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표시는 자신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해서 확정한 관념의 표시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택에 대해 혼동하는 경우가 잦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착오에 기인하여 동기의 본질까지 오인하는 혼동으로 이어지며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러한 착오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지만 특정화된 부류의 대상으로 한정하여 문제의 소지를 살펴보면 착오라기보다는 미필적 고의에 가까우며 사정은 더 심각해진다. 나는 이렇게 특정화되고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 목적의식이 상호간에 구속과 책임의 명분이 되므로 경우에 따라 반대급부가 명확하게 공존하는 실리의 관계다. 그러다보니 법률적 해석에 의한 실체적 관계를 감정적 판단보다 훨씬 더 신뢰하게 된다.

 

법률은 사회통념상의 개념적 범주에 속한다. 흔히 관습으로 익히고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규정된 법률의 테두리는 최소한의 장치에 머문다. 하지만 법에 대한 인식과 구속력은 상당부분 태생의 이념을 무력화하고 절반으로 쪼개어 버린다. 주먹보다 법이 가깝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자력구제의 해결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에 대한 인식의 가벼움 내지는 무지함에 어의상실이 되곤 한다.

 

법에는 정의와 자유, 책임, 공정, 평등, 행복, 권리의 다개념적인 가치들이 결합되어 기본적 인권을 내포하고 보장한다. 이는 헌법이 추구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개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보호하는 근간이다. 여기에 파생되는 법이념이나 철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와 사상이 어우러져 생성된 것임은 역사가 명확하게 증명해 준다. 이와 더불어 사적자치를 기반으로 거래 상대방과의 이익을 조율하고 충돌을 예방해주는 것도 또한 중요한 이념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경제사회에서 책임과 도의의 충돌문제는 법률이 보장하는 잣대의 양극단에 선 내면적 가치문제이다. 대개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고 갚는 것은 채무에 따른 책임의 문제다. 책임은 경제적 자유를 누린 대가에 상응하는 반대급부이기도 하다. 간단명료한 문제이지만 실제 경제사회에서는 상황은 달라진다. 금융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는 화려한 광고선전에 감춰진 양면의 칼날은 위험하다. 책임에 대한 본질을 희석시키고 타자에게 전가하며 사회적 방임의 현장을 부추긴다. 결국 나약함에 빠진 개인은 헤어날 수 없는 부채의 늪에서 허우적댄다는 사실이다.

 

번만큼 쓰고 선택 가능한 범위내에서 운용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환경에만 노출될 수는 없다. 합리적이지 못한 충동적 본능, 감성적인 판단, 우연한 기회에 발생하는 위험 등 산재된 문제는 취약한 위험에 놓인다. 그러므로 위험을 통제하는 것은 의지이며, 의지는 결국 책임의 문제로 귀결된다. 기실 책임의 문제는 사회적 가치를 떠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개인의 도의적 책임을 묻기 이전에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공정한 토양이 우선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지극히 가변적인 영향력의 범주에 있다고 본다. 영향을 받는 구체적인 집단의 가치는 자극을 주는 매개체의 힘에서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가치이념적 개념을 차치하고라도 누구나 인식하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과 맥락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내가 장황하게 법의 이념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지 않다. 바로 책임과 도의의 문제다. 나는 책임의 문제가 불거지는 핵심은 통제가능한가라는 의지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여기서 통제는 욕망이나 소유의 개념에 근접한다. 그러므로 통제의 범주를 벗어난 외부적 영향은 사회적 책임의 범주로 편입된다. 사회적 책임에 속하는 예는 실정법상 통합도산법에 따른 회생, 워크아웃정도가 될 것 같다.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는 책임의 분산 또는 감면은 개인이나 기업을 회생시키고 사회적 문제를 보다 긍정적으로 유도하며 발전가능하게 치유하는 공적부조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의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도의적 책임은 이행하기로 약속한 응당의 행위를 불가피하든 의도적이든 지연시킨 개별사정을 통칭한다. 나는 앞서의 책임의 문제보다 도의적 책임(모럴 해저드)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도의적 책임에 대한 판단항목을 삽입시키고 고려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소리, 개인의 가치영역이다. 외양과 내양이 다른 표리부동한 모습은 사회적 관계를 부정적으로 물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연대화된 부정의 동의 내지는 침묵, 이러한 문제는 며칠 전 노파와 어린 여학생의 지하철폭력 동영상이 적확하게 대변해주고 표현해 준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특정화된 사람- 돈을 갚지 않고도 당당한 사람 - 을 상대한다. 상대는 대개 거침없다. 지금의 사정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중요치 않으며 단지 다중채무자로 만든 사회로 공격의 대상을 돌린다. 나는 듣고 또 듣는다. 그들의 그칠줄 모르는 그네들의 곯아 터진 사연부터 모든 것을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듣는다. 그들에게 나는 배설을 위한 도구인지 모른다. 나는 그들의 무모한 당당함에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안타까움이 앞선다. 물론 사회적 책임의 범주에 속하는 다수가 더 많다. 책임을 이행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은 다양하게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의 발목잡힘에서 어떤 식으로든 탈피하면 훨씬 사악해진다. 다시는 그 지긋지긋한 채무의 전철을 올라타지 말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음에도 이번에는 더 빠르고 위험천만한 급행열차를 탄다. 채무는 그렇게 퍼지고 추락한다.

어쩌면 굴레는 벗어날수록 빠져드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의적 책임은 곧 정의의 문제와 직결된다. 정의는 공정한 룰이 보이지 않음에도 오롯이 작동하는 건강한 사회의 단면에 다르지 않다. 나는 때론 그들에게서 정의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불온하고 비열한 사회의 망령에 사로잡히며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음에 우울해진다. 나는 얼마나 공정한가의 주어진 원죄처럼 말이다. 나아가 탐욕은 길들이지 못하는 치명적인 욕망에 대해 강한 의문이 든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은 낭떨어지 위를 외줄타기하며 그 순간 입속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꿀 한 방울과 같지 않을까? 달콤함에 담보된 욕망,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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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0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며, 저는 엉뚱하게
곡우님이 무슨 일을 하실까에 대해서 열심히 추측하는 중입니다.

금융권의 채무 불이행이나 변제를 위한 팀일까? 아니면 복지 기관의 상담사? 또는 검사? 변호사?
글 분위기로 볼 때 아마 경찰은 아닐거야........ 이런 생각들.

의지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거죠. 그런데 현대 사회는
욕망을 너무 미화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탐미적인 영화, 광고, 문학, 미술...
남탓 하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사람의 처지 때문이 아니라 거미줄에 허우적대는 내면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전.

穀雨(곡우) 2010-10-07 11:00   좋아요 0 | URL
아...제 글이 좀 무거웠죠...^^
전 금융권에서 일합니다. 법무팀이라고는 하지만 기실 채권관리팀이 더 어울립니다.
제게 낯익은 풍경은 재판정에서 펼쳐지는 모습들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계형보다 쾌락형이 더 많은 현실입니다.
어젠 욱하게 하는 어떤 분 덕에 장황설을 뱉어 냈습니다.
다시 봐도 거칠기 짝이 없는 글입니다. 내릴까 심각하게 고민중....^^

마녀고양이 2010-10-07 11:39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었는데요.
아마 열받는 사람들, 한심한 사람들 많이 만나실거 같습니다.
스트레스 많이 받으실듯 합니다.

그리고, 댓글을 달았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맘에 걸리시면, 글 내리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가끔 그런 글 있습니다. ㅎㅎ

穀雨(곡우) 2010-10-07 12:08   좋아요 0 | URL
스트레스야 어디든 없을 수 있을까요...?
근데 더 황망한 건, 내부의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겁니다.
소통이 막힌 상태, 꽉 조이는 옷을 입은 것처럼 참
불편합니다.