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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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2.0 시대를 사는 요즘, 글은 생활이다. 때로는 말보다 글이 편할 때가 있다. 글은 음절과 음절을 이어 단어를 만들고 다시 문장을 형성하는 동안 생각은 다듬어진다.  비록 상황에 따라 글은 퇴색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반해 글이 가진 파급력은 무차별적이리만큼 크고 넓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글을 잘 쓰는 재능 혹은 자질을 가진 이를 부러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일한 상황을 해석하는 힘, 능력이 남다르다면 그 또한 축복이겠다. 계절이 피고 짐에 따라 감정의 중추가 미묘하게 반응하는 상태를 문장으로 복기하듯 옮겨 내는 능력은 부럽고 또 부럽다. 정수리로 떨어지는 햇살의 양태를 마치 감촉이 손끝으로 전달되어 짜르르 퍼지게 하는 감각의 전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의 드넓은 세계로 안내하는 훌륭한 길라잡이가 된다는 사실이다.

 

글은 누구나 쓰지만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하기에 창작을 뜯어 먹고 사는 작가의 고통과 독자의 즐거움은 반비례한다고 했다.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그 결과는 냉혹하다. 진심으로 짓겠다는 흔해 빠진 광고처럼 간결한 진심은 궁즉통이다. 이 책 <라이팅클럽>의 저자 강영숙 또한 그런 동질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어마 무시한 시간을 인내하고 마치 소믈리에가 최적의 와인을 선별해 내 듯 문장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선택된 문장은 감정의 틀 속에 숙성을 해야 비로소 글이 된다. 그러므로 잘 된 글은 진심이다. 진심이 결여된 글은 형식에 불과하다. 유행에 휘둘리듯 흘러가는 부유물이다. 누에로부터 실을 추출해 내는 그 사소하고 반복적인 행위들이 모여 윤기 나는 비단이 되는 것처럼 잘 된 글에서는 윤이 난다. 읽는 자는 귀신처럼 알아본다. 무엇이 잘 된 글인지에 대해.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강영숙의 문장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 조각에 불과한 미묘한 상황 변화에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힘이 탁월하다. 그래서 같은 문장으로 쓰인 글이라도 상황의 가변성에 적확하게 어울린다. 보기에 따라 기교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강영숙의 색깔임에 분명하다. 이 책의 소주제인 설명하기와 묘사하기의 형식처럼 작가는 이 책의 중심 배경인 계동의 모습과 인물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 온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실제 이 글을 읽는 동안 창작을 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구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절묘하게 버무려 내는 작가의 글에 감탄하고 또 공감한다.

 

라이팅클럽과 계동 글짓기 모임, 양극단의 문장이나 같은 내용이지만 질감은 다르다. 작가를 자칭하는 엄마를 둔 사생아 딸과의 이야기다. 둘은 견원지간처럼 사이가 벌어져 있지만 동일한 지점을 지향한다.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기 위한 몸부림을 토해 내기 위해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라이팅클럽과 글짓기 모임이다. 그래서 책은, 두 여자의 글쓰기를 추적하며 글을 잉태해 내는 과정을 뒤쫓는다. 구르고 뒹구는 삶의 파란만장한 편린들에 대해 작가는 글쓰기로 묘사하며 집중한다. 간결함 속에 강렬한 색감이 뒤섞여 튀어 나오는 느낌이다. 무덤덤해지기 쉬운 혹자의 인생을 호기심으로 뒤채는 능력이 결부되었기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강영숙의 이 글 속에는 다양한 시각들이 혼재한다. 무기력하고 나른한 인생을 살아가던 주인공 영인과 관계를 맺는 인물들의 다양성은 광각의 확장처럼 파노라마로 꿈틀댄다.  정체성의 혼란, 질풍노도의 시기와 같이 누구에게나 지나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인생의 그렇고 그럼에 대해 작가는 관조적인 언어로 대응해 준다. 음각과 양각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한 어머니는 대척점에 가 선다. 수평의 균형을 맞추듯 이야기는 내용의 독특함에 반해 안정감이 느껴진다.

 

돈키호테의 무모함이 때로는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 나가는 커다란 견인차가 되기도 한다는 과정을 용기라는 의미로 교차시키며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와 잭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의 문장들을 슬쩍 슬쩍 삽입하며 글쓰기의 고통을 노동의 직접적인 대가, 진정성에 비유한 전개는 인생을 조망하는 관점의 일치감을 형성하는 모티브가 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어제와 오늘의 생활이 달라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글은 간결하다. 영인이 엄마의 히스테리를 혐오하며 닮기를 거부하지만 어느새 닮아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오히려 능청스럽다. 결국 둘은 의도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언어와 시선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쳤던 셈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맴돌기만 하던 이야기의 끝이 하나의 합일을 이루어 내며 계동을 감싸주던 햇살처럼 공감을 이룬다.

 

공감의 언어는 글쓰기의 존재의미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에 대한 밀접한 관계다. 누구에게나 2박3일을 꼬박 지새울 사연 하나쯤은 있듯 개별적인 삶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그 속에서 스며든 사연의 흔적은 우여곡절이 만든 삶의 침전물이다. 토해내지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사연을 글은 갈무리하고 단정하게 변화시켜 준다. 강영숙의 글쓰기, 라이팅 클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농밀한 언어로 정제된 문장을 선보인다. 글을 단순히 관계를 매개하는 수단이 아닌 자신을 투영하는 하나의 성숙한 감각의 무엇으로 활용하는 길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라이팅클럽>에 모인 그들 모두는 사실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글은 그렇게 읽히고 퍼져 나가며 공감하게 되며 관계를 묶는다. 만약 글쓰기에 목말랐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책을 보시라. 울고 웃는 사이 묘사와 설명이 절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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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1-1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몰라서 망설였는데...이 책 조용히 회자되더군요~^^

穀雨(곡우) 2010-11-18 13:14   좋아요 0 | URL
여성 특유의 감각이 착 감기는 책이지요.
촉감의 시각화라고나 할까요?^^
 
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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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은 옹색하고 투박스럽다. 또한 불편은 익숙해지면 무기력해진다. 우리 사회에서 불편의 자리는 지천으로 널렸다. 그런데도 불편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매우 상대적이다. 불편에 대한 시선이 불협화음을 퍼트리는 불잉걸처럼 홧홧한 뜨거움이기도 하지만 무섭도록 시리고 차갑기도 하다. 이러한 불편의 이중성은 사회문화적 현상과 밀접하다. 불편을 조장하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내밀한 속내는 권위, 계급, 신분, 지배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부속물과 같다. 불편이 곧 차이라는 등가공식이 성립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괴리감을 발견하곤 한다. 관계로부터 오는 차이의 존재적 필연성을 의식하되 엄연한 경계는 구분짓겠다는 논리다. 시쳇말로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편중된 논리처럼 바꿀 수 없는 차이 또한 불편의 범주로 내몬다.

 

이러한 불편의 이중성에 대해 나는 가식과 허위가 조장한 비뚤어진 관계망이라고 본다.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의 근원적인 차이를 고려할 때 불편의 개념은  지배와 피지배, 즉 종속관계에서 기인한다. 이 책 <불편해도 괜찮아>의 김두식 교수의 생각의 거름망도 엇비슷하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뭔가 다른 요소들이 개입되면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용수철처럼 불편의 완고함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실제 우리 사회의 곳곳에 스민 갈등과 알력의 문제 또한 불편을 예고하는 전주에 다름 아니다. 김두식 교수가 불편의 패러다임을 비추는 도구로 우리 사회를 가장 밀접하게 투영하는 영화를 소재로 다루며 이 책을 이끌어 가는 방법도 실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익숙해져 묻혀 버린 색다른 시선의 세상을 탐색하고 활로를 찾아 드려다 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기까지 하다.

 

기실 이 책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영화에 대한 일차적인 정보는 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다 보면 제작자의 방향성과 배급자의 실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병합되어 왜곡되는 정보를 재상산해 내게 된다. 영화를 고르고 선택하는 권리는 소비자에게 있지만 여론의 조장, 정보의 독점성, 제작자의 상업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상당한 정보의 어그러짐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의 기본 얼개가 된 영화를 통한 인권의 실상을 드려다 보는 도구로서의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위 검열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다. 단지 김두식 교수가 통념의 잣대를 버리고 색다른 시각의 틀을 부여하는 시도와 노력이 읽는 이에게 더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김두식 교수가 이 책을 통해 공감대를 발화시키는 힘의 원천은 말로 꺼내기에는 불편하고 오염될 것 같은 미적거림의 경계에서 오는 과감한 용기와 도전이 아닐까 한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헤아리고 우리 사회에 소외된 삶을 보듬는 사회 통합적인 의식의 무장은 때론 좌파나 이념의 희생양으로 지목될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집단의식에 의해 쉽게 고무되고 휩쓸리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한 심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두식 교수가 이 책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금세 이해된다. 영화 "밀양"은 기독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포장하고 왜곡하는 과정을 사실적인 묘사와 미장센이 돋보이는 유명짜한 영화다. 인물 한명 한명이 마치 어느 곳에서나 흔히 대할 수 있는 종교인의 행동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주인공으로 분한 전도연의 신들린 연기가 완벽하게 일치하여 짜임새있게 돌아 가는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런데도 인권의 왜곡문제는 이곳에도 예외일수는 없다. 이 영화가 광주학살사건을 소재로 영화화한 것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 책에서는 불편의 존재를 인정하는 비현실적인 시선에 머문다. 기독교의 교리와 인권을 유린당한 이해관계는 합리적인 시선을 요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되려 무리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이치와 대동소이하다는 것은 기정 화된 사실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인간적인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굴복시키는 차이를 생산해 내는 우리의 고착된 시선을 향해 이 책은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이미 타성의 틀에 구겨져 불편의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불편의 불인식 내지는 비현실성에 대해 김두식 교수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통찰한 흔적과 마주친다.

 

이렇듯 왜곡된 시선의 향방을 김두식 교수는 우리 사회의 전 방위적인 공간에서 찾았다. 그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통해 편안한 어조의 높임체로 유쾌하게 포문을 연다. 사춘기를 통과하는 아이들의 질풍노도의 시기에 대해 살가운 묘사로 점화하여 제도권 교육의 인권차별에 대한 문제를 예리한 시선의 칼날로 어둡고 음습한 문제의 치부를 곧잘 드러내 보인다.  책은 교육문제, 성소수자차별문제, 여성폭력문제, 장애인인권문제, 노동자문제, 종교와 양심의 자유문제, 검열과 표현의 자유문제, 인종차별의 문제를 대중성 짙은 영화 혹은 실험영화나 드라마를 연계해서 여태껏 인식하지 못했던 가려진 문제의 진실에 대해 인도한다. 끝으로 인권의 종착역, 제노사이드(대량학살)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룬다.

 

인권의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인식의 전환 또한 중요하겠으나 행동의 문제가 우선이다. 이성적인 사고와 길들여진 관습의 타성과의 간극이 멀고 높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양극화문제에 대해 미디어의 웅변적인 호소도 실제는 부러움이 유발하는 욕망에 뒤쳐지고 만다.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에서 인권의 문제를 해결하기란 어렵고 또 어렵다. 그러므로 인권을 대하는 상대성에 대해 태도가 변해야 한다. 기존의 문제를 푸는 해결책으로 다양하고 개성있는 목소리들을 하나의 틀에 가두어 일원화시키려는 획일성이 문제였는지 모른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인권의 보장을 위한 핵심은 자유와 책임의 조율이 관건이다.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되고 책임이 지나치면 구속이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 소개된 인권이야기는 마른 땅에 단비처럼 달게 느껴지며 부끄럽게 만든다.  김두식 교수의 인권감수성에 대한 올바른 시선이 행동의 중심을 곧추 세워 줄 다양한 채널이 될 것이기에 더 반갑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인권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는 명제를 떠올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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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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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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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2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뜻 불편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몸의 불편함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리뷰를 읽다보니 마음의 불편함이 더한 문제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구석에서 옳다는 것을 알지만,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왜면하고,
왜면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더 왜면하고.... 그런거겠지요?

지난번 타서재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봤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穀雨(곡우) 2010-10-22 17:13   좋아요 0 | URL
마음의 불편을 잊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책을 통해 보았습니다.
다름에 따른 차별을 나누는 시선의 편견이 거만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진실도 함께 보았구요. 좋은 책입니다.

2010-10-22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2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이 깊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해지면 나이를 먹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가을이라는 특정 계절의 질감에 대해, 변화에 대해 시나브로 생각의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것이 해가 바뀔수록 다르다. 그런데 요며칠 정신이 어디로 밀려 났었나보다. 지난 주말께 집안 대소사로 인해 바빴던 탓도 있었겠지만 건망증이 번졌다. 나는 아주 사소한 정경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곤 했다. 심지어 아침 출근길에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부딪히는 낯선이의 실루엣까지 저장해 놓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건만 지금은 방금 떠올리고 뱉은 생각조차 깜깜할 지경이다.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영향이겠지만 이번 일은 지독했다. 열감기를 앓은 후의 몽롱한 상태가 줄곧 이어진 느낌이랄까. 어쨋든 나는 휴대폰을 잃어 버렸다. 최신의 성능을 자랑하는 휴대폰은 아닐지라도 그 속에 담긴 많은 이들의 손전화가 한순간 증발하는 순간이었다. 며칠을 뒤지고 또 뒤졌다. 행적을 뒤 쫓아 과거로 소멸한 시간을 추적했다. 추적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고 그때마다 건망증은 기승을 부렸다. 드디어 나에게도 건망증의 시간이 보태어지는구나! 가을과 건망증이 어울릴까? 계절의 변화에 심리 상태가 기억의 전조를 잃고 방황하는 역학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학계에 보고된 내용을 뒤적여 본 적은 없건만 무관하지 않은 쪽으로 마음은 이내 기운다.  

괜시리 건망증으로 인해 짜증은 사방으로 튀었다. 옆지기는 채근하듯 말을 썪어 오지만 눈치를 보기에 급하다. 덩달아 장모님까지 온 집안을 뒤지고 또 뒤진다. 감정의 변화는 기필코 생채기하듯 공기의 흐름을 바꾼다. 냉랭하거나 혹은 무겁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어색한 상황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안다. 도망칠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이미 건망증이 유발한 소득없는 흔적찾기를 시작하였으므로 이제와서 무효로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니, 자존심이 허락치를 못한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부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그것은 자존심과 밀접하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휴대폰처럼 나는 상실의 위기에 몰린 자존심을 거머쥐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무위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눙치듯 흔적찾기를 종용하고 재촉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명백하다. 마치 머피의 법칙에라도 걸린 것처럼 허망하게 끝난다. 그날 나는 가을 양복을 갈아 입고 상의 안주머니에 넣은 뒤 나서려는 것을 옆지기의 조언으로 다른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재차  옷장으로 직행했던 모양이다. 분명 옷장 속, 옷 속까지 낱낱이 파헤쳤건만 당연 그 곳에는 없을 거라는 만용이 부린 단정은 건망증의 덫에 걸린 결과다. 

한차례의 소동 끝에 나의 부서진 자존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헛헛한 기운만이 안겨왔다. 그것도 나이를 탓해가며 객적은 실소만을 날리며. 그렇게 시작된 해프닝은 득실을 논할수는 없지만 요즘 시류의 대세인 스마트폰으로 갈아 탈까하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애꿎은 옆지기만 숨 막히게 하였으니 나름의 보상기제가 발동하여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다. 아직 젊다 생각한 나이에 밀려난 성큼 다가 선 세월의 위력에 실은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건망증으로 시작한 해프닝이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비정형한 연결고리에 나 또한 황망하지만 탐이 난다. 성능과 휴대성에 비해 고가의 비용과 유지비용이 적지않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시간 접근성과 편의성을 따진다면 만족감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자기최면식 합리화로 치닫는다. 이미 마음의 8할을 빼앗겼다. 물론 아직까지 목하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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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0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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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0-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 스마트 폰으로 바꾸신 분들 보니, 멋지더라구요.
작은 노트북 같은 느낌으로 스케줄 관리며 인터넷 검색이며.
저야... 전자기기 썩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버팁니다만. 아하하.

저도 참 사소한 기억 좋고, 생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이 좋았기에
남들의 건망증 이해 못 했는데...... 스트레스에 받치는 만큼 점점 단기 기억 상실증이 찾아오더군요. ㅎㅎ
이제는, 아 맨날 까먹고 민폐끼쳤던 모모양이 고의로 그런건 아닌갑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穀雨(곡우) 2010-10-21 11:09   좋아요 0 | URL
지나고 보니 건망증이 심한 사람들의 심정을 알겠더군요.
사람은 그 입장이 되지 않고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나 봅니다.^^

2010-10-21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딜리버링 해피니스 - 재포스 CEO의 행복경영 노하우
토니 셰이 지음, 송연수 옮김 / 북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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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배달한다는 표제, 살갑지만 엉뚱하다. 분명 고객서비스를 최상의 질 좋은 품질로 보답하겠다는 취지인 것은 알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물커덩 거리는 이물감은 불편하다. 경쟁사회에서 고객 붙잡기는 다름 아닌 생존의 치열한 전장에 비유되곤 한다. 생존하느냐 아니면 도태 당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고객의 마음을 얻는 것은 회사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바로 고객서비스라는 의미다. 그래서 요즘은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친밀하고 거부감 없는 감성에 호소하는 트렌드로 바뀐 지 오래다. 그것에 핵심가치는 기업의 신인도 제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고객의 믿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어렵다. 각양각색의 까다로운 고객에서부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얄미운 고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을 상대로 신뢰의 연결고리를 이어간다는 것은 척박한 토양에 씨를 뿌려 결실을 기다리는 것처럼 지치는 일이다. 그러하기에 말만 번지르르한 온갖 미사어구를 갖다 붙인 넘쳐 나는 광고에 별 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 것도 이미 체념된 학습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서비스를 좌지우지하는 고객의 마음 얻기란 어떻게 근접하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행복을 배달하겠다는 야무진 모토로 세상을 상대하는 이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 것일까?

 

나는 이 책 <딜리버링 해피니스>에서 그 해답을 엿보았다. 이 책의 저자 토니 세이는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뼈대를 제대로 짚어 냈다. 그가 '재포스'라는 인터넷 신발판매점을 운영하는 CEO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알아챘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기존의 성공신화를 답습하고 일정한 테두리를 따라 가기는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는 그가 깨우친 값비싼 경험의 소회라는 사실이다. 그가 오늘날 재포스를 뛰어난 역량으로 무장하고 엄청난 성공신화를 연이어 달성하고 기록을 갈아 치우는 아우라를 발하는 중심에 선 것도 그의 진정함이 낳은 결과물이다.

 

그의 신념은 매우 명쾌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와우'하게 만들기란다. '와우'하기란 고객의 요구에 먼저 부응하는 한 발짝 앞선 서비스를 말한다.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기 위해서는 상황을 꿰뚫어 보는 유연한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 토니 세이는 이러한 직원과의 상호관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밑거름으로 자율과 창조를 생명으로 여긴다. 자율을 근간으로 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조직관계는 상하 수직적 관계를 시스템을 구축하는 필수요소이기에 관계의 망을 든든하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권한과 책임이 뒤따른다. 실제 대개의 조직문화는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성향에 구속당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기업의 존망과 성쇠가 달린 핵심적인 문제로 영업환경이나 기타 외부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진실은 기업의 내부적 환경이 크게 좌지우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토니 세이는 기존의 기업이 가지는 보수적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를 선도하는 것에 집중했음을 그는 말한다.

 

기업문화, 먹고 살기 위한 문제를 떠나 현대인에게 일의 가치를 일깨우는 근본적인 문제다. 현재의 사회문화 속에서 기업이 담당하는 역할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고 모이게 만드는 중요한 준거집단이다. 집단적 가치를 누군가의 일방적인 명령이나 권위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는 지났다. 이러한 사실은 일하기 좋은 직장에 드는 기업들의 특징들을 보면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토니 세이가 자신의 모든 정성을 기업문화가꾸기에 역량을 집중하고 그것이 외부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며 자신감 넘치고 진정성이 부여된 활기찬 기업으로 바꾼다는 이치를 깨달은 것, 이것이야말로 눈여겨 볼 가치다.  그가 젊은 나이와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특별한 사례라는 것을 별론 으로 하더라도 삶의 대항해를 위한 위대한 항해술을  인간관계로부터 찾았다.

 

따라서 행복을 배달한다는 명제는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전달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고객의 기쁨을 위한 일련의 일들이 결국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일이 되고 행복을 위한 일은 소명의식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물신주의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의 시작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에 주목한다면 진실한 마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신비한 힘을 지닌 에너지의 총체인지 모른다. 나는 토니 세이의 활달하고 열려 있는 긍정의 사고에 고무되었다. 그와 대면한 적은 없지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금세 긍정에너지에 흡수당하고 삶이 새롭게 보일 것처럼 그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매너리즘에 빠진 당신, 이 책을 보라. 세상이 열리고 새로움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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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3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3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0-10-13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전 님의 리뷰에 '와우'하게 되는걸요~
이 책 여기저기서 봤었는데,행복을 사물화 한 것이 맘에 안 들었었거든요.
리뷰를 보니,사물화라기 보다는 객관화라고 봐야 겠는걸요~^^

穀雨(곡우) 2010-10-14 09:00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에 대한 빈틈을 메워 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물질지상주의가 아닌 삶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게 포장이 되었건 형식에 치우친 내용일지라도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더불어 말이지요.^^
 

 
<불멸의 이순신>으로 유명한 김탁환 작가는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원고지 30페이지 분량의 글을 반드시 쓴다고 한다. 기계적인 습관에 자신을 얽매여 놓고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 긴장감은 위태롭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의 가벼움처럼 자신과의 약속은 유혹에 무방비다. 나는 글을 쓰는 직업이 아님에도 쓰는 것에 집착한다. 글을 쓴다는 행위, 어렵다. 빛보다 빠른 뭉쳐지지 않은 생각의 알갱이를 재빨리 낚아 채어 조합하고 끄적인다는 것은 난해하다. 물론 가십거리에 불과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없이 펼쳐 놓는 일이야 어렵겠냐만은 그것도 때로는 꽉 막혀 정체된 도로마냥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자꾸 지우고 쓰다보면 민망함도 잊고 계속 써 댄다는 사실이다. 생업이 따로 있는 관계로 시간을 내어 쓴다는 게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나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 버린 식사 시간을 주로 이용한다. 식사를 같이 해결하는 동료들과 지겹도록 닳아 반들반들해진 레파토리를 요깃거리 삼아 한 나절이 흘렀음에 공유하는 위안의 기쁨보다 이렇게 글을 남길 때, 평정을 찾는다. 짧은 시간을 이용해 집중적으로 써 대는 글, 거칠고 보잘것 없다. 다듬어지지 못한 원재료를 반가공한 상태, 상품으로서의 가치없는 글이 태반이다. 그렇지만 나는 글을 쓰는 것에 스스로 삶의 위안을 얻는다. 행복하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행복할까와 행복하겠지를 오고가지만 쓴다는 배출의 행위, 들어 오고 나가는 행위가 명징한 의미다.  

 

 폴 오스터는 미친듯이 쓰라고 했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두 발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지만, 아직은 달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p.48) 
 

조지 오웰 또한 이 책을 통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아직 읽지 못한 신간이므로 개략적인 내용만 언급하기로 하고 알라딘에 소개된 책소개로 대신한다. 오웰은 과연 왜 썼을까? 그는 표제작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고 명확한 작가적 입장을 밝힌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 바로 『동물농장』이었다고 고백한다.(책소개중에서) 

두 명의 작가의 공통점은 목적의식이 반듯하다는 사실이다. 쓰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길이 나뉘고 없어지기를 온 몸으로 체득했고 뒹굴었다는 말이다. 결국 글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소망의 바람이다. 글에 담긴 생각이나 감성은 글을 쓰는 자신보다 훨씬 더 장대한 생명력을 가진다. 사장되고 묻히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쓰는 행위, 즉 기록은 전염이 강하다. 쓰는 자의 쾌락은 공감이 아니겠는가.  

 알고 보면 요즘은 말보다 글이 더 필요한 시절이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말보다 글이 더 빠르고 광범위하다. 사적인 문자메세지에서부터 기획안에 이르기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글쓰기에 매진하는지 모른다. 글이 반드시 메세지를 담거나 통찰을 필요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글은 매우 다양하게 흘러 넘친다.  미래상상연구소 대표 홍사종의 이 책에도 현재의 글쓰기가 지니는 역량과 이야기의 힘을 흥미롭게 다룬다. 트위터를 넘나드는 실시간 글쓰기는 다채로운 문화를 확산하는 전령의 현대적 출발선이다. 트렌드를 만들고 그 중심에 글쓰기, 즉 이야기가 있다는 감성코드에 글쓰기의 본령과 마주하게 된다. 
 

생각을 갈무리하고 감각을 익히고 정경의 찰나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수단은 쓰기 외에는 달리 없다. 말하는 것은 휘발성이 강해 소멸되기 쉬우나 글은 롱런한다. 나는 부러 고통을 찾는 메조키스트인지 모른다. 쓰는 것에 로망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p.s) 오늘자 AP통신에 의하면 고은 선생님이 유력한 노벨상 후보라고 한다. 몇 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금번에는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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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0-0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상 시즌만 되면 두문불출 칩거하시는 고은님도 못할 노릇이지 싶습니다.

穀雨(곡우) 2010-10-07 17:01   좋아요 0 | URL
고은님이 되실거예요...^^

마녀고양이 2010-10-0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 님의 글 매력에 요즘 흠뻑 빠진 마녀고양이입니다. ㅎㅎ

저두 알라딘 서재하면서, 글쓰기를 첨 해봤는데.... 참 좋은 일인거 같아요. 어차피 저는 글 쓰는 감성이나 직관도 좀 모자르고, 표현력이나 어휘도 좀 약하고, 되씹는 느낌도 모자르지만... 글을 주업으로 하는 것도 아닌만큼 그 장점에 감사하는 중 입니다. 글쓰기는 머랄까, 저를 차분하게 만드는거 같아요. 빠르게 달리는 것을 한번씩 멈추고 숨을 쉬게 하고 여유를 찾게 만든다고 할까.

부가적으로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는 점과, 경청할 줄 모르는 제게 경청의 여유를 가르쳐주는 점도 좋아요. ^^

앞으로도 서재 종종 보러와서, 귀찮게 굴겠습니다. 아하하.

穀雨(곡우) 2010-10-08 11:19   좋아요 0 | URL
숨고르기의 여유, 좋은 말씀이네요...^^

stella.K 2010-10-07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습작으로 소설을 쓰는데 꼭 마지막 3분의 1을 남겨놓고 더 이상 쓰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지요.
저 폴 오스터 말대로 그냥 아무데서나부터 미친 듯이 쓰면 될까요?ㅜ

穀雨(곡우) 2010-10-08 11:21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의 습작소설이 궁금한데요. 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많지만
플롯을 잡고 시놉시스를 만드는 과정, 재주도 없거니와 꿈같은 일입니다.
그래도 미친 듯이 쓰다보면 실타레 풀리듯 이어가지 않을까요?

감은빛 2010-10-0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글을 쓰는 걸까요?
뭔가를 끄적이는 습관은 어릴때부터 있었는데,
그 시작은 아무래도 만화나 동화따위를 읽은 뒤, 따라하기였던 것 같아요.
머리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담아놓는 것.

참 이상한 게, 평소에는 글을 쓸 짬이 안나서 쓰고 싶은 주제가 있어도 못 쓰는데,
막상 좀 여유가 생겨서 써보려고 하면 이게 또 갑자기 글이 안써진단 말이죠.

그나저나 매일 원고지 30페이지면 참 대단하네요.
어느 글쓰기 모임에선 아침 글쓰기를 과제로 내주더군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짬을 내서 글을 쓰는 겁니다.
출근시간에 쫓기는 바쁜 시간이니까 분량에 상관없이 무얼 끄적이던,
일단 끄적이고 보라는 얘길 하더라구요.
저도 한번 해볼까 생각했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穀雨(곡우) 2010-10-08 17:12   좋아요 0 | URL
쓴다는 행위의 계기가 전 피동적이고 강제적인 영향력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제도교육과 문화적 토양이 우열을 가리는 잣대로만 인식하는 세대를
통과하여서인지 쓴다는 주체의 자의적 의사가 탈락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 서열화와는 무관한 글쓰기가 되어야 진정한 자신의
생각을 담는 글이 됨을 알지만 쉽사리 그 포위망을 벗어 던지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해서 매일 조금씩 생각의 초점이 멈추는 곳에서 글을 쓰려 하는 이유 또한
목적을 추동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일환이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그러다보면 글이 훨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