한 이유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인물 중 한명인 소현세자는 역사가들의 호기심에 불을 댕기기 좋은 재료다.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여 볼모로 8년간의 모진 고통을 겪었음에도 일신의 명멸을 피하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 그였다. 최근 김인숙 작가의 <소현>에서 볼 수 있듯 애환과 번민의 고통은 이러한 시류를 잘 대변해 주는 빼어난 작품 중에 하나다. 해서 이 책 <별궁의 노래>도 그의 연장선에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저자 김용성의 오랜 신문사 기자의 경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원칙과 허구가 완벽한 호흡을 맞추어 춤을 춘다. 소현세자를 위시하여 주인공인 민희빈 강 씨의 비범한 일화를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살려 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밑천으로 민희빈 강 씨는 여걸로 그려진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합리적인 이성과 기준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향해 경영하는 세자빈의 모습은 시쳇말로 알파 걸의 우상이자 여걸이라고 칭할만하다. 신분의 벽을 온몸으로 밀어 내고 굳건하게 일어선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었던 시대다. 그러나 그녀는 부국강병을 위해 무엇보다 실사구시의 경영이 중요하였음을 통감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강단한 행보와 실용적 의식은 후대에서야 빛을 발하지만 치명적인 독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인물의 강점과 약점을 교차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갈등의 전조가 모두 하나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역사는 늘 그랬다. 개혁의 중심이 곧 폭풍의 진원지였음을 말이다. 그래서 세자빈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전개방식도 고정된 결말을 향할 수밖에 없는 한계치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영역에 철저하게 구속되고 피할 수 없는 영향력 아래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 모든 팩션소설은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외면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이 지어지고 얼개가 다듬어지면 실록의 단문은 작가의 상상력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변신을 거듭한다. 그렇게 태어난 팩션소설은 때로는 기대치 못한 변화를 거머쥐기도 한다.




        이 책은 딱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가려지고 숨겨진 이면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심리적 연대의식도 한 몫 했겠으나 진실을 향한 시대적 반영이다. 권력에 의해 무참히 도륙되고 배척당한 아픔을 통해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쓰지 않겠다는 민중의 염원인지 모른다. 실제 강빈이 김수진이라는 묘령의 인물을 거느리고 개성상단에 버금가는 커다란 상단을 운영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 소현세자가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였는지 학질에 의해 병사하였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실록에 나타난 모든 기록이 전부다.




        그래서 이 책의 탄생은 숱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지표가 된다. 이러한 가능성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흐름이나 고증의 과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터무니없는 추측이나 과장된 행적의 부풀림은 부작용이 반드시 뒤따른다. 하지만 이 책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싶다. 명백한 사실성을 배경으로 적절하게 버무려진 상상력이 전체를 장악하였기에 단지 나의 기우에 불과하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김인숙 작가의 <소현>을 함께 읽는다면 재미가 더욱 배가될 것 같다. 김인숙 작가의 글이 짜임새 있게 절제된 아픔을 노래한다면 김용성 작가의 이 책은 끌어안아 분출하는 아픔을 그린다는 차이가 있다. 또 소현세자와 더불어 강빈의 삶도 동시에 접한다면 전체적인 밑그림이 보다 더 입체적으로 형성될 시너지를 제공해 준다. 나아가 두 작가의 상상력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책을 통해 왜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로부터 외면당하고 그 중심에 민희빈 강 씨가 연루되어 일가가 몰살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는지 무성한 추측만 난무하지만 작가가 만든 상상력의 탄탄한 프리즘을 통해 기대치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으로 기대된다.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처럼 붙어서 날아다니고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처럼 붙어서 날아다니고

땅에서는 연리지처럼 한데 얽혀 사랑하자 하였네.

아득히 먼 훗날 이 세상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언정

두 사람 사랑의 한은 영원히 끊이지 않으리라

당나라 백거이의 시 <장한가 비익연리 比翼連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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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6-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런 책도 있었군요. 저는 소현세자랑 사도세자 대목만 접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소현세자는 더하지요. 사실 강빈을 알게 된 것은 한국사전이었는데 마지막에 자막 올라갈 때 울었어요--;; 막연하게 조선왕조가 쇄국의 틀안에 갇혀 있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시대에 벌써 서양문물을 접하고 개혁정치를 펼 저력을 지닌 세자와 세자빈이 있었다는 게 참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야사 같은 것 읽으면 인조가 소현세자 부부를 질투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던데...

곡우님이 저번에 써주신 <소현>에 강빈 얘기가 빠져있다고 해서 아쉬웠는데 말씀대로 상호보완해서 읽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곡우님 글은 참으로 정갈하고 단아합니다.

2010-06-22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0-06-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현을 읽고 이 책 읽으면 좋겠군요. 소현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잊고 있었는데 이 책까지 읽으려면 바쁘겠는걸요.

穀雨(곡우) 2010-06-26 16:48   좋아요 0 | URL
비교되는 대목이 한눈에 보여서 좋더군요. 소현에 부각된 인물과 별궁의 노래에 부각된 인물에 대한 대비도 나름 재밌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대하는 시각이 비슷하나 질감이 다르다는 차이가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