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해지면 나이를 먹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가을이라는 특정 계절의 질감에 대해, 변화에 대해 시나브로 생각의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것이 해가 바뀔수록 다르다. 그런데 요며칠 정신이 어디로 밀려 났었나보다. 지난 주말께 집안 대소사로 인해 바빴던 탓도 있었겠지만 건망증이 번졌다. 나는 아주 사소한 정경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곤 했다. 심지어 아침 출근길에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부딪히는 낯선이의 실루엣까지 저장해 놓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건만 지금은 방금 떠올리고 뱉은 생각조차 깜깜할 지경이다.  

세월의 흔적이 지나간 영향이겠지만 이번 일은 지독했다. 열감기를 앓은 후의 몽롱한 상태가 줄곧 이어진 느낌이랄까. 어쨋든 나는 휴대폰을 잃어 버렸다. 최신의 성능을 자랑하는 휴대폰은 아닐지라도 그 속에 담긴 많은 이들의 손전화가 한순간 증발하는 순간이었다. 며칠을 뒤지고 또 뒤졌다. 행적을 뒤 쫓아 과거로 소멸한 시간을 추적했다. 추적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고 그때마다 건망증은 기승을 부렸다. 드디어 나에게도 건망증의 시간이 보태어지는구나! 가을과 건망증이 어울릴까? 계절의 변화에 심리 상태가 기억의 전조를 잃고 방황하는 역학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학계에 보고된 내용을 뒤적여 본 적은 없건만 무관하지 않은 쪽으로 마음은 이내 기운다.  

괜시리 건망증으로 인해 짜증은 사방으로 튀었다. 옆지기는 채근하듯 말을 썪어 오지만 눈치를 보기에 급하다. 덩달아 장모님까지 온 집안을 뒤지고 또 뒤진다. 감정의 변화는 기필코 생채기하듯 공기의 흐름을 바꾼다. 냉랭하거나 혹은 무겁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어색한 상황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안다. 도망칠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이미 건망증이 유발한 소득없는 흔적찾기를 시작하였으므로 이제와서 무효로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니, 자존심이 허락치를 못한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부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 그것은 자존심과 밀접하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휴대폰처럼 나는 상실의 위기에 몰린 자존심을 거머쥐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무위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눙치듯 흔적찾기를 종용하고 재촉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명백하다. 마치 머피의 법칙에라도 걸린 것처럼 허망하게 끝난다. 그날 나는 가을 양복을 갈아 입고 상의 안주머니에 넣은 뒤 나서려는 것을 옆지기의 조언으로 다른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재차  옷장으로 직행했던 모양이다. 분명 옷장 속, 옷 속까지 낱낱이 파헤쳤건만 당연 그 곳에는 없을 거라는 만용이 부린 단정은 건망증의 덫에 걸린 결과다. 

한차례의 소동 끝에 나의 부서진 자존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헛헛한 기운만이 안겨왔다. 그것도 나이를 탓해가며 객적은 실소만을 날리며. 그렇게 시작된 해프닝은 득실을 논할수는 없지만 요즘 시류의 대세인 스마트폰으로 갈아 탈까하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애꿎은 옆지기만 숨 막히게 하였으니 나름의 보상기제가 발동하여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다. 아직 젊다 생각한 나이에 밀려난 성큼 다가 선 세월의 위력에 실은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건망증으로 시작한 해프닝이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비정형한 연결고리에 나 또한 황망하지만 탐이 난다. 성능과 휴대성에 비해 고가의 비용과 유지비용이 적지않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시간 접근성과 편의성을 따진다면 만족감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자기최면식 합리화로 치닫는다. 이미 마음의 8할을 빼앗겼다. 물론 아직까지 목하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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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0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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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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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 스마트 폰으로 바꾸신 분들 보니, 멋지더라구요.
작은 노트북 같은 느낌으로 스케줄 관리며 인터넷 검색이며.
저야... 전자기기 썩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버팁니다만. 아하하.

저도 참 사소한 기억 좋고, 생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이 좋았기에
남들의 건망증 이해 못 했는데...... 스트레스에 받치는 만큼 점점 단기 기억 상실증이 찾아오더군요. ㅎㅎ
이제는, 아 맨날 까먹고 민폐끼쳤던 모모양이 고의로 그런건 아닌갑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穀雨(곡우) 2010-10-21 11:09   좋아요 0 | URL
지나고 보니 건망증이 심한 사람들의 심정을 알겠더군요.
사람은 그 입장이 되지 않고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나 봅니다.^^

2010-10-21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1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딜리버링 해피니스 - 재포스 CEO의 행복경영 노하우
토니 셰이 지음, 송연수 옮김 / 북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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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배달한다는 표제, 살갑지만 엉뚱하다. 분명 고객서비스를 최상의 질 좋은 품질로 보답하겠다는 취지인 것은 알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물커덩 거리는 이물감은 불편하다. 경쟁사회에서 고객 붙잡기는 다름 아닌 생존의 치열한 전장에 비유되곤 한다. 생존하느냐 아니면 도태 당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고객의 마음을 얻는 것은 회사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바로 고객서비스라는 의미다. 그래서 요즘은 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친밀하고 거부감 없는 감성에 호소하는 트렌드로 바뀐 지 오래다. 그것에 핵심가치는 기업의 신인도 제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고객의 믿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어렵다. 각양각색의 까다로운 고객에서부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얄미운 고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을 상대로 신뢰의 연결고리를 이어간다는 것은 척박한 토양에 씨를 뿌려 결실을 기다리는 것처럼 지치는 일이다. 그러하기에 말만 번지르르한 온갖 미사어구를 갖다 붙인 넘쳐 나는 광고에 별 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 것도 이미 체념된 학습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서비스를 좌지우지하는 고객의 마음 얻기란 어떻게 근접하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행복을 배달하겠다는 야무진 모토로 세상을 상대하는 이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 것일까?

 

나는 이 책 <딜리버링 해피니스>에서 그 해답을 엿보았다. 이 책의 저자 토니 세이는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뼈대를 제대로 짚어 냈다. 그가 '재포스'라는 인터넷 신발판매점을 운영하는 CEO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알아챘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기존의 성공신화를 답습하고 일정한 테두리를 따라 가기는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는 그가 깨우친 값비싼 경험의 소회라는 사실이다. 그가 오늘날 재포스를 뛰어난 역량으로 무장하고 엄청난 성공신화를 연이어 달성하고 기록을 갈아 치우는 아우라를 발하는 중심에 선 것도 그의 진정함이 낳은 결과물이다.

 

그의 신념은 매우 명쾌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와우'하게 만들기란다. '와우'하기란 고객의 요구에 먼저 부응하는 한 발짝 앞선 서비스를 말한다.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기 위해서는 상황을 꿰뚫어 보는 유연한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 토니 세이는 이러한 직원과의 상호관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밑거름으로 자율과 창조를 생명으로 여긴다. 자율을 근간으로 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조직관계는 상하 수직적 관계를 시스템을 구축하는 필수요소이기에 관계의 망을 든든하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권한과 책임이 뒤따른다. 실제 대개의 조직문화는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성향에 구속당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기업의 존망과 성쇠가 달린 핵심적인 문제로 영업환경이나 기타 외부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진실은 기업의 내부적 환경이 크게 좌지우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토니 세이는 기존의 기업이 가지는 보수적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를 선도하는 것에 집중했음을 그는 말한다.

 

기업문화, 먹고 살기 위한 문제를 떠나 현대인에게 일의 가치를 일깨우는 근본적인 문제다. 현재의 사회문화 속에서 기업이 담당하는 역할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고 모이게 만드는 중요한 준거집단이다. 집단적 가치를 누군가의 일방적인 명령이나 권위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는 지났다. 이러한 사실은 일하기 좋은 직장에 드는 기업들의 특징들을 보면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토니 세이가 자신의 모든 정성을 기업문화가꾸기에 역량을 집중하고 그것이 외부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며 자신감 넘치고 진정성이 부여된 활기찬 기업으로 바꾼다는 이치를 깨달은 것, 이것이야말로 눈여겨 볼 가치다.  그가 젊은 나이와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특별한 사례라는 것을 별론 으로 하더라도 삶의 대항해를 위한 위대한 항해술을  인간관계로부터 찾았다.

 

따라서 행복을 배달한다는 명제는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전달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고객의 기쁨을 위한 일련의 일들이 결국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일이 되고 행복을 위한 일은 소명의식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물신주의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의 시작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에 주목한다면 진실한 마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신비한 힘을 지닌 에너지의 총체인지 모른다. 나는 토니 세이의 활달하고 열려 있는 긍정의 사고에 고무되었다. 그와 대면한 적은 없지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금세 긍정에너지에 흡수당하고 삶이 새롭게 보일 것처럼 그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매너리즘에 빠진 당신, 이 책을 보라. 세상이 열리고 새로움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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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3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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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3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0-10-13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전 님의 리뷰에 '와우'하게 되는걸요~
이 책 여기저기서 봤었는데,행복을 사물화 한 것이 맘에 안 들었었거든요.
리뷰를 보니,사물화라기 보다는 객관화라고 봐야 겠는걸요~^^

穀雨(곡우) 2010-10-14 09:00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에 대한 빈틈을 메워 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물질지상주의가 아닌 삶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게 포장이 되었건 형식에 치우친 내용일지라도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더불어 말이지요.^^
 

 
<불멸의 이순신>으로 유명한 김탁환 작가는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원고지 30페이지 분량의 글을 반드시 쓴다고 한다. 기계적인 습관에 자신을 얽매여 놓고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 긴장감은 위태롭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의 가벼움처럼 자신과의 약속은 유혹에 무방비다. 나는 글을 쓰는 직업이 아님에도 쓰는 것에 집착한다. 글을 쓴다는 행위, 어렵다. 빛보다 빠른 뭉쳐지지 않은 생각의 알갱이를 재빨리 낚아 채어 조합하고 끄적인다는 것은 난해하다. 물론 가십거리에 불과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없이 펼쳐 놓는 일이야 어렵겠냐만은 그것도 때로는 꽉 막혀 정체된 도로마냥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자꾸 지우고 쓰다보면 민망함도 잊고 계속 써 댄다는 사실이다. 생업이 따로 있는 관계로 시간을 내어 쓴다는 게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나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 버린 식사 시간을 주로 이용한다. 식사를 같이 해결하는 동료들과 지겹도록 닳아 반들반들해진 레파토리를 요깃거리 삼아 한 나절이 흘렀음에 공유하는 위안의 기쁨보다 이렇게 글을 남길 때, 평정을 찾는다. 짧은 시간을 이용해 집중적으로 써 대는 글, 거칠고 보잘것 없다. 다듬어지지 못한 원재료를 반가공한 상태, 상품으로서의 가치없는 글이 태반이다. 그렇지만 나는 글을 쓰는 것에 스스로 삶의 위안을 얻는다. 행복하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행복할까와 행복하겠지를 오고가지만 쓴다는 배출의 행위, 들어 오고 나가는 행위가 명징한 의미다.  

 

 폴 오스터는 미친듯이 쓰라고 했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두 발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지만, 아직은 달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p.48) 
 

조지 오웰 또한 이 책을 통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아직 읽지 못한 신간이므로 개략적인 내용만 언급하기로 하고 알라딘에 소개된 책소개로 대신한다. 오웰은 과연 왜 썼을까? 그는 표제작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고 명확한 작가적 입장을 밝힌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 바로 『동물농장』이었다고 고백한다.(책소개중에서) 

두 명의 작가의 공통점은 목적의식이 반듯하다는 사실이다. 쓰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길이 나뉘고 없어지기를 온 몸으로 체득했고 뒹굴었다는 말이다. 결국 글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소망의 바람이다. 글에 담긴 생각이나 감성은 글을 쓰는 자신보다 훨씬 더 장대한 생명력을 가진다. 사장되고 묻히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쓰는 행위, 즉 기록은 전염이 강하다. 쓰는 자의 쾌락은 공감이 아니겠는가.  

 알고 보면 요즘은 말보다 글이 더 필요한 시절이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말보다 글이 더 빠르고 광범위하다. 사적인 문자메세지에서부터 기획안에 이르기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글쓰기에 매진하는지 모른다. 글이 반드시 메세지를 담거나 통찰을 필요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글은 매우 다양하게 흘러 넘친다.  미래상상연구소 대표 홍사종의 이 책에도 현재의 글쓰기가 지니는 역량과 이야기의 힘을 흥미롭게 다룬다. 트위터를 넘나드는 실시간 글쓰기는 다채로운 문화를 확산하는 전령의 현대적 출발선이다. 트렌드를 만들고 그 중심에 글쓰기, 즉 이야기가 있다는 감성코드에 글쓰기의 본령과 마주하게 된다. 
 

생각을 갈무리하고 감각을 익히고 정경의 찰나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수단은 쓰기 외에는 달리 없다. 말하는 것은 휘발성이 강해 소멸되기 쉬우나 글은 롱런한다. 나는 부러 고통을 찾는 메조키스트인지 모른다. 쓰는 것에 로망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p.s) 오늘자 AP통신에 의하면 고은 선생님이 유력한 노벨상 후보라고 한다. 몇 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금번에는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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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0-0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상 시즌만 되면 두문불출 칩거하시는 고은님도 못할 노릇이지 싶습니다.

穀雨(곡우) 2010-10-07 17:01   좋아요 0 | URL
고은님이 되실거예요...^^

마녀고양이 2010-10-0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우 님의 글 매력에 요즘 흠뻑 빠진 마녀고양이입니다. ㅎㅎ

저두 알라딘 서재하면서, 글쓰기를 첨 해봤는데.... 참 좋은 일인거 같아요. 어차피 저는 글 쓰는 감성이나 직관도 좀 모자르고, 표현력이나 어휘도 좀 약하고, 되씹는 느낌도 모자르지만... 글을 주업으로 하는 것도 아닌만큼 그 장점에 감사하는 중 입니다. 글쓰기는 머랄까, 저를 차분하게 만드는거 같아요. 빠르게 달리는 것을 한번씩 멈추고 숨을 쉬게 하고 여유를 찾게 만든다고 할까.

부가적으로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는 점과, 경청할 줄 모르는 제게 경청의 여유를 가르쳐주는 점도 좋아요. ^^

앞으로도 서재 종종 보러와서, 귀찮게 굴겠습니다. 아하하.

穀雨(곡우) 2010-10-08 11:19   좋아요 0 | URL
숨고르기의 여유, 좋은 말씀이네요...^^

stella.K 2010-10-07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습작으로 소설을 쓰는데 꼭 마지막 3분의 1을 남겨놓고 더 이상 쓰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지요.
저 폴 오스터 말대로 그냥 아무데서나부터 미친 듯이 쓰면 될까요?ㅜ

穀雨(곡우) 2010-10-08 11:21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의 습작소설이 궁금한데요. 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많지만
플롯을 잡고 시놉시스를 만드는 과정, 재주도 없거니와 꿈같은 일입니다.
그래도 미친 듯이 쓰다보면 실타레 풀리듯 이어가지 않을까요?

감은빛 2010-10-0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글을 쓰는 걸까요?
뭔가를 끄적이는 습관은 어릴때부터 있었는데,
그 시작은 아무래도 만화나 동화따위를 읽은 뒤, 따라하기였던 것 같아요.
머리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담아놓는 것.

참 이상한 게, 평소에는 글을 쓸 짬이 안나서 쓰고 싶은 주제가 있어도 못 쓰는데,
막상 좀 여유가 생겨서 써보려고 하면 이게 또 갑자기 글이 안써진단 말이죠.

그나저나 매일 원고지 30페이지면 참 대단하네요.
어느 글쓰기 모임에선 아침 글쓰기를 과제로 내주더군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짬을 내서 글을 쓰는 겁니다.
출근시간에 쫓기는 바쁜 시간이니까 분량에 상관없이 무얼 끄적이던,
일단 끄적이고 보라는 얘길 하더라구요.
저도 한번 해볼까 생각했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穀雨(곡우) 2010-10-08 17:12   좋아요 0 | URL
쓴다는 행위의 계기가 전 피동적이고 강제적인 영향력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제도교육과 문화적 토양이 우열을 가리는 잣대로만 인식하는 세대를
통과하여서인지 쓴다는 주체의 자의적 의사가 탈락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 서열화와는 무관한 글쓰기가 되어야 진정한 자신의
생각을 담는 글이 됨을 알지만 쉽사리 그 포위망을 벗어 던지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해서 매일 조금씩 생각의 초점이 멈추는 곳에서 글을 쓰려 하는 이유 또한
목적을 추동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일환이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그러다보면 글이 훨훨....^^
 

의사표시는 자신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해서 확정한 관념의 표시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택에 대해 혼동하는 경우가 잦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착오에 기인하여 동기의 본질까지 오인하는 혼동으로 이어지며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러한 착오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지만 특정화된 부류의 대상으로 한정하여 문제의 소지를 살펴보면 착오라기보다는 미필적 고의에 가까우며 사정은 더 심각해진다. 나는 이렇게 특정화되고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 목적의식이 상호간에 구속과 책임의 명분이 되므로 경우에 따라 반대급부가 명확하게 공존하는 실리의 관계다. 그러다보니 법률적 해석에 의한 실체적 관계를 감정적 판단보다 훨씬 더 신뢰하게 된다.

 

법률은 사회통념상의 개념적 범주에 속한다. 흔히 관습으로 익히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규정된 법률의 테두리는 최소한의 장치에 머문다. 하지만 법에 대한 인식과 구속력은 상당부분 태생의 이념을 무력화하고 절반으로 쪼개어 버린다. 주먹보다 법이 가깝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자력구제의 해결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에 대한 인식의 가벼움 내지는 무지함에 어의상실이 되곤 한다.

 

법에는 정의와 자유, 책임, 공정, 평등, 행복, 권리의 다개념적인 가치들이 결합되어 기본적 인권을 내포하고 보장한다. 이는 헌법이 추구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개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보호하는 근간이다. 여기에 파생되는 법이념이나 철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와 사상이 어우러져 생성된 것임은 역사가 명확하게 증명해 준다. 이와 더불어 사적자치를 기반으로 거래 상대방과의 이익을 조율하고 충돌을 예방해주는 것도 또한 중요한 이념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경제사회에서 책임과 도의의 충돌문제는 법률이 보장하는 잣대의 양극단에 선 내면적 가치문제이다. 대개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고 갚는 것은 채무에 따른 책임의 문제다. 책임은 경제적 자유를 누린 대가에 상응하는 반대급부이기도 하다. 간단명료한 문제이지만 실제 경제사회에서는 상황은 달라진다. 금융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는 화려한 광고선전에 감춰진 양면의 칼날은 위험하다. 책임에 대한 본질을 희석시키고 타자에게 전가하며 사회적 방임의 현장을 부추긴다. 결국 나약함에 빠진 개인은 헤어날 수 없는 부채의 늪에서 허우적댄다는 사실이다.

 

번만큼 쓰고 선택 가능한 범위내에서 운용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환경에만 노출될 수는 없다. 합리적이지 못한 충동적 본능, 감성적인 판단, 우연한 기회에 발생하는 위험 등 산재된 문제는 취약한 위험에 놓인다. 그러므로 위험을 통제하는 것은 의지이며, 의지는 결국 책임의 문제로 귀결된다. 기실 책임의 문제는 사회적 가치를 떠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개인의 도의적 책임을 묻기 이전에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공정한 토양이 우선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지극히 가변적인 영향력의 범주에 있다고 본다. 영향을 받는 구체적인 집단의 가치는 자극을 주는 매개체의 힘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가치이념적 개념을 차치하고라도 누구나 인식하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과 맥락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내가 장황하게 법의 이념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지 않다. 바로 책임과 도의의 문제다. 나는 책임의 문제가 불거지는 핵심은 통제가능한가라는 의지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여기서 통제는 욕망이나 소유의 개념에 근접한다. 그러므로 통제의 범주를 벗어난 외부적 영향은 사회적 책임의 범주로 편입된다. 사회적 책임에 속하는 예는 실정법상 통합도산법에 따른 회생, 워크아웃정도가 될 것 같다.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는 책임의 분산 또는 감면은 개인이나 기업을 회생시키고 사회적 문제를 보다 긍정적으로 유도하며 발전가능하게 치유하는 공적부조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의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도의적 책임은 이행하기로 약속한 응당의 행위를 불가피하든 의도적이든 지연시킨 개별사정을 통칭한다. 나는 앞서의 책임의 문제보다 도의적 책임(모럴 해저드)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도의적 책임에 대한 판단항목을 삽입시키고 고려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소리, 개인의 가치영역이다. 외양과 내양이 다른 표리부동한 모습은 사회적 관계를 부정적으로 물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연대화된 부정의 동의 내지는 침묵, 이러한 문제는 며칠 전 노파와 어린 여학생의 지하철폭력 동영상이 적확하게 대변해주고 표현해 준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특정화된 사람- 돈을 갚지 않고도 당당한 사람 - 을 상대한다. 상대는 대개 거침없다. 지금의 사정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중요치 않으며 단지 다중채무자로 만든 사회로 공격의 대상을 돌린다. 나는 듣고 또 듣는다. 그들의 그칠줄 모르는 그네들의 곯아 터진 사연부터 모든 것을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듣는다. 그들에게 나는 배설을 위한 도구인지 모른다. 나는 그들의 무모한 당당함에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안타까움이 앞선다. 물론 사회적 책임의 범주에 속하는 다수가 더 많다. 책임을 이행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은 다양하게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의 발목잡힘에서 어떤 식으로든 탈피하면 훨씬 사악해진다. 다시는 그 지긋지긋한 채무의 전철을 올라타지 말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음에도 이번에는 더 빠르고 위험천만한 급행열차를 탄다. 채무는 그렇게 퍼지고 추락한다.

어쩌면 굴레는 벗어날수록 빠져드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의적 책임은 곧 정의의 문제와 직결된다. 정의는 공정한 룰이 보이지 않음에도 오롯이 작동하는 건강한 사회의 단면에 다르지 않다. 나는 때론 그들에게서 정의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불온하고 비열한 사회의 망령에 사로잡히며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음에 우울해진다. 나는 얼마나 공정한가의 주어진 원죄처럼 말이다. 나아가 탐욕은 길들이지 못하는 치명적인 욕망에 대해 강한 의문이 든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은 낭떨어지 위를 외줄타기하며 그 순간 입속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꿀 한 방울과 같지 않을까? 달콤함에 담보된 욕망,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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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0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며, 저는 엉뚱하게
곡우님이 무슨 일을 하실까에 대해서 열심히 추측하는 중입니다.

금융권의 채무 불이행이나 변제를 위한 팀일까? 아니면 복지 기관의 상담사? 또는 검사? 변호사?
글 분위기로 볼 때 아마 경찰은 아닐거야........ 이런 생각들.

의지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거죠. 그런데 현대 사회는
욕망을 너무 미화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탐미적인 영화, 광고, 문학, 미술...
남탓 하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사람의 처지 때문이 아니라 거미줄에 허우적대는 내면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전.

穀雨(곡우) 2010-10-07 11:00   좋아요 0 | URL
아...제 글이 좀 무거웠죠...^^
전 금융권에서 일합니다. 법무팀이라고는 하지만 기실 채권관리팀이 더 어울립니다.
제게 낯익은 풍경은 재판정에서 펼쳐지는 모습들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계형보다 쾌락형이 더 많은 현실입니다.
어젠 욱하게 하는 어떤 분 덕에 장황설을 뱉어 냈습니다.
다시 봐도 거칠기 짝이 없는 글입니다. 내릴까 심각하게 고민중....^^

마녀고양이 2010-10-07 11:39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었는데요.
아마 열받는 사람들, 한심한 사람들 많이 만나실거 같습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으실듯 합니다.

그리고, 댓글을 달았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맘에 걸리시면, 글 내리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가끔 그런 글 있습니다. ㅎㅎ

穀雨(곡우) 2010-10-07 12:08   좋아요 0 | URL
스트레스야 어디든 없을 수 있을까요...?
근데 더 황망한 건, 내부의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겁니다.
소통이 막힌 상태, 꽉 조이는 옷을 입은 것처럼 참
불편합니다.
 

햇살이 가깝다. 밀쳐 내기만 하던 온기가 이젠 정겹다. 몸이 가라앉아서일수도 있겠으나 가을 속 햇살은 까슬까슬한 맛이 난다. 하지만 치대고 부비다보면 금세 보들보들한 양모나 순면으로 짠 스웨터가 주는 밀도감과 촉감이 이내 차오른다. 몸이 으슬어슬할 때나 약간 피부의 숨결이 긴장을 머금을 때, 스웨터는 다정하게 부풀어 오른다. 나는 피부에 와 닿는 감촉, 질감을 사랑한다. 그것은 비단 스웨터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작위를 탈피한 자연적인 사물이나 대상에 관심이 크다.

 

온종일 도시의 역겨움에 들쑤시고 헝클어진 채 돌아 온 저녁 무렵, 에너지를 고갈시킨 마음을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욕조에 라벤다향이 풍부한 입욕제로 풀고 담궈 흘려 버린 후, 밟는 마루의 감촉을 또한 사랑한다. 발 끝으로 퍼지는 맨들맨들한 감각의 전률은 때론 살아있음에 대한 존재감마저 일깨운다. 또한 무료하게 나른함이 창 사이로 부유하듯 퍼지는 휴일 오후,건조한 공기의 접촉이 좋다.

 

사소한 감촉, 때론 어떤 쾌락보다 더 자극적이고 행복함에 들뜬다. 지금처럼 기가 흐트러진 상태에는 어김없이 피부로 전이되는 자극의 향연에 더 예민해진다.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의 턱밑을 하릴없이 쓰다듬어 줄 때의 감각의 상호작용처럼 보다 긴밀하고 살갑게 바뀐다. 그래서 나는 잠시의 여운이나마 경계에서 퍼져 나가는 동심원을 향한 소멸의 애잔함을 오래도록 붙잡고 싶은 마음이 된다.  

 

이런 날은 어김없이 마음은 물 위를 걷는다. 잔잔하게 닦은 수면 위를 걷는 유쾌한 상상은 감각의 파라다이스로 이끈다. 그렇게 마음을 놓이고 나면 맑은 에너지가 솟아 나는 기분이 든다. 직감처럼 감각의 모든 말초신경을 정화하고 닦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내게 사소한 감촉은 행복을 잇는 연결고리다. 스멀스멀 기어 오르는 불쾌한 감촉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유리막과 같다.

 

행복이 거창하다면 좋으련만 현재 나는 지금의 감촉으로부터의 행복이 좋다. 감촉은 사색을 낳고 자판을 톡톡 튀어 다니며 뻗어 나가는 생각의 우듬지를 거머쥐는 해갈의 기쁨 또한 상쾌하다. 이럴 때 쓰는 글은 대개 긍정적인 생각을 유추한다. 매개된 대상이 행복을 연결시키는 단초가 되었기에 인과율상 당연한지 모른다. 별 뜻 없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일상의 단면이자 편린의 조각이지만 사소함은 위대함을 품는 모태가 된다.

 

청아한 가을 날, 무얼 먹을까 잠시 고민하고 재탕에 삼탕을 더 해 이미 진득해 진 식용유로 튀겨 낸 돈까스를 먹고 인위적 포만감을 느낀 후 살갗에 닿는 따사로운 햇살과 몸집을 불린 바람의 감촉에 나는 아득한 사색에 잠시 스며든다. 여유는 언제나 예정하고 오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나는 늘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맥없이 붙잡고 허탈해 하고 기진한다. 그래도 나는 사소함으로부터의 시간이 살갑다. 삶이 답답하고 무거울 때는 가볍게 붙든 사소함의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세상은 더 말랑말랑해지고 경쾌하게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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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05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날의 아름다움이 인생은 살만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큰 봉우리를 향해 달려가도,
그 길은 작은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을테고,
언덕을 올라가는 길 쉬엄쉬엄 흐르는 개울과 빛나는 햇살이 저를 부추깁니다.

곡우님의 사소한 향연..... 마음이 즐겁습니다.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穀雨(곡우) 2010-10-05 22:14   좋아요 0 | URL
스펜서 존슨이 쓴 비즈니스우화인 <피크 앤 밸리>가 생각나는군요.
마고님이 즐거우셨다니 저도 즐겁습니다....^^

비로그인 2010-10-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아한 가을날에 재탕삼탕한 기름으로 튀겨진 돈까스를 먹고 이런 감상에 젖는 사람....
정말 드물다 못해 희귀하죠~~푸히히~

穀雨(곡우) 2010-10-05 22:14   좋아요 0 | URL
그죠. 저두 희귀종인가봐요...ㅋㅋㅋ

다크아이즈 2010-10-05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한 곡우님. 사소함의 자유가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일상은 언제나 그 자유마저 쉬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깨끗하게 치워진 마루에서 햇살 가득 받으며 글놀이할 때가 제겐 사소함의 자유랍니다. 님, 행복한 가을 맞으시길. 언제나 산뜻한 칼럼 같은 글을 올리시는 곡우님...

穀雨(곡우) 2010-10-05 22:15   좋아요 0 | URL
와우..느와르님이시네요. 계절이 연달아 바뀌는 동안 잘 지냈나요..?
습관이 무서워요. 글도 그런가 그 틀에서 벗어나질 못하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